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게 무슨 일이야?
망양한 눈길을 한 선계의 신이 하계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시선으로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한 남자가 어지럽게 날아드는 세 자루의 검을 피해내는 중이었다.
신격이나 각자覺者가 아닌 하계의 인간이 받아내기란 극히 어려운 공격이었을 텐데도 용케 피해내고, 후려치며 힘을 해소해나갔다.
사내가 기어코 세 자루의 검 중에 한 자루를 부러뜨리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 선계의 신은 고개를 돌렸다.
다음대의 신으로 예정되어 있던, 그녀가 지극히 아끼는 여아가 얼굴을 굳힌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신이 물었다.
“나를 속였던 거니?”
“변명하지 않을게요. 그저 제 마음이 가는대로 한 것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 모습에 신은 마음이 아리는 것을 느꼈다.
한탄을 담아 읊조렸다.
“······일이 너무도 복잡하게 꼬여버렸구나.”
본래 신이 계획하기로는 무림맹과 황군의 무인들이 설운혜의 목숨을 거두었어야 했다.
천마신교의 다른 무인들과 신교 그 자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후에 신격을 파견해 성화를 회수해 오면 그걸로 끝이 나는 일이었다.
한데 상황이 결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설운혜가 수십 명의 무인들을 맞이해 능히 승부를 이끌어나간 것이다.
이미 이 순간부터 신은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그런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도저히 그럴 만한 원인이 없었음에도 푸른 불길이 돌연 폭발할 것처럼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결코 설운혜의 제어력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선계의 신조차도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거대한 흐름에 성화가 반응한 것.
이 시점에서 선계의 신은 결정을 내렸다.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손을 써야겠다고.
물론 하계의 일에 직접 나서는 것은 법칙에 크게 위배되는 일이다.
하지만 저대로 성화가 폭주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해서 우선 설운혜의 목숨을 거두기 위해 칼을 내려보냈다.
그 정도가 신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최선이었건만······, 그것을 받아친 사내를 발견한 것이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었으며, 어지간한 신격 이상의 힘을 가진 사내.
하지만 신은 구태여 바로 정체를 알아내기보다는 가능한 빨리 불안요소를 제거하는 길을 택했다.
그 결과가 지금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세 자루의 검 중에 하나만은 막아냈지만 이미 사내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여전히 예리함을 품은 검 두 자루가 사내를 향해 날았다.
사내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힘이 검 하나를 겨우 쳐냈다.
튕겨 날아간 검이 가루처럼 바스라졌다.
이어 마지막 남은 검이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
시발······, 진짜 존나게 아프네.
가슴에 칼 꽂힌 채로 건물 천장에 나가떨어지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다.
······내가 이렇게 칼 맞고 아파 뒤질 것 같은 것도 거기 포함되는 건가?
확정된 과거인가 뭔가 하는 그거 있잖아.
이 순간에도 운혜는 성화를 제어하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테지.
내 원수 갚겠답시고 온 우철이는 그거 지켜보고 있을 거고, 사마군 애들은 발 동동 구르고 있을 거고.
걔들은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건 상상도 못할 거다.
선계가 어쩌니 과거와 미래가 어쩌니 하는 건 전혀 모른 채, 그냥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줄로만 알겠지.
하지만 나는 아는 게 있다.
조금 있다가 우리 운혜가 칼 맞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아마 지금 나한테 칼침 놓은 누군가의 소행일 거라는 것도.
“그러면······, 그러면 안 되는데······.”
입에서 핏줄기가 주륵 흘렀다.
가슴에서는 아예 콸콸 쏟아지는 중이었다.
간신히 힘을 줘서 천장을 밟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아파서 당장이라도 뒤질 것 같아도,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방금 나한테 가해진 공격 같은 걸 운혜가 맞으면 모든 게 물거품이 될 거란 걸 나는 알았다.
칼에 맞은 채로 피를 흘리며 뒤를 돌아보니 뭐니 할 틈도 없이, 우리 애가 그대로 죽어버릴 거다.
그리고 계획이니 뭐니 하는 걸 다 떠나서라도······, 그냥 싫다.
그 여린 애가 이런 걸 맞도록 가만히 두고 보라고?
나는, 절대로 그렇게는 못해.
왜냐하면······, 내가 우리 딸 아빠잖아.
아빠가 딸을 지켜야지 누가 지키겠어.
이미 흐릿해진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쉬이잉-
다시 검 한 자루가 쏜살같이 내려오고 있다.
소리가 검이 움직이는 속도를 도무지 따르지 못해 뒤늦게 굉음을 흩뿌렸다.
이번엔 나를 노린 공격이 아니다.
운혜에게 향하는 검격.
검이 그려내는 선을 따라서 바닥을 박찼다.
