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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09화 (109/130)

109. 세계정복이라도 하려구?

이 집안에서 일어난 풍파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원죄는 모두 나에게 있다.

예전에 애 엄마가 말한 것처럼 처음부터 지현이한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면?

이렇게까지 거짓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전생도 마찬가지다.

만약에 죄책감을 이겨내고 백운상 따라서 같이 등선했다면.

그랬다면 선계에서 백가놈과 일월령과 셋이서 잘 지냈을지도 모르지.

물론 내가 내린 결정들에 대해서 후회한다는 건 결코 아니다.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했고, 아마 그것보다 잘할 수는 없었을 거다.

다만 그렇더라도······.

이 상황은 정말로 팔짝 뛰고 돌아버릴 것 같다.

달그락하는 소리가 들려서 얼굴을 들어 봤다.

냉동실에서 뭔가를 꺼내던 애 엄마가 시선을 느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다가,

“아······.”

면목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확 돌린다.

그러더니 그대로 내가 있는 거실 쪽으로 걸어왔다.

“오빠 여기 얼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애 엄마가 탁자에 얼음통을 내려놓았다.

시선은 여전히 미묘하게 비껴나간 채였다.

손을 뻗어서 애 엄마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옆에 앉히니 어색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몸을 뒤척였다.

이 순간이 중요했다.

심호흡을 하며 말을 건넸다.

“왜 그래?”

“그냥, 오빠한테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

그래.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아까 나눈 대화를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

침대에 함께 누워서 내 품에 폭 안겨 있던 애 엄마가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오빠.’

‘왜?’

‘나 부탁 있다는 거 지금 말할게.’

‘응. 말해줘.’

이때만 해도 다소 긴장은 했지만 내 심신은 퍽 안정되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한 순간이었으니까.

애 엄마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계속 행복했겠지.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이거야. 지금부터 하는 말 끝까지 들어주면 좋겠어.’

그 말 듣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확 덮쳐왔다.

끝까지 들어달라는 건 어지간해서는 그렇게 못할 만큼 충격적인 말이 나올 거라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도 직감이란 게 아직 살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확신 가지고 말할 수 있어. 스무 살 전이랑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야.’

여기서부터 숨이 막혔다가, 이어지는 말로 숨이 한 번 더 막히는 바람에 오히려 숨이 트였다.

‘그리고 있잖아. 오빠 소꿉친구인 차수희.’

애 엄마가 자기 명치 쪽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은 여기 나랑 같이 있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내가 어떻게 그 짧은 순간에 모든 판단을 끝마쳤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스무 살 이전의 수희와 지금의 애 엄마가 서로 다른 사람이고, 지금은 함께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깨달은 것이다.

백운상이 내 소꿉친구 차수희이기도 하구나.

애 엄마와 백가 둘이서는 이미 합의를 봤구나.

그런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

불과 1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 모든 단서들이 조합됐으니까.

벚꽃이 핀 공원에서 애 엄마가 나탈리야에게 했던 말들.

<우리 딸한테 무슨 짓한 거야-!>

<내가 하루만 달라고 했잖아! 도대체 지현이한테 왜······?>

<지금 당장 우리 딸 이 자리에 데리고 와. 안 그러면 너부터->

<지현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돌려줄 테니까······.>

내가 모르는 사이에 둘 사이에 있었을 대화의 내용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아직 자신이 백운상임을 자각하지 못했던 나탈리야가 애 엄마에게 요구했겠지. 내 몸 내놓으라고.

그리고 애 엄마는 요구를 받아들였을 거다.

그러니 본래대로라면 어제 하루가 지나고 애 엄마가 정말로 어딘가로 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후에 생긴 일들의 결과로 백운상의 혼을 애 엄마가 거두었고, 둘이서는 이미 합의를 본 거다.

이렇게 된 이상 셋이서 잘 살아보자, 뭐 이런 식이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면 모두 이해가 된다.

어디 안 가겠다고 내게 약속한 것.

대신 부탁이 있다는 것.

병실 문을 나서면서 둘이 사실은 하나라면, 이라고 한 것.

내가 퇴원하고 싶다고 하자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한 것.

집에 와서도 눈에 띄게 당황한 것과,

욕실에서 침대로 눕혔을 때 했던 말.

아가야, 라고 들렸지만 사실은-

‘······!’

