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97화 (97/130)

97. 잘 지내세요.

***

눈과 머리칼 색만 검을 뿐 영락없이 외국 사람으로만 보이는 십대 소녀가 점잖은 어조로 나를 불렀다.

“하가야, 어찌 대답이 없느냐. 하가야?”

왜 대답이 없겠냐.

너무 당황해서 그런 거지.

쟤를 내가 어떻게 불러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힌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딸 친구에다 러시아에서 온 유학생 타샤였잖아. 걔가 사실은 전생에 나랑 지지고 볶으며 살았던 백운상이라고?

이게 무슨 웹소설 제목도 아니고 말이야.

내가 아무 대답을 못하고 있자 타샤······, 아니.

백운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재차 말했다.

“그냥 네놈 마음 가는대로 하거라. 타샤라 불러도 상관없고, 나를 백운상으로 대해도 상관없다. 물론 내게는 ‘령 매’가 가장-”

“운상아.”

“그리 부를 줄 알았다.”

즐겁게 말하는 백운상 쪽으로 걸었다. 그대로 지나쳐서 애 엄마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지금도 살짝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는 다시 백운상을 바라봤다. 나와 마주한 백운상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지워져 있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 마디를 흘린다.

“잘 어울리는구나······.”

그 말에 담긴 감정은 내가 모를 리는 없었으나, 잡고 있는 손을 놓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유수현이고, 애 엄마 남편이고, 지현이 아버지니까.

그래서 다만 이렇게 물었다.

“설명해 줘라. 너랑 우리 딸 없어진 거랑 관련이 있냐?”

예전에 미칠 듯이 사랑했던 여자랑 재회한 기쁨보다도 우리 지현이 일이 더 중요하니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애 엄마가 걱정되니까.

그리고 백운상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애 엄마와 지현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기쁜 것처럼.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렇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리 하면 된다. 그러면 되는 것이야······.”

“백가야.”

“질문에 답을 하자면 관련이 있는 것이 맞다. 어찌 풀어야 하는지도 안다.”

“정말이냐? 어떻게 해야 하는데?”

다급히 묻는 건 한 귀로 흘리듯이 백운상이 걸었다.

내가 펴두었던 돗자리에 앉더니 그제서야 말했다.

“우선 술부터 한 병 사오너라.”

“······술?”

“그리고 천군이······. 우리 꼴통 같은 제자도 좀 불러와야 하고.”

삼십 분 정도가 지난 후.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공원에서 대환장 파티가 벌어졌다.

강호무림에 악명을 떨쳤던 천마 둘이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술잔을 나누고 있으니 그렇게 말해도 되겠지.

백운상이 종이컵을 든 손을 뻗으며 말했다.

“여기 술 한 잔 따라보거라.”

이수민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눈치로 주춤거린다.

백운상이 언짢은 기색을 담아 재차 말했다.

“한 잔 따라보래도?”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수민이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나를 향해 쏘아붙였다.

“유수현 씨. 이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백가야. 우리 수민이가 이제 어릴 적 네 시중 들던 진천군 아니라신다.”

“그래?”

맥주병을 거꾸로 잡고 빙빙 돌리던 백운상이 내게 말했다.

“하가야. 내가 옛날 이야기 하나 해주랴?”

“옛날 이야기?”

“네놈이 우리 제자와 처음 얼굴 맞댔을 때.”

“고기 먹여준 날?”

“그래. 그 후에 본교로 돌아온 다음의 일이다.”

“서, 설마-”

이수민 얼굴이 갑자기 사색이 됐다.

아랑곳않고 백운상이 말을 이었다.

“이 아이 방에 가니 웬 종이 몇 장이 갈기갈기 찢겨있었는데 주워들어 보니 그것이 다 네놈의 용모파기-”

“그아아악! 사부께 불초제자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흐뭇한 표정으로 백운상이 잔을 받았다.

“너도 한 잔 받거라.”

“네, 사부님.”

고개를 돌리고 잔을 비운 이수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사부님이십니까?”

“그럼 누구겠느냐.”

이제야 사태파악이 좀 된 건지 점점 이수민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코끝과 눈가가 새빨개지면서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눈물콧물을 쏟아낸다.

“사, 사부님······?”

