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집에 가자.
***
넓은 호텔 방에서 이수민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주위로 우울한 분위기가 한껏 감돌았다.
‘어쩌면 불행이라는 단어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전생에는 살면서 재밌는 일은 많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힘들지도 않았다.
적당히 떵떵거리면서 살고 적당히 꼴보기 싫은 놈들 쥐어패고 그럭저럭 마음 편하게 살았다.
한데 현생은······.
그야말로 참혹하다는 표현도 모자랄 정도였다.
정확히 말하면 각성자 기관 주차장에서 유수현과 유지현 부녀를 만난 그 순간부터.
이수민은 이따금 그때 명함을 건네줬던 자신의 오른손을 분노를 담아 바라보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냥 지나갔었으면······!’
하지만 곧장 고개를 힘껏 흔들고는 자신의 뺨을 때렸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미쳤어, 미쳤어!”
어떻게 유지현과 재회한 그날의 기쁨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힘들더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다.
퍽, 퍼억!
묵직한 소리가 호텔 방에 울렸다.
침대에 누워 발장구를 치던 소녀.
나탈리야의 육신에 들어가 있는 성화가 놀라서 쪼르르 달려왔다.
“수민, 수민! 왜 그래. 아파!”
부리나케 손짓을 하면서 이수민의 손을 꼭 잡았다.
이수민이 복잡한 심경을 담아 성화를 바라봤다.
처음 깨어났을 때는 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급격하게 어휘가 늘더니 지금은 얼추 네다섯 살 아이 정도는 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중원말을 시키면 이보다 월등히 잘하긴 했다.
천마신교의 역대 신녀들 중에 성화의 본령을 몸 안에 거둘 정도의 자질을 가진 이는 시천마 일월령과 사부 백운상, 제자인 유지현까지 단 세 명뿐이었지만 그 세 사람과 함께한 세월만도 수십 년이 훌쩍 넘으니까.
반면에 유수현의 아내인 차수희가 데리고 있었던 시간은 채 삼 년이 되지 못한다.
한국말보다는 중원말을 잘하는 게 당연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중원말 같은 건 써먹지도 못하고, 사용해서도 안 되지만.
유수현과 상의하기로는 나탈리야도 충격 때문에 기억을 잃은 것으로 해둘 터였다.
사부인 백운상의 혼이 다시 돌아온다면 신경 쓸 문제가 아니겠지만, 일단은 그런 계획이다.
어느 정도 미리 교육을 시킨 다음 유지현과 대면하게 하는 것이다.
이수민이 물었다.
“네 이름이 뭐라구?”
“나, 성화!”
“그거 말고는?”
“······불?”
“그것도 말구. 누가 이름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한다고 했어?”
“으음.”
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고민하던 성화가 밝게 외쳤다.
“탈나이랴!”
“······나탈리야.”
“응. 그거! 그리구······, ‘나 기억 안 나요. 아무것도 몰라!’”
다소 경쾌한 느낌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야기 들은 대로 충실히 대답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수민의 마음속으로는 회의감이 커져만 갔다.
이런 얄팍한 계획으로 정말로 될는지 의문이 들었던 탓이다.
‘한국말은 기억하면서 자기 나라 러시아 말은 다 까먹는다고? 그게 앞뒤가 맞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유수현은 복잡한 심리용어 같은 걸 동원해서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무마시킬 계획인 듯했지만 이수민이 보기에는 택도 없었다.
‘우리 지현이를 바보로 아는 거야, 뭐야?’
그녀의 판단으로는 지금이라도 모든 걸 이실직고하고 유지현이 자비로운 처분을 내리기를 바라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거짓된 진실을 그보다 더한 거짓말로 감추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더 이상은 돌려막을 구석도 없었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 인간들······. 이쯤 되면 지현이 속여넘기는 데서 성취감 같은 걸 느끼는 게 아닐까?’
하지만 도리어 자괴감으로 돌아올 뿐이었다.
어쨌든 자신도 저들 부부의 하수인으로 암약하고 있었으니까.
“집에는 언제 갈 수 있으려나······.”
넋두리를 하며 이수민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문득 우웅- 하는 메신저 앱 진동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말하면 메시지는 아니었고 사진을 한 장 보낸 것.
이수민은 별 생각없이 터치를 해서 확인했다.
그리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민 수민! 이거 떨어졌어!”
성화가 휴대전화를 주워서 건넸다.
이수민은 그걸 잡으려 했지만, 재차 떨어뜨렸다.
손이 떨려서 제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메시지가 이어졌다.
이수민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주워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언니 지금 집에 없어요?>
<다른 방은 다 찾아봤는데······, 이 방은 잠겨 있어서 못 들어가구 있는데.>
<혹시 여기 있는 거는 아니죠?>
<한 번 들어가 볼까 하는데.>
발신인은 유지현.
보낸 사진에는······, 꼭 닫긴 방문이 찍혀 있었다.
“열지 마아아아악-!”
“끄아아악!”