충격에 몸이 으스스 떨렸다.

그때 내가 안고 있던 사람은 애 엄마가 아니라 백운상이었다.

그리고.

‘오빠······?’

불안한 눈빛을 한 애 엄마를 마주하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

“오빠.”

“응?”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내가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리자 애 엄마가 조마조마한 듯이 말을 걸어왔다.

옅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미안하다는 생각.”

“오빠가 왜······?”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애 엄마가 묻는다.

나는 힘주어서 답했다.

“엄청 미안하지. 불안하게 했잖아.”

“그러니까 오빠가 왜 그런 걸 신경 쓰냐구······. 오빠는 정말로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그랬다.

아까 침대에서 애 엄마에게 이렇게 답했다.

괜찮다고.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이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진실을 털어놓고 내 처분을 기다리는 애 엄마에게 결코 티를 내고 싶지가 않았다.

셋이서 살게 될 거라는 게 이미 결정된 사항이나 마찬가지인 판에 애 엄마와 백가에게 화를 낸다고 무슨 득이 있겠냐는 거지.

오히려 애 엄마가 당황할 정도로 나는 빠르게 수긍했다.

어차피 받아들여야 할 거라면, 가능하면 내게 가지고 있을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으니까.

오히려 앞으로 애 엄마와 백운상이 혹시라도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될까 그게 걱정이었다.

내가 처신을 조금이라도 잘못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읽었는지 애 엄마가 말했다.

“하나만 확실히 해둬.”

“뭘?”

“앞으로 이 건에 대해서 나랑 운상이한테 미안해하지 않기. 일단 저질러놓고 강요한 건 우리니까. 오빠는 아무 잘못 없어.”

자기 이마를 쓸어올리던 애 엄마가 재차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줘. 운상이도 할 말 있다니까.”

내가 멀뚱히 바라보는 와중에 애 엄마의 표정이 바뀌어 간다.

뭐랄까. 바로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는데도 그리워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하가야.”

머릿속으로 뭐라고 답해야 할지 잠시 생각했다.

절묘한 줄타기가 필요했던 거다.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도 않지만 감격했다는 걸 충분히 내비칠 수 있는 방식.

다시 말해서, 애 엄마는 잘 모르지만 백운상은 인지할 수 있는 그런 인사.

그리고 내가 선택한 대답은 이거였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부를 거냐?”

백운상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럴 게다. 그게 맞아.”

방금의 대화로 눈앞의 여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내 소꿉친구 차수희가 아니라 전생에 내 연인이었던 백운상으로.

물론 현생에서 우리가 함께 보낸 이십 년 세월이 거짓은 아니지만, 그걸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해서 오롯이 자신이라 단언할 수 있는 백운상이고 싶은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내색은 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말투는 좀 바꾸면 안 되겠냐?”

현대식으로 말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이었는데 백운상이 갑자기 눈빛을 빛냈다.

“말투라 하시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를 말씀하시나요? 하 가가.”

“아니, 진짜 왜 그러냐······.”

“농담이다.”

슬쩍 웃어보인 백운상이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조사께서 말씀하신 그대로다. 네 잘못이 아니니 스스로를 책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구나. 하기야 네놈은 예전부터 그게 버릇이었지.”

“내가 미안해하고 말고를 왜 둘이서 결정하는데.”

백운상이 아련한 어조로 답했다.

“조사께서 양보를 해주셔서 얻은 기회다. 나는 오직 감사할 뿐 결코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이리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 해도-”

“······백가야?”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잠시 말을 멈추던 백운상이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니 조사께서 심기가 좋지 않으신가 보구나. 후에 새벽에 주무실 때 말을 걸도록 하겠다, 하가야.”

그러더니 다시 표정이 바뀌었다.

여러 번 보니까 알겠네. 지금은 애 엄마다.

다소 억울한 어조로 애 엄마가 항변했다.

“오빠 나 그런 생각 안 했어. 알지?”

“정말?”

“응.”

이윽고 나와 애 엄마가 동시에 웃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돌아왔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내 등으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거 생각보다 더 좆된 것 같아서.

물론 안 좋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지.

인정한다.

애 엄마가 어디 안 가서 좋고, 내 소꿉친구인 차수희가 돌아와서 좋고, 백운상과 재회해서 좋다.

