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또 봐.
***
단결이란 서로간의 강한 유대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때로는 강대한 외부의 적 앞에서 필요에 의해 맺어질 때도 있는 법이다.
지금 차수희가 처한 상황이 정확히 그랬다.
유지현이 모든 진실을 눈치채기 일보직전이라는 미증유의 사태 앞에서는 그녀도, 유수현도, 이수민과 나탈리야까지 네 사람이 모두 협력해야 했다.
차수희는 똑똑히 목격했다.
하늘에서 떨어진 유수현이 눈을 살짝 뜨려고 했던 것을.
이게 도대체 뭐냐고 소리치는 유지현을 보자마자 곧장 다시 눈을 감아버린 것까지.
그리고 차수희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당신 나 일단 기절한 척할게.>
<오빠 괜찮아?>
<응. 피곤하기는 한데 크게 문제없어. 내가 일단 시간 벌 테니까 당신이 어떻게 수습 좀 해줘.>
그러더니 ‘끄으윽’하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유수현이 눈을 떴다.
유지현이 애타게 외쳤다.
“아빠, 아빠! 정신 좀 차려봐. 아빠!”
“딸, 아빠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유수현이 다시 눈을 감았다.
유지현이 펑펑 울면서 얼굴을 잡고 흔들었지만 결단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임기응변이었고, 사실은 극도로 지친 게 맞았으니 거짓말도 아니었다.
유수현은 절대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1인실 병동에 입원당했다.
축 늘어진 나탈리야의 육신을 업은 이수민은 자기 집으로 줄행랑을 쳤고, 울다 지친 유지현은 간신히 달래서 우선 집으로 보내놓은 상황.
여기까지만 보았을 때는 사태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도 같지만······, 고작해야 몇 시간의 유예를 얻었을 뿐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유지현이 병문안을 올 것이고, 안 그래도 걱정하는데 그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척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딸이 아까 목격한 모든 상황에 대한 변명거리를 마련해 두어야만 한다.
거기에 더해서, 심지어 차수희에게는 비밀이 하나 더 있기까지 했다.
유지현은 물론이거니와 아직 유수현과 이수민도 모르는 비밀.
“그러면 두세 시간 있다가 깨워줘. 잠깐만 잘게.”
“응. 알겠어, 오빠.”
병실의 문을 소리내지 않고 닫은 차수희가 복도로 걸어나갔다.
그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차수희는 마음속으로 말을 건네듯이 생각했다.
<가만히 좀 있지?>
하지만 반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외친다.
<······내보내줘요. 내보내달라고!>
차수희는 차갑게 답했다.
<싫어.>
<······어째서?>
<왜긴 왜겠어.>
차수희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말이어서 다만 짤막하게 답했다.
<원래 네 몸이잖아.>
<아니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울분에 찬 듯한 나탈리야의 목소리.
차수희는 한 귀로 흘리듯이 흥얼거렸다.
<포기해. 어차피 어떻게 내보내는지도 몰라. 너도 자기 힘으로는 못 나가니까 나한테 해달라는 거잖아. 나 못한다니까?>
<그러면 쭉 이대로 살자는 거예요?>
<그건 아니구. 내가 이 몸에서 나가기만 하면 남는 건 너밖에 없으니까 그땐 알아서 해.>
일방적으로 결정해서 선고하는 것 같은 말.
듣고 있는 나탈리야로서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혼이 육신을 벗어난 후에 그대로 소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차수희의 손에 잡혀버리고 말았다. 단지 잡힌 것만이 아니라 아예 혼이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해서 지금 차수희의 몸 안에는 두 명의 혼이 들어가 있는 중이었다.
말하자면 듀얼코어 같은 상황.
나탈리야가 말했다.
<내가 말했죠? 원래 그쪽 몸이라고. 나가긴 어딜 나간다는 거야. 그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아요?>
<그거 말인데. 원래 내 몸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이야?>
차수희가 의문스럽게 물었다.
