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세상에 나만한 효녀도 없을 거야.
순간적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오갔다.
우선 치코리타 이 비겁한 놈이 그래도 마지막 선은 넘지 않았구나, 하는 것.
원래는 정말 인정사정없이 벌을 주려고 했는데, 조금은 차감해줘야겠구나 싶었다.
하기야 자기만 쏙 빠져나가려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하는 게 저놈한테도 좋았겠지.
내 정체 같은 건 전혀 모른 채로 협박을 당했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굳이 참작을 해줄 필요는······, 이게 아니지.
지금 이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다.
우리 딸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을지 또다시 기를 쓰고 숨길지.
그게 가장 중요했다.
지현이가 재차 말했다.
“아빠 왜 대답을 안 해? 도저히 나한테는 말 못 해주겠어?”
나는 마음속으로나마 고개를 저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다.
딸이 천마인데 아빠가 무림맹주였다고 하면 혹시라도 부녀지간에 불화가 생길까봐.
지현이가 나를 피할까 걱정이 돼서 숨겼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다.
‘전생에 무림맹주 하무린이었다’라고 털어놓은 후에 노력하면 되니까.
지현이와 충분히 대화를 하고, 설령 전생에 내 험담을 들었던 적이 있더라도 오해는 풀면 된다.
해서 지금까지 내가 쭉 정체를 숨겼던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구에 괴수가 나타나거나, 무림인들이 환생을 하거나.
여태 벌어졌던 수많은 일들에 지현이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으니까.
만약에 우리 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자기 탓이라고 자책할지도 모른다.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다.
나는 그게 싫었다.
지현이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아직 교복 입고 학교 다닐 나이에 그런 마음의 부담을 지게 하기 싫었다.
그래서 그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원천적으로 차단하려고 있는 힘껏 숨겼던 것인데.
아무래도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아빠. 나 진짜 마지막으로 말할게. 이번 한 번만 물어보고 다시는 안 물어봐.”
통보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지현이 말대로, 답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건에 대해서 더이상 추궁하지는 않겠지.
당분간은 어색하겠지만 집안 분위기도 결국은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하지만 그렇게 넘겨버린다면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지현이와 나 사이에 벽이 남아버리게 된다.
어쩌면 십 년, 이십 년이 지나도 남아 있을 벽이었다.
그러긴 싫었다.
“한 가지만 아빠랑 약속해줄래?”
“뭘?”
“지금부터 아빠가 말할 수 있는 건 다 말할 거야. 근데 그 이상은 묻지 않기로.”
“일단 말부터 해줘.”
됐다.
최소한의 안전선은 확보했다.
이제 남은 건 내가 가진 무기를 총동원해서 뱀처럼 혀를 놀리는 것뿐.
우선 가장 큰 무기부터 사용할 거다.
현대 한국이든 강호무림이든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그것.
바로 혈연, 학연, 지연이지.
“아빠가 사실은 지현이 사조님이랑 엄-청 친한 사람이었거든?”
“됐고 이름이 뭐였는데?”
······어?
“딸도 백운상 사조님 알지? 아빠가 그 사람이랑 스무 살 적부터-”
“그러니까 이름 뭐였냐니까?”
“아빠가 천마신교 팔대 가문 수장들이랑도 한 번씩은 이래저래 안면이-”
“이름.”
반항기 어린 표정을 한 지현이가 추궁했다.
“제가요. 귀하의 존성대명을 알고 싶다니까요?”
이런 젠장.
마침내 고개를 푹 떨구고,
내 입에서 패배 선언 같은 고백이 흘러나왔다.
“그게 있잖아. 하무린이라고······. 혹시 딸이 들어봤을지 모르겠는데······.”
어째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놀라서 소리를 칠 줄 알았는데.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지현이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멍한 표정이 되어서는 되묻는다.
“정파 무림맹주? 권력욕의 화신?”
“그랬던 적도 있기는 한데······.”
“신교제일대적 협검무제?”
“한때는 그렇게 불리기도-”
“아빠가······, 그 고금제일 불한당 하무린이라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팔을 뻗으며 열렬히 항변했다.
