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누굴 바보로 아나.
두 손바닥을 모아 싹싹 빌던 이수민이 석연찮다고 느낀 건 그로부터 몇 초가 지나서였다.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외쳤는데도 대답이 없었던 탓이다.
‘뭐지?’
이수민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가,
“히이익!”
곧바로 다시 숙이고 말았다.
상반신만 일으킨 나탈리야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멍한 눈빛이었다.
이수민은 자괴감과 함께 생각했다.
‘어처구니가 없으신 거야.’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신 채 바라만 보고 있는 거겠지.
자세를 정돈한 이수민이 그대로 오체투지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엄숙하게 말했다.
“기사멸조의 대죄를 저지른 이 못난 제자를 죽여주소서!”
“······어.”
더듬거리듯이 나온 대답에 이수민은 경악하고 말았다.
‘정말로 죽이신다고!?’
죽여달라고 할 때 진짜로 ‘응, 그래. 죽일게.’ 라고 하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그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국민룰 아니었나?
하지만 나탈리야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 아, 우······. 어?”
이수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제 나탈리야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저 초점 없는 눈빛을 하며 멍하니 입으로 소리내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기보다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 같은 행동들이었다.
“사부님?”
나탈리야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우?”
“네, 사부님.”
슬슬 뭔가 잘못되어도 아주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이수민이 힘겹게 얼굴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제서야 나탈리야의 입에서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하지만 청천벽력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나. 아냐.”
“그럼······, 누군데요?”
나탈리야가 입을 우물거렸다.
뭔가를 말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다가 결국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말을 짧게 발음했다.
“불.”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푸른 불길이 다시금 타올랐다.
비록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는 해도 이 정도까지 정보가 주어진 마당에 다른 결론이 있을 리 없다.
이수민이 숨죽여 물었다.
“혹시 성화?”
“응!”
백운상의 혼이 떠난 육신에 홀로 남아 있던 성화가 힘차게 답했다.
***
느닷없이 전화가 걸려온 건 차수희와 유수현이 내일의 시나리오를 완성한 다음 두 번째 예행연습을 거의 끝낼 즈음이었다.
유수현이 휴대전화를 확인해 보니 발신인이 이수민이었다.
전화를 받고 말했다.
“여보세요?”
<사부님이 깨어나셨어!>
당황해서 소리치는 목소리가 차수희에게까지 들릴 정도였고, 그녀와 감각을 공유하는 백운상도 당연히 들을 수 있었다.
“정말이야?”
유수현이 놀라서 대답했지만 함께 듣고 있던 두 사람은 그보다도 훨씬 놀랐다.
<그럴 리가?>
<나 여기 있어요.>
<그치?>
사부님이라고 하면 백운상을 말하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차수희의 몸 안에 함께 있는데 어떻게 깨어난단 말인가.
그리고 이수민이 말을 이었다.
<근데 사부님이 아니야!>
“그게 뭔 소리야?”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자기가 성화라는데······, 잠깐만요, 잠깐만! 지금 전화 중인데->
아닌 게 아니라 잘 들어보면 이수민의 목소리에 섞여 다른 누군가의 음성이 함께 들렸다.
나탈리야의 목소리가 맞았지만, 또 완전히 달랐다.
본래 느껴지던 기품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갓 말을 배운 어린아이 같은 느낌만 들었다.
옆에서 웅얼거리던 목소리를 간신히 진정시킨 이수민이 말했다,
<일단 내가 거기로 갈게.>
“여기 병원? 지금 온다고?”
<어차피 별로 안 멀잖아. 사부님······? 아무튼 데리고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전화가 뚝 끊겼다.
병실이 다시 적막해졌고 부부가 서로를 바라봤다.
“오빠 무슨 일이래?”
“나도 잘 모르겠어. 여기로 온다니까 도착하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삼십 분 후, 취조 아닌 취조가 시작됐다.
