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소중해요.
땅 위로 마른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피 냄새가 섞여 들어오는 것이 느껴져 천마 설운혜는 옅게 얼굴을 찡그렸다.
눈앞에 펼쳐진 전장.
병장기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금속음을 이 황량한 벌판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십만대산을 나섰던 신교의 수천 무인들.
오늘 싸움이 벌어진 지 고작 한 시진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어림잡아 삼백 명이 넘게 숨을 거두었다.
소맷자락을 떨쳐내 기병 다섯을 낙마시킨 그녀가 어딘가로 시선을 두었다.
자주 얼굴을 보았던 교도들이 죽은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설운혜는 오늘 아침에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황군 삼만이 무에 그리 대수겠습니까. 한 명당 열 놈씩만 목을 베어도 능히 감당해낼 수 있습니다.’
‘도량이 좁아 고작 열 명이구나. 나는 백 명쯤은 데려가야겠다.’
‘데려간다는 것을 보아하니 네놈은 죽을 요량인가 본데 나는 살아서 교주님이 마도천하 이루시는 것까지 보아야겠다.’
그런 대화들.
설운혜는 이를 악물며 되뇌었다.
‘안 죽는다고 했잖아······. 절대로 안 죽는다고 말했으면서······.’
허나 슬픔과는 별개로, 신교의 무인들을 이끄는 영도자로서 이제 설운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한 시진 만에 삼백 명.
다시 한 시진이 더 지나면 그보다도 많이 죽을 것이었고,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죽는 이가 일천을 넘길 터.
중과부적이었으며 필패였다.
황실은 결코 쭉정이 같은 자들을 보내지 않았다.
기마병들만 오천에 보병들도 최소한의 무공을 익힌 정예군들이었다.
게다가 일류 이상의 무공고수도 일천 이상.
그야말로 신교를 절멸시키려고 작정을 한 듯한 군세였다.
심지어 무림맹의 무인들까지 합세해 덤벼드는 형국.
제아무리 신교의 무인들이 용맹하다 해도, 설운혜가 익힌 천마신공의 공능이 제아무리 오묘하다 해도 맞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침내 설운혜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전원 퇴각하라.”
황제가 격문을 내린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오후.
그간 황군과 다섯 번을 싸웠고, 이번이 다섯 번째 퇴각 명령이었다.
호북성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던 신교는 어느새 호남을 거쳐 광주까지 밀려 있었다.
***
싸늘한 얼굴을 한 일월령이 어딘가로 향했다.
가슴속에 이글거리는 차가운 분노를 간신히 갈무리하며 궁전 앞에 다다른 일월령이 다짜고짜 입을 뗐다.
“어찌 그리 하셨나요?”
<무엇을 말하는 것이니?>
감정의 고저가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
일월령이 마침내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하계의 일을 말씀드리는 것이에요.”
하무린에게 들었다.
황군이 신교의 무인들을 몰아붙이고 있다고.
그것도 단번에 결단을 내려는 게 아니라 마치 십만대산 쪽으로 몰이라도 하듯이.
그리고 천마신교 내에 대기하고 있던 무인들과 합류한 설운혜가 어렵사리 성사시킨 자리에서 황군이 요구한 조건.
천하에 씻지 못할 죄를 지은 주모자 설운혜와 수뇌부 스무 명의 목.
모든 교도들의 무공을 폐하고 다시는 병장기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
당연히 협상은 결렬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월령은 이 일의 진정한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안다.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선계의 신. 그가 이 모든 것을 주도했다.
일월령이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참으로 잔인하십니다. 진정 아무 죄 없는 그 아이를 죽이려 하시나요?”
<네가 그리 만들었단다.>
“······!”
단출한 대답이 모든 반론을 막았다.
본래 신교가 정파 무림맹을 압도할 수는 없었을 터였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일월령이 손을 거든 것이 원인이라고 판단한 신이 조치를 취한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일월령과 백운상, 하무린까지 세 사람이 함께 꾸민 일이었으나 그것만은 간신히 숨길 수 있었고, 그 정도가 일월령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뒤틀린 흐름을 되돌리려는 신의 개입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더욱이 신의 의도는 단지 일을 순리대로 행하는 데에만 있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천마신교와 설운혜를 가열차게 몰아붙이지는 않았을 터.
