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100화 (100/130)

100.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세상에 처음 하는 일보다는 두 번째 하는 일이 더욱 쉽다는 말이 있다.

그 자명한 이치를 오늘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막사로 들어서자마자 크게 외쳤다.

“억조창생의 주인되신 천마께 앙복하나이다!”

예전에 꼭 이런 상황이 있었지.

지현이가 열네 살 때 내가 전생에 무림인이 아니었나 의심했을 때.

그때 지현이는 아직 사춘기도 안 온 어린애였는데, 지금 이렇게 우리 딸과 마주하려니까 마음이 많이 아팠다.

“얼굴을 들라.”

긴장된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들었다.

백만 교도를 영도하는 신교의 천마로서의 위엄이 가득한 얼굴이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

내가 보기에는 억지로 무게를 잡는 스물두어 살 여자애.

한국이었으면 지금 한창 대학 다닐 나이. 그냥 그렇게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여자애가 내게 말한다.

“내 너를 자주 지켜봤었다.”

별다른 내용은 아니었다.

항상 앞장서서 용맹을 떨치기에 눈여겨 봤었다고 했다. 교로 돌아가면 크게 상을 내리겠노라고.

그러면서 날이 잘 드는 칼을 하나 건네주었다.

칼을 받는 내 손이 살짝 떨렸다.

이 상황 자체가 몸서리쳐지게 싫었으니까.

우리 딸이랑 내가 평소에 주고받은 거라곤 밥그릇이나 수저, 용돈, 가끔 사오는 아이스크림 봉지 이런 거였는데. 바밤바랑 비비빅 사오면 애가 기겁을 했었지.

“왜 그러느냐.”

우리 딸이 의문스러운 눈치로 물었다.

나는 망극한 마음에 손이 떨렸다고 답했다.

그러자 운혜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무림맹의 위선자들을 베어라 주는 것이니 받거라.’ 라고.

떠보듯이 말했다.

이 칼을 휘둘러 마도천하를 이루는 데 분골쇄신하겠다고.

그리고 운혜가, 우리 지현이가 말했다.

“마도천하, 마도천하라······.”

그 읊조림의 의미를 나는 알았다.

사실 이 애는 마도천하니 뭐니 하는 건 관심도 없었을 것이었다.

십만대산에서 사부와, 교도들과 행복하게 지내면 그걸로 족했겠지.

하지만 진천군이 죽어버렸다.

응당 복수를 해야 했고, 강호무림을 상대로 복수를 한다는 건 정마대전이 벌어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이건 설령 운혜가 전쟁을 일으키는 걸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머지않아 일어났을 일이었다.

정파와 천마신교는 나와 백운상이 권좌에 오른 이후로 이만큼 크게 싸움을 벌인 적이 없으니까.

양쪽 모두 힘을 외부에 발산하고 싶었고, 그리 할 상대라고는 서로가 서로밖에 존재하지 않앗으니 정마대전이 일어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진천군을 함정에 빠뜨린 것도, 천마신교에서 조속히 전쟁을 준비한 것도, 무림맹이 기다렸다는 듯이 호북성을 넘어 무인들을 보낸 것도 모두 그러한 논리 아래에 있었다.

해서 이 여린 아이는 그저 거스르기 힘든 시대의 흐름에 휩쓸린 희생양일 뿐이었고, 나는 그게 참을 수 없을 만큼 분했다.

가슴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마도천하를 위해, 교주님을 위해 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래. 그리 말해주니 든든하구나. 네 피곤할 터이니 이만 물러가거라.”

어쩌면 전생의 우리 딸과 이렇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는 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무례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짧은 순간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주 약간이긴 했지만 우리 딸은 웃고 있었다,

그 미소를 지켜주고 싶다고, 가능하면 좀 더 편히 웃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

백운상은 오늘도 아무렇게나 앉아서 구름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하무린이 그곳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잘하고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두어 달 전에 목소리로 재회를 했지만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도 잘 몰랐던 데다가, 이미 혼인까지 한 사내와 옛 정인이 격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저어되는 바가 있었던 탓이다.

“휴우······.”

한숨을 푹 쉰 백운상의 뒤편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운상아, 운상아!”

“······조사님?”

백운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월령이 조금 들뜬 기색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네게 꼭 해주어야 할 말이 하나 있단다.”

“무엇을 말씀이신지요.”

그리고 일월령이 비장한 어조로 입을 뗐다.

“하가 아이는 반드시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 그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과거로 온 하무린이라고 해도, 그 자신이 이곳에 온 이후에 다른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가령 백운상도 서역 땅에서 환생을 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어찌 되는지는 완전히 미지의 일이었던 것이다. 하무린이 돌아간 이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을 터였다.

“여기서 그 아이가 일을 끝마치지 못한다면 이후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음이니.”

“······그렇겠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전생을 경험한 이들이 일제히 존재를 감춘 일이었다.

만약 하무린이 실패하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백운상을 향해 일월령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말거라. 이 언니만 믿으라지 않았더냐. 다 잘 될 것이야.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야. 하가 아이가 돌아간 이후에 대한 것이란다.”

“······하오면?”

“네가 환생을 하였을 때 지금 내 말을 기억할는지는 모르겠구나.”

“우선 말씀을 해 보시지요.”

일울령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온 천하가 훼방을 놓는 것에 비한다면······, 고작 한 명쯤이야 가볍고도 가벼운 일이 아니겠니?”

