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부탁이 하나 있어.
***
꿈을 꿨다.
개판 일보직전도 아니고, 이미 난감해서 돌아버릴 것 같은 상황이 세팅된 뒤에 펼쳐진 꿈이었다.
등장인물은 나를 포함해서 총 다섯 명이었는데 나만 빼고 다 여자들이었고, 전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하 가가.”
“오빠!”
“오빠?”
“하가 이 어린 강아지야.”
네 명의 여자들이 나를 부른다.
순서대로 백운상, 스무 살 이전의 내 소꿉친구 차수희.
우리 애 엄마와 마지막으로 초대 천마 일월령까지.
뭔데. 이거 뭐냐고.
백운상은 그렇다 치자.
애 엄마는 왜 둘로 나뉘어 있는 건데? 진짜로 둘이 다른 사람이라 이건가?
그리고 일월령 저 사람은 여기 왜 있냐고.
나는 외쳤다.
“잠깐만! 모두 동작 그만! 타임!”
하지만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백운상이 내 목에 팔을 감으며 말한다.
“하가야. 우리가 했던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러면 안 돼. 나를 배신하지 말거라.”
“정말 미안하다.”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다. 마지막에 가서 등선 안 한다고 뒤통수 세게 후려친 게 나였으니까.
백운상이 애타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기억나지 않느냐.”
“뭘 말씀이신지······?”
“우리가 함께 있던 날. 나무 벽에 팔을 기대어 흘러가는 강을 바라보며, 내가 너를 업었던 것을.”
갸아아악! 그 이야기를 여기서 왜 꺼내는데!
“기실 업은 것도 아니었지. 네가 뒤에서 내 몸을 덮듯이······, 그때 너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어느 하나도 없었-”
“그아아아악!”
귀를 막고 괴성을 지르면서 나는 도망쳤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 달리던 중에 팔에 감촉이 느껴졌다.
소꿉친구 수희가 내 팔짱을 낀 채로 발랄하게 말했다.
“오빠 일찍 왔네? 신입생 환영회 있어서 늦게 올지도 모른댔잖아.”
“그냥, 가기 싫어서 안 갔어.”
거짓말이었다. 혹시라도 수희가 싫어할까봐 안 간 거다.
나야 대학교 들어갔다지만 얘는 이제 고3인데 괜히 신경 쓰이게 하기 싫어서.
그리고 이게 정답이었던 것 같다.
아침에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오라면서 손 흔들어줄 때도 웃고 있었지만 지금 수희 얼굴은 아침보다도 훨씬 밝아보인다. 너무 예뻤다.
“오빠 그러면 나 공부 좀 도와줘. 나 고3이잖아.”
“전교 1등이 왜 나한테?”
“으휴. 누가 가르쳐달래? 그냥 옆에 있으라구. 왜, 정신 안정되는 방석 같은 거 있잖아.”
옆이라고 말했지만 그날 수희는 내 품에 쏙 들어와서 공부를 했다.
그게 정말 효율적인지는 상당히 의문이었지만 다음날 친 전국 모의고사 만점 받아온 걸 보면 효과가 있긴 했겠지.
그리고 어느새 수희의 모습이 바뀌어간다.
키가 조금 더 크고, 성숙해지고, 특유의 매력이 묻어나온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와이프. 애 엄마가 싱긋 웃으며 말한다.
“오빠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손수건을 꺼내더니 직접 내 이마로 흐른 땀을 닦아준다.
이마 부근을 꾹꾹 누르던 손수건이 뺨을 지나서 목덜미, 다시 쇄골까지 내려간다.
이 요오망한······.
애 엄마의 입꼬리가 절묘한 각도를 이룬다.
활짝 웃는 것도 아니고, 뭔가 의미를 담은 듯한 미소.
눈빛도 촉촉했다.
결혼생활 17년차에 이른 경험으로 눈치를 챌 수밖에 없는 상황.
애 엄마가 내게 말한다.
