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04화 (104/130)

104. 아주 욕심이 많답니다.

차수희가 물었다.

<그게 끝이니?>

<그래요. 어제까지만 해도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된 거예요.>

나탈리야가 떨리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제는 왜 내가 이 몸의 주인이 아니라고 했는지 알았죠? 나는, 나는······. 당신한테, 조사님한테 아무것도 못 해줬어요. 오래도록 유배되신다는 것만 들었지 그 후에 어떤 고통을 겪으셨는지 짐작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래서?>

<······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인데?>

차갑게까지 들리는 목소리.

나탈리야가 놀라서 숨을 죽였고, 차수희가 이어 말했다.

<나는 하나도 기억 안 난다니까? 내가 뭘 해주고 안 해주고를 떠나서, 오빠랑 어릴 때부터 이십 년 동안 살았던 건 어쨌든 너라는 말이잖아?>

<그건······.>

<몰라. 어차피 나는 방법도 모르고, 나가니 뭐니 그런 말은 하지 마. 엄청 분위기 잡으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하더니, 결국은 이렇게 같이 있잖아? 이제 슬슬 현실을 받아들일 때도 된 것 같다는 생각 안 드니?>

나탈리야는 알았다.

차갑게 말하고 있지만 실은 나탈리야가 죄책감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낸 어조.

그 마음씀씀이에 다시금 울컥했지만, 이것만은 반드시 물어봐야 했다.

<그러면 당신이, 조사님이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다는 거. 그건 인정하시나요?>

그 물음에 차수희가 갑자기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진짜 웃긴다. 서로 미안하다고 자기가 나간다고, 이게 뭐하는 건가 모르겠어.>

이어서 한숨을 길게 내쉰 다음 차수희가 말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러니까 이 몸 주인이 원래 나라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완전히 내 것도 아닌 것 같고. 어쨌든 스무 살 전에는 네가 차수희였으니까. 아, 음료수 마실래?>

<갑자기 무슨 음료수를->

<왜, 너도 감각 같은 건 같이 느끼잖아. 마시자, 내가 사줄게.>

영차, 소리를 내며 의자에서 일어선 차수희가 자판기에서 콜라캔을 하나 골랐다.

한 모금 들이키자 곧바로 청량한 기분이 들어 차수희와 나탈리야가 함께 탄성을 냈다.

“아휴, 이제 좀 살겠다.”

<크으······.>

잠시간 침묵이 이어지다 이윽고 터진 웃음소리.

어제부터 쉼없이 펼쳐진 일들 끝에 나온 결론이 황당하면서도 우스워서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다시 의자에 앉은 차수희가 속으로 말을 건넸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아직 할 얘기가 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전부 다 했는데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아까 말했잖아.>

차수희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나 정말로 하나도 기억 안 난다니까? 등선인가 그거 한 다음부터 나한테 몇십 년 동안 이야기해줬다면서. 오빠랑 어떻게 만났고 둘이 무슨 사이였는지.>

<······!>

<처음부터 하나씩. 전부 다시 들어야겠어. 물론 판도라의 상자 여는 짓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다 들어야겠어.>

<그걸 굳이 왜?>

<말해! 왜 대답을 안······, 어? 타샤, 가 아니고. 수희야? 운상아?>

숨어버렸다.

아무리 불러도 없는 척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수희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나탈리야 본인은 자신이 왜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는지 의문스러워 했지만,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며 차수희는 생각했다.

‘내가 아마 고생을 좀 많이 했나 보네.’

***

새하얀 궁전 안으로 들어선 일월령은 잠자코 기다렸다.

곧 내부의 문이 열리고 청초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인, 선계의 신이 일월령에게로 걸어왔다.

일월령이 먼저 물었다.

“운상이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너도 알지 않니. 환생해서 주어진 업을 다할 거란다.”

“그 다음을 말하는 것이에요. 그 아이는······, 행복해질 수 있나요?”

선계의 신은 그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대신에 말했다.

“네가 짊어져야 할 책무가 이미 험난하단다. 다른 일에까지 마음을 쓸 여유는 없어.”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지요. 그러면 당신께 먼저 여쭙겠어요. 제가 받아야 할 벌은 무엇인가요?”

신이 답했다.

상위차원에서 관리하는 하위세계들.

그중에 근래에 새로 생겨난 곳이 있다고.

“아직은 그곳에 생명이 태어나지 않았단다. 불완전하고 불안정해. 너는 그곳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한단다. 안정이 되어서,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 기반이 잡힐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 일이죠?”

“······알 수 없구나.”

기약할 수 없다는 말.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어쩌면 억겁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일월령은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정말로 괜찮겠니?”

그 말에 담긴 걱정을 알지만 일월령은 이미 각오를 굳혔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업을 더 늘려달라고.