양손을 내뻗으며 검격과 마주했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 순간에야 이뤄낸 무적신공의 대성.
깨질 것처럼 아픈 머리의 통증과, 뻗은 양손을 밀어 헤치며 내 가슴을 관통해낸 검격 중에 어느 것이 더 아픈지는 구분이 안 됐다.
나를 지나쳐서 천장을 뚫고 내려간 검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떠올린 건 오직 하나였다.
그저, 우리 딸이 조금이라도 덜 아팠으면.
그런 생각을 했다.
***
천마 설운혜는 자신의 등으로 칼이 꽂혔다는 걸 알았다.
화들짝 놀란 나머지 혀를 씹고 말았다.
뒤를 돌아본 그녀의 입가로 핏줄기가 주륵 흘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칼에 맞은 자체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도리어, 왠지 모르게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때로는 투정을 부리면서, 아낌없이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주고 싶은 그런 느낌.
‘대체 뭘까······?’
그런 의문이 드는 것과 동시에.
콰아아아앙-!
애써 안정시켜놓았던 성화가 기어이 폭발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선계의 신이 깊이 탄식했다.
“저 사내아이가 모든 일을 다 망쳐버렸구나!”
성화가 폭발하기 전에 설운혜의 목숨을 거두고 곧바로 회수를 했어야 하는 것을.
하지만 사내의 몸을 관통한 검이 그만 힘을 잃었고, 설운혜를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제어를 잃어버린 성화가 그대로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물리력을 넘어서 시공간이 뒤틀릴 만큼 어마어마한 힘의 격류.
잠시 침음하던 신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수습을 해야겠구나!”
이 또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파격이었으나, 그래도 지금 상황에서는 신격들을 파견하는 것이 최선이다.
어떻게든 폭발이 임계점에 치닫는 것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부름에 응답한 신격 몇이 지금 당장이라도 하계로 몸을 날릴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일월령이 말했다.
“다들 줄 잘 서는 게 좋을 거예요.”
나직한 목소리.
허나 초월적인 힘을 내재한 언령.
이 한 마디만을 위해서 일월령은 지금까지 조용히 신의 명령에 응하는 척을 했다.
선계의 신이 내린 명령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단 한 순간을 위해서.
언령을 들은 신격들의 몸이 흠칫 굳었다.
“아이야, 어째서······.”
선계의 신이 노한 표정으로 일월령을 바라봤다.
일월령이 그 얼굴과 마주했다.
이미 벌어진 일.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다음대가 저일 테니 어쨌든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말을 마친 일월령은 선계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새하얀 빛을 다만 바라보았다.
‘처음은 하가였으니 이번에는 운상이 네 차례란다.’
그녀는 흡족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하나보다는 둘이 나은 법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을 했다.
‘아니지. 나를 포함하면······, 그래. 셋이구나.’
응, 그 편이 마음에 든다.
일월령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하가야. 하가야!>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연속으로 가슴에 칼침을 두 번이나 맞았더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누구야. 왜 부르는 건데.
<하가야!>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군지 알 것도 같은데······.
<스물한 살에 동정호 근처에서 내게 흠씬 두들겨 맞았던 하가야!>
어? 그건 분명히······.
<서른 살에 나와 장강에서 사흘을 내리->
“운상이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외쳤다.
그 뒷말이 나오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데 정신을 차려보니 사태가 심각했다.
아까 검격이 관통해서 자그맣게 뚫린 틈새로 눈부시게 새하얀 빛이 뻗어나왔다.
단순히 빛만이 아니었다.
온 세계가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천하만물이 뒤엉키는 것 같은 혼돈이었다.
이게 내가 들었던 성화의 폭주인가 그거인 거 같은데.
머릿속으로 쎄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뭔가 단단히 좆된 것 같은 그런 느낌.
원래 내 생각은 이랬다.
여기서 내가 성화의 폭발을 통제하고, 그와 동시에 이곳으로 올 때 썼던 차원마법을 발동시키는 거지.
대충 지금이 클라이막스일 테니 돌아갈 타이밍도 이때였을 거다.
하지만 막상 보니까 나 혼자 통제할 만한 흐름이 아니었다.
성화를 이용해서 다시 차원을 건너기는커녕 아예 사태를 막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통제고 수습이고, 나도 여기서 죽을 것 같은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우리 딸 얼굴 다시 봐야 하는데.
애 엄마가 죄책감이니 뭐니 하면서 어디 못 가게 꽁꽁 묶어두고, 나탈리야랑 다시 만나서 이야기도 해야 하고, 우리 치코리타도 더 놀려먹어야 하는데.
포니테일로 묶은 그 머리칼을 한 번쯤은 잡아 당겨보고 싶었- 아무튼.
여기서 다 망쳐버리면 안 되는데.
근데 또 가만히 보니까 좀 이상했다.
