111.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리겠어.
***
차수희는 품에 안겨든 유지현의 등을 쓸어내렸다.
울먹이면서 웅얼거리다시피 한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내가 아빠 욕을 진짜 엄청 많이 했거든?”
“응.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딸은 몰랐잖아. 괜찮아. 울지 말구.”
“풀 씹으면서 아빠 생각했는데? 막 잘근잘근 씹었단 말야. 그래도?”
‘그건 좀······.’
차수희가 보기에도 그 정도면 충격을 받을 만하다 싶었다.
곧이어 마음속으로 백운상에게 물었다.
<오빠가 그 정도였어?>
<신교 사람들이 하가를 욕했던 기준으로는 지현이 정도면 엄청 착한 거예요.>
<아휴.>
한숨을 쉰 차수희는 유지현을 달랠 최선의 방법이 무엇일지 빠르게 생각했다.
‘무턱대고 괜찮다고 하는 건 소용없을 것 같구. 아, 그러면 되겠다.’
묘안을 떠올린 차수희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딸도 지금은 아빠가 나쁜 사람 아니라는 거 알지?”
“알아······.”
“그래도 미안해서 그래?”
“응. 아무리 모르고 그런 거라도.”
“그래도 딸. 엄마 생각에는 있잖아. 지나간 일로 미안해하는 것보다는 지금부터 아빠한테 잘해주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은데. 우리 지현이는 어떻게 생각해?”
유지현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여전히 죄책감이 깊게 스며 있었지만 솔깃한 어조로 물었다.
“지금부터 잘하는 거로 될까?”
“당연하지. 아빠가 우리 딸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면 엄마는? 엄마는 화 안 나?”
일 년쯤 전부터 부쩍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한 유지현이었지만 지금은 상당한 패닉 상태였다. 급기야는 논제에서 다소 벗어난 개인적인 고민까지 꺼내들고 말았다.
“아빠는 엄마 제일 좋아하고 엄마도 아빠 제일 좋아하잖아.”
“응?”
갑자기 꺼낸 말에 차수희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
유지현이 소심한 어조로 주섬주섬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아빠랑 엄마랑 별로 닮지도 않았어. 둘이 합쳐서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게 섞으면 그게 나야······.”
또래 중에서 최상위권의 외모라 능히 자부하는 유지현이었지만 부모님과 함께 있으면 한없이 초라해지는 걸 줄곧 느껴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조각 같은 외모와 압도적인 분위기에서 가장 비중을 적게 차지하는 부분.
‘귀엽다’라는 느낌만 얼추 물려받은 것이다.
해서 자세히 보면 아주 안 닮은 건 아니지만 그 정도로 만족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로또 1등 상금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었는데 번호 하나 차이로 3등을 해 버린 느낌이랄까.
“나는 잘하는 거도 없어. 딱 하나, 전생 덕분에 운좋게 각성자인 거. 그거밖에 없는데 알고 보니까 아빠 험담이나 실컷 했구.”
차수희의 표정이 굳어져 갔지만 알아채지 못한 유지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둘이 서로 제일 좋아하는 건 아무 불만 없어. 그런 게 아니라, 괜히 나 같은 애가 맨날 엄마아빠 속이나 썩이니까. 나 스스로가 너무 싫어서- 아얏!”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쥔 유지현이 차수희를 올려다봤다.
아픈 것보다도 놀란 감정이 훨씬 컸다.
첫 번째로 엄마가 자신을 때렸다는 것.
꿀밤을 살짝 먹인 정도였지만 그조차도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유지현은 자신이 아주 큰 잘못을 했다는 걸 알았다.
차수희의 눈가가 새빨개져 있었다.
언제나 완벽했던 엄마도 사실은 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엄마?”
“우리 딸 그런 생각하면 안 돼······.”
단정적인 어조가 낯설었다.
엄마의 말은 항상 사려 깊었고, 유지현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주었는데.
어쩌면 지금이, 유지현이 엄마가 아닌 차수희라는 한 명의 사람과 마주하게 된 첫 순간일지도 몰랐다.