“기반이 잡히고, 생명이 태어날 때까지 있을게요.”

“어째서?”

일월령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 정도는 해야지 운상이가 행복해질 수 있잖아요? 그렇게 하고 싶어요.”

신이 조용히 물었다.

“그 아이를 그리도 아끼니?”

“네.”

“내 칼을 쳐낸 사내아이도, 성화를 다루어내던 그 어린 여아에게도 마음을 주었니?”

“네.”

“눈치를 챘을지 모르겠으나 그 사내아이와 혼인하게 될 여인이 바로 너란다. 너와 맞닿은 인연이니 네게 주어진 업을 완수한 후에 그리될 거야.”

“그랬던가요.”

놀라면서도 감정을 추스르고 대답한 일월령을 선계의 신이 고요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만 같구나.”

“······스스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뿐이에요.”

신이 이어 말했다.

“그래. 이리 복잡하게 얽히지 않고 너와 그 사내아이가 오롯이 둘이서 만났다면 세상에 둘도 없는 연으로 맺어져 정을 주었겠지. 오직 서로가 서로의 연이 되어 온 마음을 다해 그리했을 거야. 그리고, 성화를 다루던 어린 여아에게 네가 품은 마음 역시도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정에 다르지 않단다. 네가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일월령은 그 말에 납득할 수 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백운상에게 이야기 들었던 하무린은 멋진 사람이었고, 실지로 대화를 나누었을 때도 그리 느꼈다. 만약 백운상의 연인이 아니었다면 은애하는 마음이 드러났으리라.

그리고 선계에서 내려다보았던 설운혜.

한없이 선하고 여린 그 아이를 어찌 자식처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지만,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운상이도 있어야 해요.”

“연유를 알려주겠니?”

던져진 질문에 일월령은 상상을 해 보았다.

자신과 하무린.

설운혜와 백운상.

이미 환생을 할 것임을 알고 있는 진천군까지.

그 모두가 함께 있는 광경을 떠올려 봤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께서 아끼시는 아이는······, 실은 아주 욕심이 많답니다.”

***

일월령이 포부 넘치게 말했다.

“이곳인가. 앞으로 내가 지내야 할 곳이······.”

하늘까지 맞닿아 있는 새하얀 신전.

그녀를 위해 마련된 집이었고, 유배지였다.

일월령은 신전의 가장자리에 손을 대어봤다.

무형의 벽이라도 둘러세워진 것처럼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리고 신전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풍경.

다만 용암처럼 붉은 바다만이 온 사방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다시 신전의 안쪽 방으로 돌아온 일월령이 침상에 누워 중얼거렸다.

“이제 어찌 해야 하나?”

도무지 언제 이 업을 끝낼 수 있을지 판단조차 서지 않았다.

일월령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결정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얼마나 시간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우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버텨보자고.

다행히 그녀는 다음대의 신으로 예정된 강대한 존재였다.

능히 해낼 자신이 있었다.

홀로 바로 앉은 침상 위에서 일월령이 소리죽여 눈물을 흘린 것은 그로부터 백 년이 지나서였다.

***

“그때 그렇게 했다면 됐을 텐데······!”

일월령이 혀를 차며 말했다.

고민 끝에 마침내 얻어낸 결론.

“하가와 운상이가 처음 만났을 때 그리 했다면 좋았을 것을. 왜 그리 답답하게들 굴었을까.”

이미 날을 세지 않게 된 지가 오래였다.

대신에 일월령은 계속해서 생각했다.

자신이 들었던 하무린과 백운상의 이야기에 대해서.

그리고 백운상과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서.

하계로 시선을 두어 지켜보았던 설운혜와 진천군에 대해서.

기억 하나하나를 끄집어내서, 머릿속에 새기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러면서 행복한 날들을 그렸다.

“이 업이 끝나면 나도 환생을 해서 하가와 운상이와, 천군이와 운혜와······.”

그러다 문득 중얼거리고 말았다.

“내세에 이름이······, 무엇이었지?”

하무린에게 들었던 이름들.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똑똑히 기억이 났는데.

머릿속에 하얘진 듯이 이름을 말할 수가 없었다.

일월령은 날이 일곱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을 꼬박 고민했다.

그리고 간신히 떠올려냈다.

벌떡 일어나서 벽을 향해 달려갔다. 손가락에 힘을 실어 글자를 새겨넣었다.

하무린, 백운상. 진천군, 설운혜.

천마신교, 십만대산, 무림맹. 내세, 현생, 환생.

그리고 자신의 이름.

“일월령······. 내 이름.”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나머지 글자를 마저 새겨넣었다.

그러면서 소리내어 말했다.

“유수현, 유지현. 이수민, 나탈리야, 차수희.”