스무 살 이전까지 이 몸에 살던 게 나탈리야 자신이었으면서 왜 계속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있고, 네가 오빠 전생부터 알던 사이라는 것도.>
<그건······.>
<내일 아침에 지현이 찾아올 때까지는 대책을 세워놓아야 해. 몸을 돌려주니 어쩌니 하는 건 일단은 뒤로 미뤄두고, 아는 걸 다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나탈리야는 잠시간 고민했다.
이전까지는 책무에 얽매여 있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게 맞았다.
그것이 과거로 간 유수현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될지를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다르다.
나탈리야에게 주어진 의무는 모두 완수되었고,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제는 털어놓는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차수희가 재차 말했다.
<말해주지 않을래? 사실은······, 벌써 짐작은 하고 있거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나탈리야는 내색하지 않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뭘······, 말하는 건데요?>
차수희가 먼저 털어놓았다.
요즘 꿈에서 과거의 기억 같은 걸 본 적이 있다고.
<거기에 네가 나왔던 것 같아. 오빠가 아까 다녀왔던 곳. 잘은 모르지만 아마 나도 등장인물 중에 한 명이었을 것 같은데······. 내 말이 맞니?>
<······!>
나탈리야는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지금의 차수희.
다시 말해 일월령이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해서 오랜 유배에서 겪었던 고통까지도 다시 생각해내게 된다면.
차마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해서 거절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차수희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냥, 나는 알고 싶어. 오빠에 대해서도, 너에 대해서도. 그리고 나에 대한 것도.>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단순한 인연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나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 말이 나탈리야의 마음을 흔들었다.
일월령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숨기려 들지 않는 것. 그것이 오히려 그녀를 존중해 주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그때는 그녀가 인정할지도 모른다.
몸을 뺏었다는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결국 나탈리야가 말을 꺼냈다.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난 건······, 이제 막 등선해서 선계로 올라간 직후였어요.>
길게 이어진 이야기.
일월령과 백운상이 선계에서 보낸 수십 년의 시간을 지나, 과거로 온 하무린과 그들 두 사람까지 세 명이 함께 꾸민 계획.
나탈리야의 목소리는 이제 울먹거리는 떨림을 담고 있었다.
차수희가 부드럽게 말했다.
<응. 이것저것 많이 했네. 나는 잘 기억 안 나지만.>
<그건······.>
<그 다음에 생긴 일 때문이지? 오빠가 다시 여기로 돌아온 뒤에.>
아마 나탈리야에게 육신이 있었다면 지금 슬프게 울었으리라.
그녀가 겨우 말을 이었다.
<맞아요. 하무린, 오빠가 다시 돌아간 뒤에 나와 당신은 벌을 받아야 했으니까. 그때도 당신이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어요······.>
***
새하얀 궁전 앞에서, 백운상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곁에 함께 서 있는 일월령이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를 벌해주세요. 이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어요. 모두 내가 주도한 일이에요.”
궁전에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 아이가 네게 도움을 청했음을 알고 있단다. 주모자로서 그 아이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해.>
입술을 질끈 깨문 일월령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도 공범이에요. 최소한 절반 몫은 내가 책임져야 하고, 운상이가 나보다 중한 벌을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내가 숨겨주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애초에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그러면!”
일월령이 결연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쟤가 감당할 수 있는 거만 빼고, 전부 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러지 말라고요!”
백운상을 징벌의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작해야 등선한 지 수십 년밖에 되지 않은 백운상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중한 죄.
판결은 소멸로 귀결됨이 당연했다.
해서 일월령이 말한 것이다.
부디 죽음은 면할 수 있도록.
백운상이 감당할 수 있는 벌만을 내려서 지은 죄에 책임을 질 수 있게 해달라고.
그 나머지 업은 일월령 자신이 모두 짊어지겠다고.
궁전에서 흘러나온 음성. 선계의 신이 물었다.
<정말로 그리 하려는 거니?>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미 각오한 일이에요.”