“엄마랑 아빠는 지현이가 엄마아빠 딸이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하나도 고생이라고 생각 안 해. 속 썩이는 것도 아니구.”
오히려 그 말에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유수현과 차수희가 자신에게 진실을 숨겼던 것도 단순히 천마와 무림맹주 같은 문제 때문이 아니지 않을까.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가 있고, 유지현 자신을 위해서 숨긴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의 근원이 되는 감정의 이름은.
틀림없이 사랑일 것이었다.
유지현은 갑자기 스스로가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본래도 그다지 똑똑하지 않은 건 알고 있었지만.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불속성 효녀인 건 자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과도 차원이 달랐다.
불꽃으로 온몸을 활활 태우며 그대로 엄마아빠에게 돌격한 것만 같은 압도적인 죄책감.
‘SSS급 불효녀······.’
불효녀에도 등급이 있다면 필시 그러하리라.
하지만 유지현은 힘겹게나마 자책감을 떨쳐냈다.
비록 명백한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생각을 하면 부모님이 슬퍼하시니까.
해서 유지현은 답했다.
“엄마 고마워요.”
“지현이가 엄마한테 왜 고마워?”
“나 낳아주고 이뻐해주고 키워줘서. 엄마 사랑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아빠가 들으면 섭섭해하겠다.”
“지금은 엄마랑 있으니까 엄마가 1등 맞아.”
유지현은 양팔을 벌려 차수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이 다시 집 방향을 향해 걸었다.
“나 지금은 안 물어볼게. 아빠랑 엄마가 왜 그랬는지.”
“우리 딸 정말로 그래줄 수 있어?”
“응. 잘은 몰라도 그게 맞는 것 같아. 왜냐면 나 엄마아빠 엄청 사랑하고 믿으니까. 대신에 나 조금 더 철 들고 나면 그때는 말해줘야 돼?”
일단 이걸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한 자신의 인성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내리면서 차수희가 답했다.
“응. 그렇게 하자. 우리 딸 고마워?”
“으응.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게 맞잖아.”
“지금 할 수 있는 일?”
유지현이 굳은 결의와 함께 말했다.
“다른 건 제쳐두고서라도 타샤는 꼭 찾아야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게 먼저야.”
“······.”
탄식인지 비꼬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어조로 백운상이 평했다.
<저지른 죄의 끝이 도대체 어디인지도 모르겠네요. 그쵸, 조사님?>
<응. 우리 셋 다 반성하자.>
차수희가 태연하게 맞받아쳤고 백운상은 다시 종적을 감췄다.
기척이 사라지기 직전에 ‘도둑고양이’라는 말이 들려오긴 했지만 차수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방금의 일합 승부에서 패배한 자의 단말마 따위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집 앞에 거의 다다라서 유지현이 물었다.
“근데 나 아빠한테 뭐라고 사과하지?”
“걱정 안 해도 돼. 진심만 말하면 아빠 다 이해할 거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이 말하면서 유지현이 현관문을 힘차게 열었다.
***
“이름은?”
“이수민.”
힘주어서 길다란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머리칼 주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다시 말해봐. 이름은?”
“치코리타라고 쓰고,”
“그리고.”
“배신자라고 읽습니다······.”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어떻게 배신을 했지?”
“일신의 안위에 눈이 멀어서 삼 년을 고락해 온 전우를 팔아넘겼습니다······.”
“그래서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셨나?”
“그렇지 않습니다······.”
“동료들에게 미안하긴 한가?”
“한없이 미안하고 슬픕니다······.”
흐음. 이제 좀 흡족하구만.
마지막 작업만이 남았다.
“그러면 현재 당신의 마음을 한 번 직접 표현-”
“이런 시바알-!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참다 참다 못 참겠는지 이수민이 거세게 항변했다.
어떻게든 눈물을 떨구긴 싫었는지 눈에 힘을 주면서 중얼거렸다.
“이제 포니테일 안 할 거야. 머리 스타일 바꿀 거라고······.”