내세의 이름들.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절대로.’

***

일월령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방 안을 바라봤다.

잠결에 무엇을 어떻게 집어 던졌는지 성한 곳이 하나 없었고, 실은 요즘 날마다 겪는 일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일월령은 잠에서 깨자마자 벽 쪽으로 다가갔다.

새겨놓은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응. 괜찮아. 잊어버리지 않았어.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했던 얼굴들을 떠올려봐도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나눴던 대화와 보았던 장면이 흐릿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행복하게 지내는 꿈을 꾼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난 일월령은 꼬박 하루를 울었고, 그런 자신의 마음이 무서웠다.

그들의 행복을 바라보며 슬퍼하는 자신의 마음이 무서웠다.

그때 슬며시 든 생각.

이런 마음을 가질 바에야 지금만은 잊고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라고.

곧장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지만 이미 생겨난 마음이 조금씩, 일월령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하루, 때로는 한 달이 지날 때마다 나누었던 한 마디 말을 잊었다.

입꼬리를 올리며 지었던 웃음을 잊었고 몸짓을 잊었다.

이제와서는 분명한 것이라고는 벽에 새겨둔 이 이름들.

그리고 그녀가 그들을 사랑했다는 사실.

이 시간을 지나고 나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이제는 그런 것들만을 명확하게 기억했다.

***

깨어나 보니 방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산산조각으로 바스러진 벽을 정신없이 헤집으며 여인은 조각난 잔해들을 모았다.

사실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몰랐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루 꼬박 걸려서 다시 본래 모습대로 맞춰진 벽에 손가락을 대었다.

조금 패인 부분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여기저기 금이 간 탓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여인이 실소를 흘렸다.

‘내가 왜 이런 미련한 짓을 한 것이지?’

벽이 부서졌다면 다시 만들면 그만인 것을.

여인이 손을 휘저었다.

벽이 다시 원래 있던 대로 돌아왔다.

아무런 자국도 없이 말끔하게.

***

자신의 이름을 잊은 그녀는 오늘도 무료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오늘도 어제와 같았다.

붉은 용암으로 이루어진 바다가 세차게 휘몰아치고 이따금 아래의 땅이 흔들렸다.

사실은 완전히 같지는 않아서 점차 용암이 굳는 곳이 생기고, 날이 덥거나 추워지는 일은 있었지만 대체로는 어제와 같았다.

그녀는 소리내어 말했다.

“지루하구나······.”

자신이라는 존재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갇혀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나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무런 흥미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였고, 그리 하다 보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그러다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좋은 일······?’

좋은 일이란 무엇일까.

이제껏 이곳에서 홀로 지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일일까.

판단을 내릴 잣대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 텐데.

‘혹시 내가 뭔가를 잊어버린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였지만, 어떤 이유에서 이 무료함을 견뎌내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왜 아는지도 모르지만 그것만은 분명했다.

***

다시 무수히 시간이 흘렀다.

뜨거운 용암이 굳어 땅이 되고, 스며든 물기가 바다를 이룰 만큼의 오랜 시간.

어느 날 잠에서 깬 그녀에게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녀는 즐겁게 말했다.

“새가 기쁘게도 우는구나.”

요즘 들어 자주 들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흐릿하게 투명한 손이었다.

무언가 겨우 끝이 난 것 같은 감각.

지금 이 흐릿한 몸이 완전히 사라지면, 그러면 자신의 존재도 사라지는 것일지.

그녀는 그것을 궁금해하면서 바닥에 누웠다.

이제 하늘은 거의 언제나 푸른색이었다.

가끔씩 날이 흐려서 비가 오고, 천둥이 치기도 했지만 오늘은 새하얀 구름이 흘러다니며 햇빛이 내리쬐는 것이 보기 좋았다.

잠시 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시원한 그늘에 누워 그녀는 손바닥을 펴보았다.

아까보다도 조금 더 흐릿했고, 어째선지 아쉬웠다.

‘이대로 끝나면 안 되는데······. 뭔가 더······.’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구름이 걷혔다.

다시 햇빛이 내리쬐었다.

눈이 부셔서 그녀는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하늘 너머에 뚫린 공간을 발견했다.

어째선지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이상하다······.’

왜 울음이 나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오래도록 기다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지금껏 기다린 것이니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발을 한 번 굴렀다.

하늘로 떠오른 그녀의 흐릿한 몸을 공간에서 흘러나온 빛이 감쌌다.

아련한 감각과 함께 그녀는 생각했다.

정말로 많이도 보고 싶었다고.

곧 새하얀 빛이 걷히고 그녀도 모습을 감추었다.

스스로의 이름을 일월령이라 자처한 어린 신이 이곳에 오고 십오만 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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