“그거 다 새빨간 거짓말이야! 아빠는 진짜로 못된 놈들만 혼내주고 다녔어!”
지현이가 고개를 흘깃 돌렸다.
그 시선에 걸린 건 천하의 비겁자 치코리타였다.
“못된 놈······? 수민 언니가······?”
결정했다.
본래부터 이수민 머리칼을 잡아 당겨보고 싶기는 했지만 한층 더 각오를 굳혔다.
뒤에서 머리채 휘어잡고 격하게 두들겨 패줄 거다.
아무짝에도 도움 안 되는 저 타는 쓰레기 같은 놈······!
내 살기에 반응한 이수민이 다시 히익, 하면서 뒷걸음질친다.
이수민뿐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집 거실 상황이 총체적으로 난국이었다.
애 엄마는 그나마 수습을 해보려고 개입할 타이밍을 엿보는 중이었고, 나탈리야의 모습을 한 성화는 대화가 묘하게 웃기게 흘러간다 싶었는지 어느새 겁을 먹은 게 아니라 다소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들은 솔직한 법이니까.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지현이 표정이 복잡하게 변해간다.
그러면서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린다.
“저기······, 딸?”
하지만 지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원망스러운 눈길로 이수민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내가 잘못 읽은 게 아니라면 거기 담긴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지현이가 현관으로 뛰쳐나갔다.
내공까지 운용했는지 순식간에 마당을 넘어 집 밖으로 향한다.
“당신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당장 쫓아가려고 하는 차였는데 애 엄마가 나를 가로막았다.
“오빠 잠깐만. 오빠는 여기 있어. 내가 갔다올게.”
다급한 와중에도 그게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지금 내가 가는 것보다는 애 엄마가 가는 게 훨씬 낫겠지.
애 엄마가 바쁘게 현관을 나섰고, 이제 집에 남은 건 세 사람이었다.
나, 성화. 그리고 비겁한 배신자가 하나.
그리고 배신자에게 줄 거라곤 그에 합당한 징벌뿐이다.
일단 상냥하게 말을 건넸다.
“이야, 우리 치 사장님. 간댕이가 부어도 아주 제대로 부었나봐. 그치?”
“어, 어?”
이수민이 당황해서 답했다.
나는 연극적인 어조로 거실을 둘러보며 이어 말했다.
“오, 이걸 어쩌나. 배신자를 보호해 줄 천마님이 어딘가로 가버리셨잖아? 우리 치 사장님, 이거 정말 좆된 것 같은데?”
그제야 사태파악이 된 이수민이 양손을 내뻗으며 다가오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난 잘못 없어! 말 안 했잖아! 그게 최선이었다고!”
“너는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냐?”
내 정체가 스미스라는 걸 실토한 시점에서부터 이미 아웃이었다.
하무린이라는 것까지 말 안 한 게 결코 선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거기까지 말해버리면 자기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들키게 되니까.
그래서 모른다고 한 거잖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서.
비겁한 치코리타 놈은 단지 폭탄 떠넘기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라잖냐. 그냥 달게 받는 게 어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래! 난 억울해! 너희 사기꾼 부부가 하라는대로 한 게 다잖아!”
마침내 치코리타의 추악한 본심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이미 끝장이지만 나는 아직 미래가 창창하다고! 지현이랑 알콩달콩 살아갈 수 있단 말야! 굳이 나까지 같이 죽을 필요는 없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흐음. 생각보다 훨씬 더 추악했다.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는 없겠군.
오른팔을 붕붕 돌리면서 배신자에게 다가갔다.
“이 건방진 새끼가 뭐가 어쩌고 어째? 너 오늘 어디 한 번 죽어봐라.”
“오, 오지 마! 경찰에 신고할 거야!”
이수민이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면서 하는 짓이란 게······,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천군아? 너 진짜 사람이 어디까지 추해지려고 그러냐······.”
“와아!”
이수민이 방패막이로 내세운 성화가 신나서 꺄르르 웃었다.
액면가는 여고생이라도 정신연령은 네다섯 살밖에 안 되는데 쟤를 붙잡고 저러고 싶은 건가?
저렇게라도 살고 싶은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봐줄 내가 아니지만.
과거에 다녀온 뒤로 마침내 신화경에 발을 디뎠다.