눈앞에 마주한 소녀를 바라보며 유수현이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불이야!”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유수현과 이수민, 차수희와 백운상까지 머리가 쑤시는 것 같았다.
분명 외견은 나탈리야가 맞지만 원래 그녀가 어땠는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단언할 것이다.
지금 이 여자아이는 절대로 나탈리야일 수가 없다고.
자신을 둘러싼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본 소녀가 고개를 한 번 갸우뚱했다.
그러더니 손짓을 하며 나름대로 설명을 해나갔다.
십 초쯤 듣다가 도저히 해석이 안 되어 이수민과 유수현은 백기를 들었고, 차수희만이 열심히 들었다.
이해할 수 있게 만든 해석본은 이랬다.
“그러니까 자기가 성화가 맞대. 원래는 타샤랑 같이 있었는데 그 애가 없어지고 자기 혼자 남았다고.”
소녀가 바로 그거라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몸 안에 갇혀버릴까봐 엄청 무서웠는데 계속 힘을 주고 안간힘을 쓰니까 움직이더래. 맞니?”
“응!”
겨우 해석을 끝마친 차수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침묵하던 유수현이 말했다.
“수민아. 일단은 얘 데리고 하루만 더 시간 벌어주라. 내일 지현이 병문안 오면 그거부터 수습하고.”
“······알겠어.”
사실 이수민도 유수현도 백운상이 어떻게 된 건지 애가 탔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걸 하는 데만도 여유가 없었으니까.
힘겹게 고개를 끄덕인 이수민이 소녀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유수현이 차수희를 향해 말했다.
“당신도 조금이라도 자야지.”
“더 연습 안 해봐도 괜찮겠어?”
“응. 내가 우리 딸 일이 년 속인 것도 아니고.”
“······그거 아빠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두 사람이 함께 피식 웃으며 침대에 누웠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고르게 이어지는 남편의 숨소리를 들으며 차수희가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백운상을 향해서였다.
<저게 정말로 가능한 일이야?>
<아마도요. 성화도 영체 같은 거니까.>
<그러면 네가 저 몸으로 돌아가고 나면 어떻게 되는데?>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 둘 다 모르는데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요. 당신 때랑은 달라요.>
일월령이 빙의를 하고 기억까지 계승할 수 있던 건 애초에 그녀가 몸의 주인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특별 케이스라고 해야 하리라.
일반적으로는 혼이 자기 마음대로 육신을 갈아타는 일 같은 건 불가능에 가깝고, 백운상이 지금 꼼짝없이 갇혀 있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게다가 본심을 말하자면 백운상은 당장 저 몸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본래 나탈리야라는 신분에는 아무런 의미도 두고 있지 않았던 데다가 아까 유수현이 말했잖은가.
소꿉친구인 차수희보다, 백운상보다도 아내를 사랑한다고.
그렇다면 지금 몸을 되찾아봤자 승산은 미비할 터였다.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고 했지.’
차라리 조사님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 동참하는 것이 나으리라.
다시 말해 백운상의 주적은 이제 일월령이 아니라 유수현이었다.
‘적이라기보다는······, 그래. 공략대상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조건이 하나 있기는 했다.
바로 기간한정이라는 점이다.
유수현이 그녀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아내를 가장 사랑한다고 그가 말했다.
물론 화가 나기도 했고 낙담도 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사람이니까.
해서 그러한 논리에 입각해 볼 때, 만약 백운상도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낸다면?
그 후에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는 것이고, 다행히 궁극적인 적이라 할 수 있는 일월령이 최대의 아군이 되어주고 있다.
‘당분간은 조사님의 비호를 받아야겠어.’
승산이 보일 때까지만.
이후에는 몸을 되찾고 능히 승부를 결해볼 수 있으리라.
‘이기지 못한다면 합류하라는 건 내 적성에 안 맞지.’
정확히 말하면······, 이길 수 있을 때까지만 합류해 있는 것이다.
