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그거면 된 거야.
하가야.
그렇게 속삭이는 말을 들은 유수현이 얼굴을 살짝 떼었다.
이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응. 좋지.”
“어?”
<좋다고?>
백운상, 그리고 그녀와 감각을 공유하는 차수희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응, 좋지.’라는 대답이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수현의 말이 이어졌다.
“이쁜 ‘아가야’ 생기면 좋겠다.”
<잘못 들은 거였어!?>
워낙에 나직이 말한 데다가 목소리가 떨리는 바람에 정확히 발음이 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거기에 더해 유수현은 일련의 황당한 사태를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니까.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차수희가 아닌 백운상이라고는 아예 상상도 하지 못하리라.
잠시 손가락을 꼽아본 유수현이 화색이 되어 말했다.
“그러네. 오늘 시기도 딱 맞구.”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아무 대답 없이 침묵하면서, 백운상이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래요?>
<그렇긴 한데······. 잠깐만!>
유수현이 행복한 미소로 말했다.
“지현이도 동생 생기면 좋아하겠다.”
<운상아. 지금이라도 정정해. 정정! 다시 제대로 말을->
차수희의 외침은 허망하게 끊기고 말았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번에야말로 유수현이 백운상의 입을 막아버린 탓이었다.
“읍······!”
수많은 세월을 지나 마침내 가슴속의 정인과 다시금 닿았다.
백운상의 마음이 황홀경으로 물들었고 양팔을 둘러 유수현의 목을 감쌌다.
한편 차수희는 비교적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감각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마찬가지로 좋기는 했지만, 이 말은 반드시 하고 싶었다.
<너 일부러 넘어가는 거지! 갑자기 이럴 거야?>
충분히 유수현을 제지할 틈이 있었거늘.
심지어 아까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가능할 텐데.
“으음, 음.”
하지만 열정적으로 호응하는 백운상에게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는 것 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분노와 약간의 안타까움을 담아서 차수희가 읊조렸다.
<지금 당장 좋자고 그걸. 나중에 뒷감당 어떻게 하려구 그래, 진짜.>
꼭 해야 할 말만 끝낸 차수희도 이제는 마음을 비웠다.
이제는 생각이 나지 않는 초대 천마 일월령으로서의 기억.
하지만 가끔씩 꿈을 꾼 것처럼 백운상을 아끼고, 하무린과 설운혜를 아꼈던 마음이 지금도 자신의 안에 남아 있으리라.
그녀가 지금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솔직히 그녀로서도 좋기는 좋았다.
삼십 분 정도가 지났다.
휘몰아치는 거대한 폭풍 같은 감각 속에서, 차수희는 어느샌가 몸의 제어권이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지금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고 있는 건 백운상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마음속으로 얄미운 이름을 불러보았다.
<운상아. 운상아?>
기절이라도 한 모양인지 대답이 없었다.
차수희는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위에서 맞닿아 있는 유수현을 바라보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눈빛을 빛내고 말했다.
“오빠, 계속.”
“안 쉬어도 괜찮아?”
“응. 멀쩡해.”
감각을 계속 공유하고 있었으니 실은 아주 멀쩡한 건 아니었지만 그런 만큼 멈추기 싫었다.
이제는 마음껏 몸을 움직이며 차수희는 다짐했다.
앞으로 유수현의 식단에 신경을 많이 써야겠다고.
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이.
‘사실상 거의 1대2라고 봐야 하잖아?’
그 이외의 나머지 것들은 우선은 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할 일이다.
‘먼저 반칙한 건 운상이니까.’
물론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지 않는 그녀도 백운상만 탓할 처지는 못 되었지만, 그런 자기반성도 밀려드는 행복감에 곧 삼켜지고 말았다.
병실에서 이야기했던 ‘부탁’이 무엇인지 유수현에게 털어놓은 것은 그로부터 다섯 시간 후.
차수희와 백운상이 정확히 열두 번을 교대한 다음이었다.