그 오묘한 무리를 바탕으로 한 보법.
순식간에 이수민의 뒤를 점하고, 그대로 오른손으로 머리채를 잡았다.
“하, 하지 마!”
엎드린 자세로 바닥에 엎어진 이수민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나는 친절하게 답했다.
“닥쳐, 이 새끼야!”
그대로 이수민의 등을 깔고 앉아서 손에 움켜쥔 머리채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울어봐! 치코, 치코옷! 하고 울어서 네 순수를 증명해봐!”
물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내 왼손은 이수민의 입을 막고 있었다.
“으읍, 읍-!”
“어? 못 우네? 네가 더러운 배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지?”
“치으읍!”
‘치’까지는 나왔지만 ‘코’는 못했으니 무효다.
비어버린 사운드는 구경하고 있던 성화가 대신 풍부하게 채워줬다.
“이랴! 이랴아!”
***
유지현은 충격과 공포 속에 밤거리를 달려나갔다.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내가 패륜아라니! 내가 패륜아라니!’
물론 아버지 유수현의 전생이 협검무제 하무린이라는 것에 놀라긴 했다.
신교에 오래도록 전해져 내려온 어마어마한 악명.
고금에 다시 없을 깡패 새끼였다느니, 신교에 협상하러 와서는 장로 셋의 팔다리를 분질러 버렸다느니.
무공만 뛰어난 게 아니라 갖은 협잡질과 모략에 통달해서 그것만으로도 제거대상 일순위라느니.
원독에 찬 말들을 많이도 들었지만,
유지현은 그런 것보다도 본인이 알고 있는 아버지를 더 믿었다.
‘서로 진영이 달랐으니까 과장된 부분이 있을 거야. 우리 아빠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을 리는 없어.’
이수민에게 금제를 가하고 몇 년 동안 협박을 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신빙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전생에 들었던 만큼은 아닐 것이다.
기실 진실을 말하자면 수십 년간 전해 내려오며 오히려 소문이 상당히 축소된 감이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유지현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믿었다.
해서, 유지현이 집 밖으로 뛰쳐나간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나는 쓰레기야······!’
비록 전생의 일이라고는 하나 없던 일로 할 수는 없다.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다.
신교에 전해져 내려오는 동요.
하무린을 욕하는 노래를 재잘거리며 장로들 앞에서 재롱을 보였던 일.
사부인 진천군이 해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며 ‘하무린 그 작자는 정말로 천하에 둘도 없는 개자식이었네요!’ 라고 분개했던 일.
채소를 씹으며 이따금 생각하기도 했다.
본인이 말해 봐야 굴욕적인 일화일 뿐이니 진천군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지만, 사숙이 되는 영호경에게서 들었던 이야기.
하무린이라는 자가 사부님께 몹쓸 짓을 했다고 하셨지? 라면서 당시의 설운혜는······.
‘내가! 채소를! 우리 아빠라고 생각하면서! 씹었어!’
갑자기 맥이 탁 풀린 유지현이 땅바닥에 풀썩 넘어졌다.
아스팔트 위에서 수영이라도 하듯이 팔다리를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이 세상에······, 나만큼 불속성 효녀가 또 있을까······?”
그리고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현아!”
엄마인 차수희였다.
‘엄마도 이거 알면 나 싫어할지도 몰라······.’
유지현이 판단하기에는 아무리 차수희와 유수현이 딸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그들 부부에게 단 한 명 소중한 사람을 꼽아보라면 서로일 것이다. 유지현 본인은 두 번째 정도.
그러니 이 사실을 안다면 엄마도 아마 화를 내겠지.
하지만 털어놓지 않을 수도 없다.
부모님이 자신을 속이면서 그간 어떻게 암약했는지.
나탈리야는 어떻게 된 건지.
그런 것들도 물론 물어봐야 하겠지만,
자신 역시도 속이는 것 없이 솔직해야 했으니까.
차수희가 달려와 유지현의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그 말에 깊이 담긴 애정.
마침내 사춘기 여고생의 감수성이 폭발하고 말았다.
“엄마······. 엄마아······!”
펑펑 울며 유지현이 차수희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