“집에 가자.”
“집에?”
애 엄마가 발끝을 세웠다. 내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고 속삭인다.
“매트리스······. 새로 샀어.”
시즌 105번째 매트리스 교체인가.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다소간의 설렘과 압도적인 긴장감 속에서, 애 엄마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일월령과 마주쳤다.
대뜸 내게 말한다.
“어린 강아지야. 네 죄가 실로 크구나.”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거 개새끼라는 말 아닙니까? 대답해봐!”
“알기는 아는구나. 이 어리고도 어린 강아지야.”
어리고도 어린 강아지? 그건 또 뭐야.
굉장한 개새끼라는 뜻이냐?
일월령이 말을 이었다.
“운상이, 네 어릴 적 여인, 지금 혼인한 여인. 세 명으로도 부족해 나까지······.”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이 꿈에 왜 나오냐고!”
이거 왜 이래. 우리는 그래도 비즈니스적 관계에 가까운 사이 아니었나?
물론 처음 대화할 때부터 느낌이 편안하고 포근하고, 굉장히 많이 호감이 가는 사람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긴 했지만-
“그것 보아라. 너 역시도 알지 않느냐.”
“알긴 뭘 알아!”
내 생각을 읽은 건가?
그렇다면 생각하기를 포기해야겠다.
금강부동신공.
그래, 금강부동신공을 외우자!
하지만 애 엄마의 시선과 맞닿자 그런 결심은 산산이 바스라지고 말았다.
“오빠?”
옥구슬 굴러가는 것 같은 목소리인데 소름이 돋았다.
애 엄마가 흥미가 간다는 듯이 내게 물었다.
“저 사람 오빠한테 뭐라고 하는 걸까? 나도 이해할 수 있게, 응. 오빠가 설명 좀 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 그건······.”
“오빠!”
“하가야!”
어느새 소꿉친구 수희와 백운상까지 우리 집 앞으로 달려왔다.
여자 네 명이 나를 둘러싸고 말한다.
“오빠 나한테 설명 안 해줄 거야?”
“하 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었나요?”
“어린 강아지야. 스스로를 속이지 마려무나.”
“이 여자들 다 뭐야? 오빠 대학 동기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길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여자 네 명이 내 팔다리를 하나씩 붙잡고 소리친다.
“당신들 뭐야? 레벨 5 넘는 년들이 갑자기 어디서 이렇게 나온 거야!”
이건 소꿉친구 수희.
“하가야, 기억하거라. 장강을 바라보며 내가 팔을 얹고 있던 나무벽이 우지끈 부러지고 만 것을.”
백운상.
“나무니까 당연히 부러지지. 오빠, 그냥 물침대도 하나 들여놓을까?”
애 엄마.
“선계의 침상은 결코 닳아 없어지는 일이 없단다.”
일월령 당신까지······.
힘이 쭉 빠졌다.
지금까지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나는 이대로 죽는 건가.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왜? 도대체 왜······.
그렇게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문득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치코옷-!”
파르릇!
회전하는 나뭇잎 몇 개가 쏜살같이 이쪽으로 날아왔다.
여자 네 명이 몸을 날려 나뭇잎을 피했다.
곧이어 나타난 한 사람.
“아빠!”
우리 딸 지현이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지만 포켓몬스터 모자를 쓰고 있다.
그리고 지현이 발치에 귀여운 치코리타가 하나 함께 있었다.
“치코치코!”
치코리타가 나를 향해 달려온다.
머리 쪽의 나뭇잎 줄기 위에 나를 싣고, 쏜살같이 달려간다.
“치코, 치코오!”
뭐라는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이런 뜻인 것 같다.
감사의 의미로 내가 깔고 있는 나뭇잎을 탁탁 쳐줬다.
이게 어떻게 내 몸을 받치고 있는 거지? 굉장히 신기했다.
역시 나중에 한 번 잡아당겨 봐야-
아니지.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 해 보면 되잖아.