진정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어쩌면 그 불을 진작 이리로 가져오지 않은 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는 않았어.>
저 세계에서 발해지는 신비의 근원이 되는 성화.
회수해 선계로 가져온다면 무공도, 마법도 자취를 감추게 된다.
바위를 깨부수고 하늘을 나는 이적을 흔히 찾아보기란 힘들게 될 터였고, 차라리 그렇게 함이 옳으리라고 신은 판단한 것이다.
“그렇다면 성화만을 가져오면 되는 일이잖아요?”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억지를 부리는구나.>
신이 질책하듯 던진 말의 의미를 일월령은 안다.
설령 신이라고 해도 하계의 일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옳지 못했으니까.
하계의 인간들이 자아내는 흐름에 맞추어야 함이 순리였고, 황군을 움직인 것도 그러한 일환이었다.
그리고 하계의 인간들, 황군과 무림맹을 움직인다 함은 필연적으로 천마신교의 절멸과 설운혜의 죽음을 동반하게 된다.
신격이 파견되어 성화를 회수해 오는 건 그것이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게 만든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니까.
일월령이 간신히 말을 골랐다.
“벌을 내리시려면 차라리 제게 내리세요. 제가 감당할게요. 운혜 그 아이가 죽어야 할 이유는 없어요.”
궁전의 목소리가 탄식처럼 웃었다.
<너를 벌해 무엇하겠니. 만약 그리해서 일이 순리대로 돌아온다면 응당 벌을 내리겠지만 그것이 아닌 것을 너도 알지 않니?>
“······.”
<가만히 지켜보렴. 이미 네가 지은 죄가 결코 가볍지 않아.>
분명 걱정이 담긴 말이었으나 일월령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기색을 내보였다.
문득 신이 의문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하계의 아이가 그리도 소중하니? 얼굴을 마주한 적도 없는데.>
던져진 물음에 일월령은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설운혜가 소중하냐고?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우문이었다.
소중하다. 소중하고말고.
너무도 맑은 심성을 가진 그 아이를, 자기도 모르게 정이 가는 그 아이를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답답해 속이 터질 것 같은 백운상도, 딸아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움직이는 하무린에게도 어찌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있을까.
동경, 사랑, 자애.
그 모든 마음을 한 데 모아 일월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소중해요.”
그리고 그렇게 답한 순간, 일월령의 몸이 속박되었다.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면 이대로 놓아둘 수가 없겠구나.>
“그게 무슨······!”
“모든 것을 끝마칠 때까지 나와 함께 있도록 하렴.”
어느새 곁에 나타난 누군가가 그리 말했다.
그리고 일월령은 처음으로 신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청초한 꽃처럼 가녀린 여인이 안쓰러운 얼굴을 한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황과 체념이 섞인 표정을 ‘연기’하면서, 일월령은 생각했다.
‘이제는 너희 둘에게 달렸구나······.’
***
마침내 때가 왔다.
해야 할 것은 크게 세 가지였고, 그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로 정파 애들과 황군이 우리 딸의 목숨을 함부로 해하지 못하게 막아내는 것.
두 번째는 내가 본래 들었던 대로 성화가 폭발하는 일까지 무사히 이끌어내는 것.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폭발하는 성화의 힘을 이용해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
거기까지만 하면 된다.
쉽다고는 못하겠지만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의문점이 하나 남는다.
“그러면 운혜 등에 칼침을 놓는 게 나라는 말이냐?”
<······아마 그렇게 되겠지.>
백운상이 답했다.
일월령 그 사람이 선계의 신을 만나러 갔다가 자취를 감춘 게 벌써 사흘째.
너무도 많은 것을 받았고, 아무리 감사를 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이번에 모습을 감춘 것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사실은 그녀 스스로 미끼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강호무림의 일에 개입한 것은 오로지 자신이라고 속여내고, 나와 백운상을 사각지대에 둘 수 있도록.