일월령이 담담하게 답했다.
선계의 신이 깊이 침음하더니, 마침내 말했다.
<하면 아이야. 이리 오렴.>
“네.”
고개를 끄덕인 일월령이, 붙잡고 있던 백운상의 손을 놓았다.
백운상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월령을 불렀다.
“조사님. 어찌 조사님이······.”
일월령이 웃으며 답했다.
“괜찮아. 설마 죽기야 하겠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려무나. 금방 다녀올 테니.”
이어서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전한 말.
‘운상이 네가 환생해 하가 곁으로 가기 전에 단단히 일러둘 것도 있고.’
일월령이 앞으로 걸어나갔다. 새하얀 궁전을 향해서.
그리고 입구 앞에서 뒤를 돌아본다. 백운상과 눈이 마주치고, 크게 외쳤다.
“또 봐!”
그것이 백운상이 선계에서 일월령과 마주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제 홀로 남은 백운상에게 선계의 신이 물음을 던졌다.
<괴로움을 품고 올라온 아이야. 어찌하여 그랬니? 너로 말미암아 생긴 혼란을 너는 아느냐?>
“······압니다.”
<그래. 너라고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 허나 네 업에 대한 책임을 너는 져야 한단다.>
이제는 선계의 신도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간에 간섭해 버린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누군가는 수습을 해야 했고, 그것을 행할 자가 바로 이곳에 있는 백운상이었다.
일월령이 대부분의 죄를 짊어짐으로써 비로소 가능하게 된 일.
백운상이 물었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둘이 저지른 짓이니 둘이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
선계의 신이 말했다.
<지금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 사내아이가 네가 아닌 다른 여인과 혼인을 하였다고 했지?>
“네.”
<아마 혼인을 한 여인이 내가 아끼는 그 아이일 거란다.>
“······!”
이것만은 일월령도 백운상도 알지 못했던 일이다.
내세에서 하무린과 혼인했다는 여인이 일월령이었다니.
선계의 신은 그 후로도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백운상이 물었다.
“하면 제가 먼저 하가와 혼인한 몸에 있게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단다. 허나 본디 그 자리는 네 자리가 아니란다.>
잔인한 말이었다.
단지 일월령이 들어오게 될 그릇을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
백운상이 애타게 물었다.
“어찌 그리 해야만 하는지요······.”
<너와 그 아이, 내 칼을 쳐낸 사내아이까지 셋의 인연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란다. 그리 해야 순리에 맞아. 그리고 네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그 다음에 있단다.>
이어진 설명.
백운상은 이후에 다른 몸으로, 본래 그녀에게 주어진 환생을 하게 된다.
성화의 폭발과 관련된 사건들은 미래에서 과거로 간섭을 한 것을 원인으로 생겨난 것이고,
백운상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도록 인도해야 했다.
<아마 지금 나눈 대화를 기억해낼 때가 올 거란다. 그리된 후에 사내아이를 이곳으로 보내거라. 그로써 너는 네 할 일을 마칠 수 있단다.>
그것이 마지막 설명이었다.
선계의 신은 결코 그 뒤를 말하지 않았지만, 백운상은 자연스레 이후의 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 끝난 후에는 아마 나는 정말로 사라지게 되겠구나······.’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걸로도 족하다고, 백운상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책무를 해내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고 하니까.
하무린이 내세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걸로 충분했다.
‘게다가 하 가가라고 한 번은 부른다 했으니, 나는 그것이면 돼.’
결심을 마친 백운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구나. 아마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너는 기억을 잃은 채로 사내아이의 곁에 함께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떠올렸을 때······, 아이야. 부디 한 가지만은 새겨놓거라.>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청아한 목소리로 신이 답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하나 결코 놓치는 것이 없으니, 너는 네 해야 할 바를 충실히 행하면 된단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을 담은 위로 같은 말.
그리고 다음 순간.
눈부신 빛과 함께 백운상은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