***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쇼파에 앉아 여유로운 자세로 다리를 꼬고 있던 유지현이 현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꼭 비밀번호를 모르는 사람처럼 기계음이 천천히 이어졌다.
팔짱을 낀 채로 손가락을 까닥이면서 유지현은 기다렸다.
하지만 십 초가 더 지나도 문이 열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휴우.”
유지현은 일어나서 현관으로 향했다.
직접 버튼을 누르고 문을 벌컥 열었다.
“히익!”
“와아!”
기겁을 하는 이수민과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보이는 나탈리야.
유지현이 단출하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언니 집이잖아.”
“으응.”
그리고 현관을 넘어 거실로 들어오고 있는 나탈리야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타샤. 이제 괜찮아?”
“탈나이랴! 나 기억 안 나요!”
“뭐?”
황당한 대답에 유지현이 물었다.
천사같은 표정을 한 나탈리야가 이어 말했다.
“아무것도 몰라요!”
이미 마음속에 의심이 가득했던 유지현은 만만한 이수민을 쏘아봤다.
이수민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애가 정신적으로 충격을 많이 받았어. 일시적인 유아퇴행 어쩌구-”
“정말요?”
평소 같았으면 슬퍼서 어쩔 줄 몰라 했겠지만 지금은 ‘정말일까?’라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그렇다고 타샤를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이수민에게 물어본 것이다.
그러면서 유지현은 손에 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눈치를 살피던 이수민의 시선이 그곳에 가닿았다.
엄지손가락이 사진첩 근처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이수민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이야! 믿어줘!”
“믿어달라고요?”
“왜? 왜애?”
나탈리야의 모습을 한 성화가 불안한 듯이 두리번거렸다.
이어진 침묵.
유지현이 겨우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건 알겠으니까 저랑 사부님이랑 이야기를-”
“흐윽, 흑.”
울음소리에 말이 도중에 끊겼다.
싸늘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나탈리야가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싸우는 거 싫어······.”
아무리 의심에 사로잡혔다지만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나탈리야에게 다가가려고 한 순간.
화르륵!
푸른 불길이 세차게 타올랐다.
나탈리야의 몸 주변으로.
“싸우지 마아! 으흑, 흑. 싸우지 마!”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섞인 까드득, 소리를 이수민은 들었다.
이를 악무는 바람에 유지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
당황해서 덜덜 떠는 이수민을 향해 말한다.
“타샤가 아니라 내가 아는 애 같은데.”
“그, 그게 지현아. 그러니까-”
유지현이 나탈리야 옆으로 향했다.
머리를 쓸어주면서 달래주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불길이 멎었다.
그리고 유지현이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이름이 뭐라구?”
“탈나이랴······.”
“그거 말고 혹시 다른 이름도 있니?”
눈물을 닦은 나탈리야가 답했다.
“불, 성화······. 싸우지 마아.”
마침내 흘러나온 진실한 이름.
유지현이 눈을 부릅떴다.
익숙한 푸른 불길을 보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성화라니.
그리고 삼 년 전의 기억.
동굴에서 조우한 수상한 여성.
‘성화는 분명히 그 사람이 들고 갔는데.’
하지만 성화가 지금 이곳에 있다.
이수민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지현아-”
“잠시만 기다려줘요. 나 생각 좀 해봐야겠어. 그 애부터 달래주세요.”
이수민이 뻣뻣한 동작으로 나탈리야를 데리고 안방으로 향했다.
홀로 거실에 남은 유지현이 생각을 이어나갔다.
‘타샤는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도 물어봐야겠고.’
어제 의식을 잃고 있던 나탈리야.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성화라고 밝혔다.
공원에는 이수민과 유지현의 어머니인 차수희가 나탈리야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삼 년 전 동굴에서 만났던, 성화를 가져간 여성.
몹시도 아름다웠다. 마치 그녀의 엄마처럼-
‘엄마?’