백운상이 직접 내게 말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해준 것도 물론 그녀였다.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부터 어째 낯선 느낌 없이 친근했는데······, 후에라도 감사인사를 꼭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눈앞에 놓인 일을 해결해야 했다.
의문을 담아 내가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 필연성이 어쨌건 이미 정해진 과거가 어떻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우리 딸 등에 칼을 꽂는다고?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는 이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정파나 황군놈들 중에 상도덕 없는 개새끼가 한 마리 있어서 급습을 했다는 게 더 올바른 결론 아니겠냐?”
<아직은 알 수가 없구나. 하지만 하가 네놈이 제일 유력한 후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만은 가슴에 새기고 있거라.>
여기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해진 시간이 되었는데도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 순간이 다가왔을 때 실제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건 아직 나 자신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비상사태를 알리는 타종이 연속해서 울렸다.
황군과 무림맹의 무인들이 교내에까지 입성한 것이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버린 탓에 운혜가 서 있는 신교의 최심부, 성화를 모신 제단 앞까지 당도하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마침내 제단으로 향하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근처의 길목에서 다른 정파 무인들과 싸움을 이끌어나가던 나는 사실 온 신경을 뒤편에 집중하고 있었다.
귀가 열려 있었고 몇 초마다 시선을 뒤로 돌렸으니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한 팔이 없는 우철이도 보였고, 이때는 이름이 달랐지만 이서준 그놈의 모습도 멀찍이 보였다.
병장기를 손에 쥔 수십 명의 무인들을 향해 운혜가 비웃음을 흘렸다.
“나 하나가 무서워서 많이도 몰려왔구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하기야 서로 말을 나눌 필요는 없을 테니까.
곧장 싸움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나는 은밀하게 운혜에게 도움을 줬다.
일류를 넘어서는 무인들 수십 명이었으니 운혜와 사마군 애들이 자력으로 모두 상대하기는 무리가 있을 터.
적당히 대등하게 싸움을 이끌어나가는 정도로, 우리 딸이 너무 지치지 않을 수 있는 선에서 힘을 행사했다.
그리고 이제는 개입하는 걸 조금씩 줄여야 할 때였다.
내가 들은 과거의 일에서는 성화가 폭발하기 전에 이미 한 번 운혜의 통제를 벗어나서 태산처럼 커진다고 했다.
그 후에 우리 딸이 그걸 수습했고, 등 뒤로 칼이 날아드는 건 그 다음의 일이다.
한데 지금처럼 우리 딸한테 별다른 부담이 없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그리 되기도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아주 큰 일이 생기지는 않을 정도로만 힘의 행사를 줄여나가-
화르륵-!
제단에 올라가 있던 성화가 미친 듯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저게 미쳤나? 갑자기 왜 저래.
아직 운혜한테는······, 아무런 이상도 없는데.
의문스러운 마음으로 긴장을 유지하며, 나는 성화를 바라봤다.
잠시 싸움을 중단하자 외친 운혜가 안간힘을 쓰면서 성화를 통제했다.
그걸 보느라 하마터면 반응하지 못할 뻔했다.
백운상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속절없이 그랬겠지.
<하가야, 이쪽을 봐라!>
백운상이 말하는 이쪽이라면 선계. 다시 말해 하늘이었다.
천장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그게 무슨-
“······!”
쉬이잉- 하는 파공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압도적인 기세 같은 것이었겠지.
다만 분명한 건 거기에 실린 힘이 막대하다는 것과,
그 힘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이면 당도할 것이다.
거기까지 판단이 선 나는 주저하지 않고 땅을 박찼다.
천장을 그대로 뚫어내고, 허공을 향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검 한 자루가 쏘아져 내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정확히 운혜가 지금 있을 공간을 향해서였다.
절대로, 죽어도 그렇게는 못 둔다.
모든 내공을 한 데 끌어모아서 간신히 후려쳐냈다.
카아앙-!
그리고 허공에 멈춰서 숨을 고르는 내 귓가로, 누군가의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말썽을 부리는 아이는 따로 있었구나.>
한없이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와 함께 다시 빛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세 자루나 되는 검이 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