“그리 가서 미안했다. 내가 미안했구나.”

“사부님-!”

키는 이수민이 좀 더 컸지만 어떻게 포지션을 잡았는지 백운상 품에 쏙 안겼다.

등을 쓸어내려주며 백운상이 계속해서 말했다.

“내 그리 갔던 것이, 보고만 있던 것이 참으로 미안했어······.”

그리고 몇 번 잔이 오갔다.

이수민은 자기가 흘린 콧물을 마시는지 술을 마시는지 모를 지경이었고, 백운상은 이수민을 정답게 응시하며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문득 눈가를 좁히며 질책했다.

“천군아. 네 아직도 고기를 안 먹느냐?”

“······사부께서도 아시겠지만 요즘은 굳이 고기를 먹지 않아도 얼마든지 건강하게-”

“하가야. 내 부탁이 하나 있는데 이 아이 편식하는 것 좀 고치게 해다오.”

“그걸 왜 나한테 말하냐. 네가 해.”

“이제 머리통이 굵어졌다고 사부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을. 네 말이면 좀 낫지 않겠느냐?”

백운상이 피식 웃었고, 여전히 나와 애 엄마는 속이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좀 풀린 것 같아 겨우 본론을 꺼냈다.

“이제 설명해 봐라.”

“무엇을?”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에서 의문스러웠던 점을 하나씩 말했다.

“백가 네가 어떻게 환생을 했는지. 얼굴이 바뀌었는데 어떻게 내가 하무린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는지. 아까 ‘약속을 지켰다’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오늘 전에 지현이 엄마랑 어떤 이야기를 했었는지.”

“많기도 하구나.”

“아직 남았어. 여기 이수민이, 그러니까 네 제자가 환생한 것은 또 어떻게 알았고······.”

이를 꽉 깨물며 말을 이었다.

“우리 딸이 왜 사라졌는지. 왜 너와 나, 애 엄마랑 이수민. 이렇게 네 사람만 멀쩡한지.”

“지현이가 뭐!?”

이수민이 놀라서 외치는 말에 더욱 가슴이 답답해졌다.

겨우 마지막 질문까지 마쳤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모두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지. 운상이 네가 아는 거 전부 다 말해.”

길었던 질문들이 끝나고, 잠자코 듣고 있던 백운상이 입을 열었다.

“이미 보고 들었기에 아는 것이고, 원인을 행하지 않아 결과가 사라진 것이기에, 인과의 시작점 되는 이들이 이제 순리대로 이끌면 족함이야.”

“그런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알아들을 수 있게 제대로 설명을-”

“하가야. 이리 가까이 오거라.”

반론을 허락하지 않는 말이었다.

백운상이 이어서 애 엄마에게도 눈짓을 했고, 별로 넓지 않은 돗자리에 네 사람이 함께 앉았다.

“하가야. 숨기지 말고 답해다오. 근자에 신기한 힘을 얻은 일이 있지?”

백운상이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짚이는 게 있었다.

천유화에게 받아서 어제 시험해 본 마법.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제자 등에 손을 대고 한 번 해보거라.”

이수민 몸에 대고?

얘가 이세계로 가는 통로라도 되는 게 아니면 그걸 왜······.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냈지만 백운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 이상 자세히 말하면 모든 걸 다 망쳐버린다. 그런 뜻 같았다.

결국 이수민의 등에 손을 대고 마법을 운용했다.

“그대로 계속 있거라.”

백운상이 말하는 것과 동시에 새파란 불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저거 성화잖아. 저걸 왜 운상이가······.

나 모르게 뭐라고 말을 했는지 어느새 애 엄마가 백운상과 함께 성화를 감싸고 있었다.

어느새 마법을 운용하고 있는 내 감각으로도, 뭔가 잡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지?

이제는 커다란 나무보다도 크기가 커진 새파란 불꽃이 나를 중심으로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허공으로 바늘구멍 같은 작은 공간이 뚫렸다. 점점 크기를 넓혀간다.

“백가야, 이게 도대체······.”

백운상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네가 알던 대로 행하면 된다.”

또 영문 모를 소리.

분통이 터져서 외쳤다.

“너는 예전부터 항상-”

“이번에는······, 약속은 못하겠구나.”