팔을 뻗어서 줄기 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러자 치코리타가 몸을 베베 꼬면서 울었다.
“치코옷!”
우당탕 소리와 함께 넘어지고, 함께 가던 나도 다시 길바닥에 엎어졌다.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보는 지현이.
한 걸음씩 다가오는 네 명의 여성들.
앗, 아아······.
그때 하늘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인세에서 펼쳐지는 인연도 즐겁겠구나.”
들으니까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성화 터질 때 내 몸에 칼 꽂은 걔였다.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밥은 먹고 다니냐!”
그러자 답한다.
“네가 곧 먹여주고 입혀줄 테지.”
즐거움을 담은 목소리.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묻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느새 네 명의 여성이 다시 다가와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나를 향해 손을 뻗는 걸 속절없이 바라보다가, 겨우 꿈에서 깼다.
“으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엄청 넓은 1인실 병동이었다.
맞다, 나 입원했었지.
애 엄마한테 두어 시간만 잔다고 하고······.
시계를 보니까 새벽 한 시였다.
세 시간 조금 안 되게 잤네.
“오빠 깼어? 나 들어갈게.”
애 엄마가 병실 문을 열었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서 꿈의 잔상을 지워내고 애 엄마를 보며 말했다.
“기억상실로 가자.”
“기억상실?”
“응. 그거 말고는 다른 수가 없어.”
내가 과거로 돌아가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까 설명을 했었고, 이제 대책을 논의할 때였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방법이 바로 모르쇠 작전이었다.
무조건 기억 안 난다, 나는 모르는 일이라는 식으로 가는 거.
마교 무인의 옷을 입고 있던 것도.
가슴에 칼침 맞고 피 흘리고 있던 것도.
하늘에서 갑자기 왜 떨어졌는지까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물론 의심의 눈초리를 사긴 하겠지만 최소한 우리 딸이 더 추궁할 여지는 없는 셈이다.
과거로 갔을 때 역용하고 지냈던 건 다행히 이래저래 난리 겪고 다시 돌아오면서 풀렸으니까.
역용한 얼굴까지 보였다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었는데, 천만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일은 그렇게 넘긴다 치더라도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당신 일은 어떻게 하지?”
우리 딸이 다시 되돌아왔을 때 처음 목격한 장면도 난감했으니까.
타샤와 이수민, 애 엄마가 함께 있는 상황.
이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직 갈피를 못 잡겠다.
그리고 애 엄마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오빠.”
“응?”
“수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한테 아직 안 물어본 거 있지 않아? 타샤 어떻게 됐는지.”
“······응.”
아무래도 애 엄마한테는 속일 수가 없는 모양이다.
솔직히 알고 싶었다.
나를 과거로 돌려보낼 때 백운상이 말했다. 이번에는 다시 만나자고 약속은 못하겠다고.
그리고 지금 의식이 없는 상황. 그러면 이제는······,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건가?
“오빠 사라지고 난 다음에 나도 얼핏 들었어. 전생에 그 애랑 오빠랑 어떤 사이였는지.”
“그랬구나.”
“많이 좋아했어?”
“응. 많이 좋아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죽을 만큼 백운상을 좋아했다.
그건 부정할 수도, 부정하고 싶지도 않은 진실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할 것이 있었다.
“내가 스무 살 때 전생을 생각해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알았더라도. 백운상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더라도, 그래도 나는 우리 집 근처 살던 차수희랑 친해졌을 거야. 항상 같이 있고, 뭐든지 함께 하면서 좋아하게 됐을 거고, 지금처럼 똑같이 결혼해서 우리 지현이랑 행복하게 살았을 거야.”
이건 내 진심이었다.
전생을 자각했을 때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생각했던 문제였으니까.
그때마다 내린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내 소꿉친구인 차수희라는 것.
전생에 백운상을 사랑했던 것에 지지 않을 만큼 좋아한다는 것.
“그렇구나······.”