분명히 성화가 발하는 힘이 어마어마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당장 쾅, 하고 터질 것 같지는 않았다.
꼭 누가 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지금 운상이 네가 하고 있는 거냐?”
<그럼 나 말고 누가 있겠느냐. 명색이 신녀였는데 잠시 잡아두는 정도야 무에 그리 힘들다고.>
말은 쉽다고 하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면 그게 아닌 것 같다.
게다가 등선한 애가 이렇게 관여하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내 생각을 귀신같이 눈치챘는지 백운상이 핀잔을 주었다.
<내 일을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네 일이나 잘하거라. 네놈은 때에 맞추어 알아서 돌아가면 되는 것이야.>
“그래. 알겠다.”
그 말과 동시에 성화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계속해서 커진다.
더 이상 말을 할 여유가 없는지 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시키는 대로 마법을 운용했고, 곧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왜 안 보이냐······?”
정말로 아무리 찾아도 안 보였다.
여기 올 때처럼 허공에 구멍이 뚫리고 그러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진짜 좆된 것 같은데.
<하가야, 멀었느냐?>
“조금만 더!”
<오래는 못 끈다. 어서!>
백운상이 다급히 말한 대로였다.
제어하는 데 한계가 왔는지 폭발이 점점 최고조에 치닫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폭발하기 직전에서야 내 기감에 무언가 잡혔다.
여전히 가슴에서 피가 멎지 않았지만 모든 내공을 다 실어서 마법을 운용했다.
마침내 허공으로 공간이 갈라졌다.
이곳으로 올 때와 같았고,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폭발과 함께 공간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콰아아아앙-!
지금까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굉음이 울렸다.
이제는 빛이 내 시야마저 가려버렸다.
그리고 공간 속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백운상이 말을 건네왔다.
<하가야.>
뭐야, 갑자기 왜 부르는 거지?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지막하게, 꼭 그러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서.
<······또 보자.>
번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공원에서 백운상이 했던 말.
약속을 지켰니 어쩌니 했던 거.
그게 이 뜻이었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분통이 터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걸 그때 내가 알아들었겠냐-!”
내 외침이 백운상에게 닿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메아리만을 남긴 채 내 몸이 어딘가로 향했다.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
나탈리야는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책무를 완수했음을 알았다.
혼이 육신을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고, 그조차도 나탈리야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애초에 오늘 이 순간만을 위해 환생한 것이었으니까.
이제는 흐릿하다 못해 투명하게까지 보이는 나탈리야를 차수희와 이수민이 숨 죽이고 바라봤다.
나탈리야는 해야 할 말을 했다.
“하무린이 잘 끝낸 모양이에요. 아마 곧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지현이도.”
차수희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되는데?”
“물론 나는-”
나탈리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은 허락된 시간이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지막 한 마디라도.
“······잘 부탁해요.”
누구를 잘 부탁한다는 것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나탈리야의 혼이 육신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어딜 간다는 거야!”
차수희가 손을 뻗으며 달려왔다.
하늘로 올라가면서 소멸을 맞이할 준비를 하던 나탈리야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고, 잡혔다.
차수희의 손에 의해서.
육신이 없는 나탈리야가 혼란에 빠져 속으로 되뇌었다.
‘어······?’
차수희가 재차 외쳤다.
“천군아! 저 애 좀 챙기렴!”
이수민이 풀썩 쓰러지는 나탈리야의 몸을 받쳤다.
이번에는 차수희가 놀라서 되뇌었다.
“응······? 방금 내가, 천군이라고······.”
그리고,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셋이 거기서 뭐해······? 아빠는 어디 가구?”
벚꽃나무 앞에 서 있는 유지현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이미 의식을 잃은 나탈리야를 포함해 차수희와 이수민까지 세 사람이 나란히 정지하듯이 멈춰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지현의 현재 심정은 이랬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방금 전까지 아빠랑 엄마랑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바람이 휘잉 불고 나니 눈앞에 펼쳐진 이 대참사는 뭐란 말인가.
엄마는 허공으로 양손을 뻗고 있었고, 전생의 사부는 의식을 잃은 현생의 친구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래.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엄마아빠랑 소풍 와서 사진 찍다가 벌어진 상황이라고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지현의 혼란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갑자기 허공으로 공간이 쩌억, 하고 갈라졌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떨어져 내려왔다.
유지현이 달려가 그 누군가를 받아냈다.
얼굴을 확인하고, 다만 멍한 정신으로 말했다.
“······아빠?”
익숙한 복식.
마교 무인의 옷차림을 한 유수현이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유지현이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아빠아아아-! 이거 뭐야!? 이거 뭐냐구-!”
쩌렁쩌렁한 외침에 벚꽃잎이 호응이라도 하듯이 흩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