좋아 죽을 것 같다.

그래, 나는 쓰레기다! 타지도 않는 쓰레기다!

하지만 얻는 만큼 노력해야 하는 것도 있는 법.

앞으로 내가 헤쳐나가야 할 일들에 대해서 다소 얕본 감이 있지 않았나 싶었던 거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방금 백운상에 이어 애 엄마와 나눈 대화에서만도 적절한 단어를 고르느라 속으로 머리를 싸맸다.

우리 세 사람 다 아직은 서로 미안해하는 상황인데도. 다시 말해서 오늘이 가장 편한 날일 텐데도.

슬슬 익숙해지면 지금보다 더할 거고, 내가 외줄타기를 잘 해낼 수 있을지 이제는 확신이 안 선다. 시발······.

그리고.

내가 몰랐던 압도적인 위기가 남아 있었다.

띠리릭.

도어락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애 엄마와 내가 동시에 현관 쪽을 바라봤다.

“······다녀왔습니다.”

지현이 목소리.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우리 딸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숨 죽이고 있지만 인기척이 더 느껴졌다.

지현이까지 포함해서 총 세 명.

애 엄마와 내가 서로를 쳐다봤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지현이가 거실로 발을 디뎠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우리 딸 뒤로 이수민과 성화도 보인다.

이수민은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이었고 성화는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지현이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술병으로 향한다.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어?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계셨네?”

어머니? 아버지?

지금까지 우리 애 키우면서 처음 듣는 호칭인데.

지현이가 다가온다.

다가오면서 흥얼거리듯이 물었다.

“뭐야? 세계정복이라도 하려구?”

“딸?”

“응? 내가 잘못 알았나?”

비릿하게 머금은 미소 뒤에 어렴풋이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분노.

지현이가 말을 이었다.

“둘이서 또 누구 속이고 협박하고 그런 계획 꾸미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아주 큰 착각을 했네! 아주 큰 착각을 했어. 어!?”

낮게 이어지던 말이 끝에 가서는 거의 비명처럼 커졌다.

우리 딸이 울고 있었다.

“아냐? ‘스미스 아저씨’랑······, ‘성화 가져간 흑막이 어쩌고 하던 언니’”

······들켰다.

“지현아. 엄마 말 좀 들어봐.”

애 엄마가 손을 뻗었지만 소용없었다.

한 발자국 물러선 지현이가 눈물을 흩뿌리며 재차 외쳤다.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가 있어!? 진짜 왜 그랬는데? 이유라도 말해봐!”

“그게 그러니까-”

“나 속이는 건 그렇다 쳐! 근데 수민 언니까지 때리고 협박하고!”

어째서 갑자기 사태가 최악으로 치닫게 됐는지 알았다.

치코리타 너 이 새끼 배신했구나!

내가 죽일 듯이 쏘아보자 화들짝 놀란 이수민이 지현이 뒤로 몸을 숨겼다.

키가 커서 가려지지도 않고 얄미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저절로 혈압이 오른다.

저, 저 배은망덕한 새끼 보소?

내 표정을 본 지현이가 양팔을 벌렸다.

당장에라도 이수민을 쥐어패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수민 언니한테 그러지 마! 몇 년 동안 금제하고 협박해놓고는! 이제 그렇게 못해!”

금제? 내가 그거 풀어준 지가 언젠데!

저 새끼가 혼자서만 피해자 코스프레를 단단히 했구나!

그 와중에도 그나마 남은 양심이 자조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이걸 어떻게 빠져나갈지 궁리부터 하고 있구나, 하는 반성.

하지만 양심 같은 걸 고려하지 않더라도 탈출구가 안 보인다.

이수민 이 새끼가 이간질을 한 건 분명한데 어디까지 사실대로 말하고 어디를 교묘히 감춰서 자기만 쏙 빠져나간 건지 바로는 파악이 안 되는 거다.

······이거 진짜로 어떡하지?

내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차에 지현이가 재차 말했다.

“아빠 대답해봐. 십만대산 문지기 이런 거 말고, 진짜로 나 마지막으로 주는 기회니까 솔직히 말해.”

눈물을 닦은 지현이가 마침내 물었다.

어쩌면 삼 년 전에 솔직히 털어놓았어야 할 문제에 대해서.

“아빠······. 전생에 누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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