애 엄마가 왠지 모르게 납득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리고 나는 이어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당신을 가장 사랑해.”
애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어떤 의미에서 말한 것인지를 알겠지.
백운상에게 주었던 마음보다도 크다.
애 엄마가 계속 고민했던 문제. 스무 살 이전의 차수희와 자신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설령 다르다 해도, 그렇더라도 분명 내 생애에 가장 사랑하는 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다.
백운상과 내 소꿉친구 차수희.
그 두 사람보다 애 엄마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어디 가려고 하지 마. 나 지금 엄청 세졌거든? 당신이 도망가도 잡아올 수 있으니까, 나랑 우리 지현이랑 같이 살자. 응?”
딱히 울 생각은 없었는데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의도치 않은 즙짜기 작전이었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애 엄마가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미소 지으며 나도 마주 손을 잡았다.
“당신 그렇게 해 줄 거지?”
“응. 알겠어. 어디 안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왜 울고 그래······.”
“안 울었는데? 울려고 한 거랑 진짜 우는 거랑 다른 거야.”
농담처럼 말하면서 애 엄마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입술이 살짝 닿은 후에, 애 엄마가 말했다.
“근데 어디 안 가긴 할 건데, 대신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뭔데?”
“지금은 비밀. 집에 가서 알려줄게.”
그렇게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애 엄마가 병실 문 쪽으로 향했다.
“당신 어디 가?”
“잠깐 바람 좀 쐬려구. 편의점 가서 먹을 것도 좀 사올게.”
“응. 그래주면 고맙구.”
문이 닫히기 직전에 애 엄마가 중얼거린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둘이 사실은 하나라면, 그러면······.”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고 했지만 곧 문이 달칵, 닫혔다.
***
“어떻게 하지?”
돈 많은 백수 이수민은 연신 침음하며 침대를 바라봤다.
나탈리야의 육신을 들쳐메고 줄행랑을 쳐서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호텔 방.
일단 유지현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라는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다.
집으로 갈 수는 없었다. 유지현이 비밀번호도 알고 자기 집처럼 드나드는 곳이니까.
휴대전화는 꺼두었다가 가끔씩만 켰는데, 유지현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이나 와 있었다. 두려움에 차마 전화를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왜······?’
억울한 마음에 이수민은 발을 동동 굴렀다.
기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냥 불러서 와봤더니 사부라고 해서 함께 술을 마신 것뿐인데.
왜 저 부부의 사기극에 동참해야 하는지, 그것도 하수인으로 부려먹히기만 하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휴우.”
한숨을 내쉬며 이수민은 다시금 침대로 시선을 두었다.
아름다운 흑발을 가진 소녀, 나탈리야가 잠들어 있었다. 이 또한 의문점이었다.
‘사부님이 사라지실 것처럼 말하셨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의식을 잃었을 뿐이지 지금 나탈리야는 누가 봐도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
이수민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침대로 다가갔고, 곧바로 감탄하고 말았다.
‘예쁘긴 하다······.’
이전까지는 경계하던 애였기에 솔직히 감탄하지는 못했지만 정말로 엄청나게 예뻤다.
이수민은 자기도 모르게 올라가는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검지손가락이 뻗었다. 이수민은 크게 도리질을 했다.
‘사, 사부님께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되는데······.’
생각과 몸이 일치하지 않다가 마침내 일치하는 순간이 다가왔고,
그대로 검지손가락으로 나탈리야의 뺨을 쿡 눌렀다.
‘불초제자의 무례를 용서하소서······.’
정확히 두 번을 그렇게 되뇌었다.
한 번 뺨을 누르고 두 번 용서를 빌었으니, 한 번 더 눌러봐도 될 터.
이수민은 다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 뺨에 댄 순간.
푸른 불길이 타올랐고, 잠들어 있던 나탈리야가 눈을 번쩍 떴다.
“그아악! 죽여주십시오!”
소스라치게 놀란 이수민이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