세찬 비명소리에 함께 소리를 지르며 성화가 두 귀를 막았다.
화르륵 소리를 내며 푸른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마치 화음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띠링, 띠리링.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역시나 유지현이 걸어온 전화였다.
두려움에 몸서리치며,
양손으로 휴대전화를 붙들고,
이수민이 전화를 받았다.
화면에 비치는 유지현의 얼굴이 몹시도 밝았다.
“언니 오랜만!”
***
존경했었던 사부의 집 거실.
푹신한 쇼파에 등을 기댄 유지현이,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언니 요즘 병실은 되-게 좋네요? 꼭 호텔 같다!”
<어, 어······.>
이수민은 더듬거리면서 대답을 못했다.
유지현이 짐짓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응? 거기 병실 아니에요? 타샤 입원했다고 했잖아. 저기 뒤에 타샤 있는 거 보니까······, 병원 아닌가?”
<와아!>
평소 보지 못했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나탈리야가 손을 흔들었다.
유지현은 속에서 부글거리는 걸 참으면서 말을 이었다.
“근데 이상하다? 타샤 지금 아프다고 했는데 되게 건강해 보이네?”
<그, 그게 지현아. 그러니까.>
“언니 보고 싶어요.”
<······응?>
유지현이 시커먼 미소를 지으며 칭얼대듯이 말했다.
“이 제자가 지금 사부님이 어엄청 보고 싶은데. 사부님이 집에 안 계시니까 너무 심심한 거 있죠? 어찌나 심심했던지 ‘한 번도 못 들어가 본’ 안쪽 방에 뭐가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혹시 방 안에 신기한 게 있으면 남들한테 자랑하고 싶기도-”
<아, 안 돼!>
다급한 외침.
유지현은 잠자코 기다렸다.
지금 그녀는 나름대로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비밀의 방을 이미 열어봤음을 이수민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아직 열어보지 않은 것으로 치겠다는 의미.
방 내부가 아니라 닫힌 문 사진을 보낸 것에는 그러한 늬앙스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유지현의 요구조건은 간단했다.
“언니. 사랑하는 우리 수민 언니. 사부님.”
<지, 지현아.>
“······빨리 보고 싶어요.”
어서 와라.
지금 돌아온다면 이 방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
이곳에 와서, 나에게 협력하라.
차가운 눈빛으로 유지현은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마침내 이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갈게.>
“응, 사부님. 빨리 와요! 아, 맞다. 이거 영상통화 끊으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그대로 휴대전화 들고 오시면 좋겠는데.”
‘어디다 연락해서 대책회의 하실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으실 거예요······.’
속으로 되뇌인 유지현이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타샤도 데리고 와주세요. 엄청 걱정했는데 이제 그래도 괜찮은 것 같으니까.”
아까 환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던 나탈리야는 겁을 집어먹었는지 화면 구석에 서 있기만 했다.
‘타샤가 저런 행동을 할 리가 없잖아?’
오늘 이 자리에서 이제까지의 모든 의문을 낱낱이 풀어낼 것이다.
힘겨워하는 이수민의 표정에 마음이 몹시 아팠지만 유지현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는 것으로 떨쳐냈다.
사람이란 때에 따라서는 자비심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렇게 해야만 할 순간이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라면······.
그걸 위해서라면 유지현은 얼마든지, 지금보다도 더 냉혹해질 수 있었다.
***
“나 이제 퇴원해도 되지 않을까?”
“응?”
병실 침대맡에서 사과를 깎고 있던 애 엄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토끼 모양으로 자른 사과조각을 건네면서 내게 묻는다.
“지금 퇴원한다구?”
“응.”
미리 준비해 두었던 논리를 차근차근 꺼냈다.
“지현이 문제도 해결됐고, 여기 더 있을 의미도 없잖아?”
“그렇긴 한데······.”
어차피 각성자한테 단순외상은 치료에 큰 의미가 없다.
며칠 일찍 퇴원한다고 지현이가 의심을 품을 일은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애 엄마가 머뭇거렸다.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당신은 여기 더 있고 싶어? 그냥 집에 가자.”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냐. 난 가야겠어.”
다소 거친 동작으로 몸을 일으키고, 애 엄마에게 선언했다.
“빨리 둘만 있고 싶어.”
우리 딸은 볼일 있다고 밤늦게나 돼서 들어온다고 했으니까.
지금 시간이 오후 한 시.
병원에서 집까지 얼마 걸리지도 않으니까, 퇴원하고 집에 가면 최소한 여섯 시간은 넘게 확보하는 거다.
애 엄마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내가 못 살아······.”
좋으면서 뭘 그래,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대로 최단시간으로 퇴원수속을 밟고 집으로 향했다.
일단 로맨틱한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에, 기회가 온 것 같으면 애 엄마가 새벽에 했던 말에 대해서도 자세히 들어보고 싶었다.
나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 집에 가면 이야기를 해준다고 했으니까.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나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그 문제를 정리하고 싶었다.