“오우. 댓츠 노노. 함부로 머리카락 자르고 그러면 안 돼.”
근엄한 부산 사투리로 타일렀다.
그러자 이수민이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쏘아붙였다.
“그거 알아?”
“뭐.”
“당신 진짜, 가끔 말투 존나 좆같아. 얼굴이랑 존나 안 어울려. 내가 당신보다 더 셌으면 옆에 항상 두고 쥐어패면서 고쳐줬을 거야······.”
오호라, 용감한 소신발언이군.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역시 할 말은 한다. 치카콜라.”
“뭐라는 거야······.”
“참고로 치카콜라라는 건 양치질의 치카치카와 중의적인 의미여서, 민트맛 콜라로까지 이어지는 수준 높은-”
“그러니까 그딴 아저씨 개그하지 말라고!”
이 새끼 지금 민트를 모욕한 건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쓸 필요까지는 없고, 집안 구석구석을 쏘다니던 성화를 불러 말했다.
“돌격!”
“앞으로!”
쾌활하게 외친 성화가 이수민에게 달려갔다.
그대로 허리 위에 타고는 외친다.
“이랴! 이랴아!”
본래 애들은 배우는 게 빠른 법이지.
성화에게 이수민은 이미 놀이동산 회전목마 같은 존재였다.
흐음, 좀 미안하긴 하네.
아무리 배신자라지만 그래도 한때는 동료였는데.
개심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잖아.
더 놀고 싶어하는 성화를 떼어놓고 이수민에게 물었다.
“수민아.”
“뭐야. 또 뭐하려고 그래.”
“우리 다시 잘해보지 않을래?”
“······!”
이수민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 제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나갔다.
“애 엄마가 갔으니까 아마 지현이 잘 달래서 올 거고. 네가 잘만 말해주면 조금 더 원만하게 수습이 되지 않겠냐? 나도 갑자기 일이 틀어져서 화가 났는데 생각해 보니까 우리 사이에 너무 심했던 것 같아. 진짜 미안하다.”
머리를 구십도로 숙이며 사과했다.
근데 이 새끼 반응이 왜 이러지?
나름대로 진심으로 사과한 건데 왜 내 말 한 마디 끝날 때마다 표정이 썩어가는 거냐고.
내가 그런 의문에 빠져 있는 차에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애 엄마와 지현이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아무튼 수민아, 내가 나중에 다시 정말로 정중하게 사과할게. 너도 내 머리카락 잡아당기고 말타고 돌아다녀도 돼. 제발 지금은 말 좀 맞춰주라.”
이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됐어!
그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나는 문으로 들어서는 지현이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막을 수가 없었다.
‘다녀왔습니다’라며 지현이가 현관에 발을 디디는 것과 동시에,
“치코! 치코오옷-!”
참혹한 표정을 한 이수민이 눈물을 흘리며,
네 발로 엎드린 자세로 그렇게 울부짖는 것을,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
소음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이수민은 유지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엄마, 나 아까 말했던 거 부분적으로 취소할래. 아빠한테 내가 몰랐던 부분이 있는 건······, 그건 맞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한 유지현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언니 일어나도 돼요. 집에 가요. 내가 데려다줄게······.”
이수민은 못 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굴욕감에 부르르 떠는 연기도 잊지 않았다.
유수현이 지금도 굳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참을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팠지만 이수민은 그럼에도 떳떳했다.
‘당신이 잘못한 거야.’
맨날 그렇게 헷갈리는 말만 해대니까.
설령 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자꾸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해대니까.
아무리 함부로 대해도 좋아하는 마음이 변함없으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거다.
나쁜 건 저 사람이다.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나아.’
어차피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적어도 마지막 순간을 맺는 것은 자신이고 싶었다.
현관문을 나서는 이수민의 얼굴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렀다.
‘이제 정말 안녕······.’
그리고.
경이적인 판단력으로 이 대참사의 전말을 모두 이해한 차수희가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이수민을 기존의 체계로 판단하는 건 힘들겠다고.
‘쟤는······, 쟤는 레벨 0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