유지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자기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우리 엄마가 힘을 숨긴, 아무튼 그거라고?’
지금까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유지현 자신도 전생에 천마였던 마당에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
‘그러면 스미스 아저씨는?’
헌터들의 교관 스미스.
요 몇 년 동안은 가끔씩만 얼굴을 봤다.
그가 말했다.
성화를 들고 모습을 감춘 흑막과 싸우고 있다고.
하지만 흑막이란 게 유지현 자신의 어머니라면?
애초에 모든 게 유지현을 속이려고 꾸며낸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면?
유지현이 들어간 던전에서 S랭크 괴수를 홀로 잡으며 등장한 스미스.
그때 유수현도 함께 있었다.
스미스는 묘하게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강조했다.
초대형 게이트를 닫을 때도 ‘엄마아빠한테 효도하라’라고 말했다.
유지현이 헌터 일을 하는 걸 싫어했다.
방학 숙제는 했냐면서 잔소리를 해댔다.
게다가······.
‘엄청 상냥했어.’
다른 사람들은 은근히, 혹은 대놓고 무서워하는 것 같았지만 유지현은 한 번도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정말 잘 대해줬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지막 퍼즐.
어제 공원에서 겪었던 일.
아버지 유수현이 피를 흘리며 허공에서 떨어졌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게 정말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무언가 엄청난 일을 겪고 온 게 틀림없었다.
‘만약에 아빠가 스미스 아저씨라면······.’
결론은 간단했다.
중학교 일학년 봄.
김치찌개를 먹으며 전생에 천마였음을 털어놓았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순간들이,
유지현이 알았던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다.
어떤 것들이 사실과 정확히 어떻게 다른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녀가 내린 추측이 모두 틀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물론 유지현에게는 그걸 확인할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안방에서 이수민이 나왔다.
유지현이 다가가서 손을 덥석 잡았다.
이수민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했다.
집의 가장 안쪽 방.
비밀의 방 문 앞에서 유지현이 조용히 물었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에 대해서.
“스미스 아저씨가 우리 아빠예요?”
그리고.
모든 게 좆됐음을 직감한 이수민은 전생에 천마였다는 것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최적의 선택을 했다.
자신만은 이 풍파에서 무사히 비껴나갈 수 있는 선택을.
그대로 무너져내린 이수민이 펑펑 울었다.
“미안해. 지현아, 미안해! 나는 진작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금제를 당했어! 그래서 그만······.”
“금제요?”
“응.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나를 협박하고······.”
물론 옛날옛적에 풀린 금제였지만 어쨌든 사실이었다.
유지현이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물었다.
“그럼 우리 아빠가 전생에 누구였는지는 알아요? 십만대산 문지기 이런 거 말고.”
“나도 잘 몰라! 나는 아는 거 없고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만 했어. 어쩔 수 없었어!”
이수민이 울면서 소리쳤다.
“그 사람을 사랑하니까! 흐윽, 흑.”
딸이 고등학생 여자애인 남자를 사랑한다는 말을 그것도 당사자인 딸 앞에서 한다니.
심지어는 그 딸이 자신의 제자라는 것까지 생각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촌극이었지만 결코 거리낌이 없었다.
몇 년 전에 이미 털어놓은 사실이기도 한 데다 무엇보다 명확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민은 살고 싶었다.
‘나는 살 거야······.’
유수현과 차수희.
사기꾼 부부에게는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 그 두 사람은 이미 끝장이다.
하지만 자신은 달랐다. 아직 미래가 있었다.
눈물을 흩뿌리며 이수민은 생각했다.
‘살 사람은 살아야지······.’
***
독한 술을 병째로 들이키며 고심했다.
애 엄마와 백가놈, 그리고 나까지 세 사람 중에 누가 제일 나쁜 것인가에 대해서.
술을 한 모금 더 마시니 결론이 나왔다.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이 집에 쓰레기는······, 오직 나 하나뿐.
“그래. 그거면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