그리고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뒤에서 애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오빠?”
곧바로 들쳐업고 침실로 향했다.
애 엄마가 놀래서 외쳤다.
“오빠, 잠깐만! 타임!”
“당신도 내가 타임이라고 할 때 안 들어줬잖아.”
단호하게 답했다.
물론 애 엄마는 악몽에서 그랬던 거긴 하지만.
애 엄마가 당황한 목소리로 반론을 하려고 했다.
“나 그런 적 없는-”
“어허, 가만히 계세요.”
사실 저항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하는 둥 마는 둥이었으니까.
발을 앞뒤로 차듯이 움직여서 발등이 내 허벅지 부근에 닿았지만 하나도 안 아팠다.
그대로 애 엄마를 침대 위에 내려놨다.
내 눈빛을 받은 애 엄마가 흠칫 몸을 떨었다.
흐음, 뭔가 이상하긴 하네.
침실에 들어오기 전까지야 가끔씩 하던 컨셉이었다고 쳐도 보통 이쯤 되면······.
“오빠 잠깐만.”
“······응?”
“휴우······.”
애 엄마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결연한 의지를 담아 내게 말했다.
“나 씻고 올래. 진짜, 잠깐만 시간 좀 줘. 응?”
이 정도까지 말하는데 싫다고 하기도 뭐하고.
아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 엄마가 여전히 복잡한 표정으로 침실에서 나섰고 곧 물소리가 들렸다.
***
백운상이 혼비백산해서 말했다.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수습 어떻게 할 거냐구요!>
<일단 시간을 벌었으니까 같이 방법을 생각해봐. 우리 이심동체잖아?>
반면에 훨씬 태연한 어조로 답하는 차수희에게 백운상이 재차 외쳤다.
<방법이고 뭐고 샤워를 천년만년 할 수는 없잖아요!>
<응. 그러니까 최대한 빠르게 생각해야지.>
<진짜 이게 뭐람······.>
본래 백운상과 차수희의 계획으로는 충분히 안정된 분위기에서 말해야 했다.
현재 차수희의 몸 안에는 두 명의 영혼이 들어 있다는 것과,
새로 들어온 영혼이 나탈리야, 다시 말해 백운상의 영혼이며,
그녀가 실은 유수현의 소꿉친구 차수희이기도 하다는 사실까지.
유수현이 최대한 혼란스럽지 않게 털어놓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분위기만 적절히 조성된다면 차수희는 유수현을 설득해낼 자신이 있었다.
부부 사이가 완전히 예전처럼 되는 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겠지만 그래도 고비만 넘긴다면, 어쩌면 지금보다 좋아질 수도 있었다.
어찌됐든 차수희와 백운상 둘 다 유수현과 보낸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함께 가지고 있었으니까.
한데 순서를 차례로 밟아나가기도 전에 대뜸 최종단계에 맞닥뜨리고 만 것이다.
백운상이 힐난조로 말했다.
<도대체가 얼마나 사이가 좋았으면 퇴원하자마자!>
<왜? 혹시 부럽고 질투나서->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정곡을 찔린 백운상이 목소리를 높였다.
차수희가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은 그거부터 다시 한 번 해 보자.>
<이 상황에서?>
<오빠한테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데 내가 계속 전달해줄 수는 없잖아.>
본래 백운상의 영혼이 들어온 그 시점부터 감각은 공유가 가능했고, 백운상이 육체의 제어권을 가지는 일까지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아직 능숙하지는 않아서 바꾸는데 꽤 집중이 필요했지만 백운상과 유수현이 직접 대화를 나누는 일까지도 가능한 것이다.
백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물 좀 꺼봐요. 집중 안 되니까.>
<응.>
그리고 이삼 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백운상’이 소리내어 말했다.
“······됐죠?”
<응. 됐네.>
“아직 좀 어색한데······.”
백운상이 이리저리 팔다리를 움직여봤다.
본래 스무 살까지 자신의 몸이긴 했지만 워낙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참사는 그 시점에 벌어졌다.
“당신 다 씻었어?”
욕실 바깥에서 유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워하러 들어간 지가 벌써 삼십 분째. 물소리가 끊기고 다시 몇 분을 더 기다려 질문한 것이리라. 이쯤이면 됐겠지 싶어서.
그리고 당황한 백운상은 이렇게 답하고 말았다.
“어, 어······?”
“다 씻었지? 나 들어간다?”
“어어?!”
문이 달칵, 열렸다.
안방에 있는 욕실에서 자기도 샤워를 끝마친 유수현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앞머리에서 물기가 떨어졌다.
백운상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유수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들쳐업고 그대로 침대로 향했다.
차수희가 다급히 외쳤다.
<운상아, 운상아!>
하지만 이미 혼란 상태였던 백운상은 다시 몸의 제어권을 넘기기는커녕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로, 침대에 쓰러지듯이 몸을 누였다.
유수현이 그윽한 눈빛으로 올라탔다.
이어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 직전.
그제서야 겨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하가야······.”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