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모두 잘 될 거야.
중원말로 물어온 목소리.
질책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어째선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립고 포근한 느낌까지 들었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손대지 말고 내버려두렴. 그러지 않아도 이제 곧······.>
그 말대로였다.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진천군의 표정이 다시 편안해지더니, 몇 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숨이 멎었다. 정말로 죽은 거였다.
“미안하다, 천군아.”
적어도 무덤이라도 만들어주고 싶어 진천군의 시신을 들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싸늘한 기색을 띠고 목소리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잠깐만.>
“왜 그러시오.”
내 목소리가 그쪽에 닿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나도 중원말로 답했다.
<방금 그 아이.>
“진천군?”
<그래. 혼을 어디다 숨긴 거니? 이리 바로 소멸할 리가 없는데 보이지가 않는구나.>
“숨기긴 누가 숨겼다고 그러시오.”
<그러지 말거라. 순리에 어긋나는 일이야.>
듣자듣자 하니까 진짜······.
“애시당초 그쪽은 누군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요. 척 보기에도 사람은 아닌 듯한데 모습이라도 보이고 말을 해야지.”
<그러는 너는 누구니? 갑자기 나타난 데다, 입고 있는 의복을 보니 중원 사람은 아니구나. 혹여 신격이 장난을 치는 것이라면 추후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니 지금이라도->
“하무린.”
으름장을 놓던 목소리가 뚝 멈췄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내게 묻는다.
<하무린이라고 한 것이 맞니?>
“전생에는 그 이름을 썼소이다.”
<전생······?>
“그렇소. 이제 고인께서 이름을 밝히실 차례요.”
사실 고민을 좀 했다.
하무린. 혹은 유수현.
둘 중 하나의 이름만을 댈 수도 있었고, 아예 거짓을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이 맞는다면.
그러니까 백운상이 나를 과거로, 강물에 떠내려온 진천군이 숨을 거둘 당시로 보내서 지금 나와 대화하고 있는 이 여인과 마주하게 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 게 옳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첫 단추는 제대로 꿰어낸 것 같았다.
<하가······?>
여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번에는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이름을 불렀다.
“운상이냐?”
<정말로 네가 하무린이라고?>
“네놈이 이리로 떨궈놓고서는 그걸 묻는단 말이야?”
아마 지금의 백운상은 전혀 모르는 일이겠지만, 일부러 장난을 섞어 그리 말했다.
***
여전히 사람이 오다니지 않는, 벚꽃이 예쁘게 피어 있는 공원.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격분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차수희가 나탈리야를 향해 물었다.
어제까지는 자신이 몸을 돌려줘야 할 상대로 알았지만, 이제는 그녀가 유수현과 전생에 각별한 사이였다는 것을 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생긴 나머지 눈앞의 상대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딸인 유지현에 이어서 남편인 유수현까지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는 것.
눈앞의 여자가 그것을 주도했다.
그리고 나탈리야가 답했다.
“지현이를 다시 돌려달라고 했죠?”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차수희는 간신히 이성적으로 단어를 골라 말했다.
“오빠도 사라질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잖아?”
“말해줬다면 이렇게 바로 보내주지는 않았-”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나탈리야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어느새 차수희가 한 손을 뻗고 있었다.
마치 목을 조르는 동작처럼 손아귀가 좁혀졌고, 나탈리야의 얼굴로 고통스러운 빛이 보였다.
“이것밖에 없었다. 가능한 빠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런 말이야?”
“······그래요.”
간신히 대답한 후에 나탈리야의 몸이 땅으로 풀썩 떨어졌다.
험악한 분위기와 그보다도 저항할 수 없는 기세에 눌려 있던 이수민이 서둘러 나탈리야 쪽으로 달려갔다.
차수희가 조용히 말했다.
“난,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데.”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차수희가 생각하기에는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았다.
과거의 일을 원인으로 해서 미래에 결과가 발생한다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미 그런 경우를 하나 알고 있기도 했다.
유수현과 유지현의 전생에 있었던 사건에 의해 그들이 환생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라면 충분히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인과 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미래의 일을 원인으로 해서 과거의 일이 발생한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문제처럼 명백히 모순이 생기고 만다.
사건의 근원을 찾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나탈리야가 호흡을 정돈하며 말했다.
“평행세계 같은 건 아니에요. 애초에 그런 건 있지도 않고.”
그건 지금까지 들은 걸로도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나탈리야는 결코 시간적인 모순이 생긴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겠지. 그러면 설명해봐. 아까 오빠랑 대화할 때처럼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내가 하무린과 어떤 사이였는지 꽤 신경이 쓰이나봐요?”
나탈리야의 눈가로 웃음기가 보였다.
차수희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답했다.
“괜히 도발하려고 해도 소용없어.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
“후우······.”
나탈리야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분명히 모순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대가를······.”
잠시 말을 멈춘 나탈리야가 차수희를 똑바로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떨리는 눈빛이었다.
“역리를 순리로 돌리기 위한 대가는······, 그건 이미 치뤘으니까. 지금 와서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에요.”
“대가?”
“더 이상은 말해주고 싶어도 못해줘요. 전부 다 망치기 싫으면 그냥 기다리고 있는 게 좋을 거예요.”
“너······.”
“모두 잘 될 거니까.”
나탈리야는 그렇게만 말한 후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다시 돗자리 쪽으로 걸어가는 나탈리야의 몸이 일순간 흐릿해지는 것을, 차수희는 분명히 보았다.