백운상의 표정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일월령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호흡을 정돈한 뒤에 화가 난 목소리로 답했다.

“하가는 그곳에서 내자를 두고 자식까지 낳았다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나도 그리 들었다만······, 그때 하가 아이는 네가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지 않겠니?”

“······.”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백운상이 빠른 어조로 이야기를 정리했다.

“지금 하신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조사님.”

그리고 몸을 홱 돌려 보폭을 크게 해 멀어졌다.

냉기가 뚝뚝 흐르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일월령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직은 너무 일렀던가······?’

하기야 아직 시간은 꽤 여유가 있을 터였다.

백운상이 당장 하계로 환생을 하지도 않을 테니까.

지금 확실한 것은,

하무린이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미 가정을 이루었고,

백운상도 그곳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미 정해진 과거였으니 결코 바꿀 수 없는 사실들이다.

하지만 그 이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운상이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히 이루지 못할 일도 아니리라······.’

어지간한 인연 따위는 백운상과 하무린의 인연에 비하지도 못할 테니까.

물론 앞으로의 일이 어찌될 지는 일월령이라 해도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환생한 백운상에게 걸림돌이 없기를.

오직 자신의 마음에 충실할 수 있기를.

그것이 지금 일월령이 가장 중요하게 두고 있는 목표였다.

그리고 백운상의 기분을 달래주어야겠다며 일월령이 몸을 돌린 순간,

그녀의 앞에 새하얀 궁전이 나타났다.

곧장 목소리가 울렸다.

<근래 찾아오지 않길래 불렀단다.>

“······.”

일월령은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곳 선계를 다스리는 신에게 그런 것이 통할지는 의문이었으나 지금 들킨다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네가 관리를 하겠다 한 그곳이 요즘 꽤나 시끄럽다 하던데······.>

지금 강호무림에서 정마대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뜻함이었다.

그리고 친근하게 말을 건네듯이, 혹은 질책을 하듯이 이어진 말.

<장난을 너무 심하게 치지는 말거라.>

“······네,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일전에 지냈던 곳에 정이 들어서 그러는 줄을 알고 있다. 개입을 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겠지. 해서 내 조치를 취해 놓았단다.>

“조치라 하시면-”

<그것은 네 소관이 아님이니 그저 관여치 말고 지켜보거라.>

그 말을 끝으로 일월령은 다시 원래 서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걱정스런 마음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황실이 강호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하무린에게 이미 들어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주도한 것이 선계의 신인 줄은 미처 몰랐다.

때문에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이미 벌어졌던 일에 지나지 않는가······?’

일월령은 이제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하무린에게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천하가 어지러움을 두고 볼 수 없어 삼만에 이르는 대군을 보내기로 했다는 황실의 격문이 떨어졌다고 했다.

***

“······괜찮니?”

차수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탈리야를 바라봤다.

“뭘 말하시는 건가요?”

“알고 있잖아.”

지금도 돗자리에 앉은 채 태연하게 이수민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차수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탈리야의 몸이 이따금 흐려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주기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고, 그때마다 흐려짐의 정도가 심해졌다.

나탈리야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물었다.

“당신에게는 좋은 일 아닌가요?”

“왜 그렇게 생각해?”

이번에는 나탈리야가 말하는 방식을 달리 했다.

이수민한테까지 굳이 알릴 필요가 없는 일이었으니까.

<좋잖아요? ······내가 모습을 감추면.>

그렇게만 된다면, 몸을 빼앗았니 뭐니 할 것도 없이 지금의 차수희만 남게 되니까.

하지만 차수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무리 나탈리야가 뭐라고 하더라도 차수희의 결심은 확고했다.

어릴 적부터 유수현과 인연을 쌓아올린 건 나탈리야였다.

몸을 돌려준다는 원칙만은 돌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유수현과 유지현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후의 일이었지만.

만약 나탈리야가 계획하고 있던 게 실패한다면 차수희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생각이었다.

자기 자신의 일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남편과 딸아이가 소중했으니까.

하지만 어찌 됐든 모든 걸 되돌린 다음이라면 더 이상 이 몸에 머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표정만으로 차수희의 생각을 읽었는지, 나탈리야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번에는 차수희도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게, 나탈리야에게만 가닿도록 말했다.

<존재가 어쩌니 그런 건 상관없어. 오빠랑 처음 알게 된 건 너니까.>

단호한 말에 나탈리야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읊조렸다.

“······당신 생각대로는 아마 안 될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차수희의 질문에 답하기도 전에 나탈리야의 몸이 크게 흐려졌다.

조심스럽게 술을 따르던 이수민에게도 보일 만큼 확연하게.

“사부님!?”

나탈리야가 손을 뻗어서 이수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방금······.”

“하가놈이 잘하고 있는 모양이구나.”

나탈리야는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 자신은 오직 오늘만을 위해 마련된 존재였기에, 모든 일이 끝난 후에는 더 이상 머무를 곳이 없었다.

마침내 끝이 다가온다는 걸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다만 나탈리야에게도 아쉬운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우선 하무린에 대한 것.

‘다시 한 번 인사를 나누기는 힘들 것 같구나······.’

그리고 하나 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지켜보는 차수희. 조사 일월령에 대한 생각.

‘조사께서는 내가 원한다면 뺏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조사님 본인의 이야기인 줄은 모르셨으렷다.’

그때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을 지금 차수희에게 알려주지 못하는 것.

나탈리야는 약간의 심술을 담아서 그것을 아쉬워했다.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그것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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