<후훗.>
<왜 웃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떻게 소멸을 면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그날이 다가왔을 때 지금은 한없이 상냥한 차수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백운상은 그것이 못내 궁금했다.
***
유지현은 다소 황당한 심경으로 되물었다.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응. 딸, 미안해. 걱정 끼쳐서.”
여전히 얼굴에 핏기가 없었지만 어제보다는 많이 진정된 모습으로 유수현이 그렇게 말했다.
유지현이 재차 물었다.
“아빠가 왜 그 옷 입고 있었는지, 어떤 나쁜놈이 아빠한테 그랬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
“응. 아빠는 그냥 사진 찍다가 갑자기 정신 차려보니까······.”
유지현이 눈가를 좁혔다.
‘수상해. 아주 수상해······.’
그냥 수상한 수준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석연찮았다.
“그러면 타샤랑 수민 언니는? 둘이서 왜 거기 있었는데?”
의식을 잃고 있는 나탈리야는 이수민이 도망치다시피 데려갔다.
그 후로 아무리 전화를 걸어봐도 감감무소식이다가 오늘 아침에야 겨우 연락이 되었는데, 이수민의 대답도 가관이었다.
휴대전화는 이동 중에 고장나서 수리를 했고, 나탈리야는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쓰러진 거라나 뭐라나.
지금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당분간은 면회도 오지 말라는 식이었다.
이번에는 차수희가 답했다.
“알고 보니까 그 둘이 같이 꽃구경을 왔다더라? 갑자기 타샤가 쓰러져서 이수민 씨가 부축하고 있었지.”
“나는 그런 거 본 기억이 없는데? 사진 찍고 난 다음에 갑자기 타샤랑 수민 언니 봤단 말야. 이거는 왜 그런 거야?”
“그건······, 글쎄? 엄마도 잘 모르겠네?”
의뭉스러운 대답.
유지현이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엄마를 바라봤지만, 곧 난공불락임을 직감했다.
뭐라고 캐묻든 지금 들은 것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아빠 아픈데 아빠 붙잡고 물을 수도 없잖아.’
“휴우. 일단 알겠어. 그러면 이제 괜찮아? 안 아파?”
“응. 아빠도 이래봬도 각성자 자격 있잖아. 사흘 정도만 있으면 퇴원할 수 있대.”
“진짜 나 얼마나 놀랐는데······.”
갖은 의혹은 잠시 접어둔 유지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유수현에게 다가가서 어깨에 손을 댔다.
“아빠 진짜 아프지 마······. 알겠지?”
적잖이 감동을 받은 듯한 유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지현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알면 됐어.”
유지현은 그렇게 말하며 아빠 품에 폭 안겼다.
등을 두들겨주는 손길을 받으며 그렇게 잠시간 가만히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 정도면 속았겠지? 라고.
품에 안겨 얼굴을 묻은 유지현의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누굴 진짜 바보로 아나······.’
두 시간 후.
병문안을 마친 유지현은 고급스러운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각했다.
‘엄마한테는 안 통해. 당장 아빠를 추궁할 수도 없고, 타샤는 연락 안 되구.’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였고, 심지어 그 한 명이 가장 만만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이르렀다.
유지현은 고급스러운 문 앞에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고, 이수민의 집에 들어섰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타샤랑 같이 계신 것 같은데······, 잘 됐어.’
유지현이 망설임없이 걸었다.
목적지는 오로지 한 곳.
가장 안쪽, 비밀의 방.
자물쇠로 꽁꽁 잠겨 있었지만 기실 마음만 먹는다면 여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유지현의 손에서 흘러나온 유형의 내공이 방 안의 자물쇠를 건드렸고, 문이 열렸다.
마침내 눈앞에 삼 년 전 보았던, 아니, 그때보다도 업그레이드된 압도적인 광경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유지현의 마음속으로 잠시간 회의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지만 곧바로 다시 각오를 다졌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 사람들이 나쁜 것이다.
유지현은 숨을 한 번 내쉰 다음 휴대전화를 들었다.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음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