***
길게 이어진 이야기를 들은 일월령의 감상은 이랬다.
“그럴 수는 없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야.”
“하지만 조사님. 하가가 실제로 저곳에 있지 않습니까.”
함께 구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백운상이 말했다.
일월령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 아이가 말한 게 모두 사실이라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였다.
우선 환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부터가 놀라웠다.
일월령이 알기로는 신격이 되지 못한 혼은 지상에서 그대로 소멸해 버린다.
오늘도 본래라면 그랬을 터였다.
백운상의 제자인 진천군의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기에, 개입은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죽음을 맞는 모습만은 보려고 백운상과 함께 하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데 자신을 하무린이라고 주장하는 남자가 불현듯 모습을 드러냈고, 소멸하는 과정도 없이 진천군의 혼이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실 일월령에게 짚이는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수십 년 전에 하무린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도 지금 진천군처럼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자의로 등선을 거부한 자의 혼이라면 오래도록 자취가 남아 있음이 마땅함에도.
만약 환생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오늘의 일도 그때의 일도 설명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도저히 납득이 안 가지 않았다.
“운상이 네가 저 아이를 이곳으로 보내고, 일을 순리대로 이끌라고 했다고? 이것 자체로 이미 역리인데 그게 무슨······.”
침음하던 일월령이 짧게 말했다.
“이건 알려야 해. 아무리 내가 관리하고 있는 곳이라지만 그냥 덮을 문제가 아냐.”
수백 년 후의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저 남자를 내버려 두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만약 숨겼다가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벌을 받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일월령 자신은 둘째치고라도 백운상은 틀림없이 소멸을 면치 못할 중죄였다.
일월령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백운상이 그녀의 팔을 꼭 붙들었다.
고개를 숙이며 간청했다.
“조사님. 도와주십시오.”
“운상아······.”
“제 제자도, 교에 홀로 남은 운혜 그 아이도, 하가도 내세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지 않았습니까. 부디 앞으로도 그리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조사님. 부디······.”
일월령이 손을 마주 잡았다.
눈이 마주쳤고, 눈빛에 담긴 간절함을 읽었고, 백운상에게 물었다.
“하무린 저 어린 강아지가 네가 아닌 다른 여인과 혼인을 했다지 않느냐. 너는 분하지 않니?”
“이를 말씀이겠습니까.”
“한데 어째서?”
“이리로 보내기 전에 제가 저놈을 ‘하 가가’라고 불렀다 듣지 않았겠습니까.”
백운상이 물기 어린 눈으로 웃었다.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가 어쩌자고 너처럼 답답한 아이를 곁에 두었을까······.”
일월령은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참으며 백운상을 바라봤다.
슬픔을 간직한 채 선계로 등선한 백운상과 처음 만난 것이 벌써 수십 년이나 전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 오랜 세월을 잠에 빠져 있던 일월령이었지만 그날 이후로는 잠에 든 적이 별로 없었다.
깨어 있던 시간이 십여 년에 불과했던 어린 신은 이제, 본래 타고난 격에 걸맞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항상 백운상이 함께 했다.
아낌없이 애정을 쏟았고, 경애 어린 마음을 받았다.
그런 아이가 벌을 받아 소멸하는 것을 일월령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러나 백운상의 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일월령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야.”
“조사님······, 정녕 그리 할 수가 있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 언니에게 맡기려무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줄 것이니.”
물론 거짓말이었다.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고, 발각된다면 무거운 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일월령은 내색하지 않고 백운상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하계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무린에게 말을 건넸다.
“하가 아이야.”
<이야기는 끝났소이까.>
“그래. 네게 협조를 해주기로 했단다.”
<······운상이는 옆에?>
“그래. 이 아이가 신경이 쓰이니?”
<아까 말을 하다가 말았지 않소이까.>
“회포를 풀 시간은 나중에 줄 터이니 기다리려무나. 우선 지금부터 어디로 갈 생각이니?”
하무린의 말에 따르면 그를 이곳으로 보낸 백운상은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잠시 고민하듯이 하무린이 말했다.
<십만대산으로 가볼까 하오이다.>
“신교에?”
<그곳에 내 딸아이의 전생이 있고, 모든 말썽이 그곳에서 일어났으니 말이오.>
“그래, 자주는 지켜보지 못하나 이따금 말을 걸겠다. 너에게는 운상이를 통하는 것이 좋겠지?”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이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곁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백운상을 보며 일월령이 웃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분명 모든 것이 잘 될 테니.”
“감사합니다, 조사님······.”
“네가 고마워할 일은 아니야.”
그리고, 일월령은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다.
‘나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것이니.’
그 말이 옳았다.
백운상이 그러했듯이 그녀 역시도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고 싶었으니까.
몇십 년에 걸쳐 이야기를 들어왔던 백가와 하가의 인연.
그것을 올바르게 맺어주는 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바라는 목적이었다.
비록 자신이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닷새가 지났다.
교주의 죽음이 알려져 격분한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전쟁을 준비했고, 스산한 전운이 십만대산으로 감돌았다.
병장기와 물자를 바삐 모았고, 신교와 성화를 숭앙하는 이들이 새로 대거 입교했다.
그리고, 정체를 숨긴 한 명의 남자가 그 대열에 함께 했다.
정파 무림맹주. 협검무제 하무린.
천마신교 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