내가 연이어 한 말이 들렸는지는 모르겠다.

푸른 불길과 이제 사람 하나가 드나들 정도로 커진 공간에서 나온 새하얀 빛이 온통 시야를 가렸고,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니까.

다만 백운상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똑똑히 들었다.

“잘 지내세요, 하 가가.” 라고.

분명 그렇게 말했다.

***

정도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절세의 고수.

남출어청藍出於靑 우철愚鐵은 떨리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렇잖아도 깜깜한 밤인 데다가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천장단애.

지금 막 그곳으로 떨어진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찾아서, 제대로 목을 베고 확실히 숨통을 끊어야만 했다.

우철은 잠시 등 뒤로 시선을 두었다.

시산혈해라는 말로도 부족한 참상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못해도 일류 이상의, 정파 무림의 일각을 담당하는 고수들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불구 아니면 시체였다. 잘린 팔다리와 목, 흩뿌려진 피가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의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작 십수 명에 불과했으며 사실은 우철 본인도 오른팔이 휑했다.

혈천무제 진천군의 공격을 받아내고 팔 한짝이라면 오히려 행운이라고 해야 할 일.

허나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가닥가닥 끊어진 기맥.

잘린 오른팔.

막대한 진원지기의 소모까지.

우철은 자신의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사실상 끝났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대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천하제일인 진천군이 확실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우철은 흐릿해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몸 여기저기에 매어둔 병장기들을 확인했다.

손도끼, 단검, 큰 박도, 백련정강으로 만든 장검 등 도합 십여 가지.

협검무제의 진신절기를 이어받지는 못했으나 병장기 하나하나에 그의 가르침이 서려 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났다. 가르치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연마하려고 애를 쓰는 터에 협검무제가 그를 두고 ‘어리석기가 꼭 쇳덩이 같구나.’라고 하였다.

그 후로 이름을 우철이라 바꾸었다. 그리 불리는 것이 좋았다.

우철이 짤막하게 명령했다.

“내려가서 추적한다.”

그나마 멀쩡한 이들이 놀라서 말했다.

“팔다리 근맥을 끊었고 단전과 심장이 상했습니다. 이미 죽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네가 봤나?”

흉흉한 눈빛에 모두 숨을 죽였다.

우철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내려가서 찾는다. 목을 베어서 가지고 돌아갈 것이다.”

그 살기에 질려 무인들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시진이 걸려 도착한 곳에 진천군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기력이 다한 우철이 의식을 잃은 가운데, 진천군의 시체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 떠밀려내려간 것이라고 결론이 내려졌다.

사흘 후, 혈천무제 진천군의 죽음이 온 강호에 알려졌다.

***

“이게 무슨······.”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무수히 많이 떠 있었다.

서울 하늘은커녕 어디 시골에 가도 이런 하늘은 이제 못 본다.

아니, 별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서울에 다시 갈 수 있느냐 마느냐, 그것부터가 문제였다.

지금 내 앞에 시체가 한 구 있었다.

시체라고 해야 하나?

아직 살아 있기는 하지만 곧 죽을 거다.

팔다리가 엉망으로 비틀려 있고, 단전 부근과 심장에 구멍이 뚫려서 지금도 피가 줄줄 새어나오고 있다.

이건 누가 와도 절대로 못 살린다.

의식을 찾지도 못하고 아마 이대로 죽겠지.

전에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보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천군아······.”

가끔 장난스레 부르던 의미가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이 녀석은 이수민도, 치코리타도 아니다.

그렇게 불리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그냥 진천군.

기억 속의 얼굴보다는 좀 더 성숙해 보이긴 했으나 그놈이 맞았다.

의식을 잃은 채 눈을 감고 있던 진천군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혈도를 짚어서 고통을 덜어주려고 해도, 기맥이 많이 상했으니 오히려 더 아프기만 할 거였다.

그냥 놔두더라도 삼십 분 안에 죽겠지만 차라리 일찍 숨을 거두게 해주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우.”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무겁게 결심을 내린 후 진천군에게 다가갔다.

손을 들어올리며 말을 건넸다.

“천군아, 미안하다······.”

그리고 사혈을 짚어주려던 그 순간.

<너······, 누구야?>

마치 하늘에서 말을 걸어온 듯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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