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약속은 지켰구나.
“오빠! 지현이가······.”
애 엄마가 황망한 얼굴을 하고 내게 달려왔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 애 엄마 어깨를 감쌌다. 애 엄마가 넋이 나간 듯이 말했다.
“갑자기, 인기척이 안 느껴져서 옆에 보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다시 한 번 카메라에 찍힌 사진을 봤다. 바뀐 것 하나 없이 아까 본 그대로였다. 지현이 자리만 텅 비어 있는 사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나랑 애 엄마가 눈치채지도 못하게 사라진다는 건······.
그런 건 불가능한데.
지현이한테 전화를 걸어봤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삐- 소리가 나면.>
아예 통화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뭐야, 이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납득이 안 되잖아.
“왜······? 나 때문에······?”
품에 안겨 있던 애 엄마 몸이 들썩거렸다.
울음기가 섞인, 영문 모를 중얼거림이 계속해서 새어나왔다.
“당신 진정 좀 하고. 잠깐만 앉아 있을래?”
돗자리를 펴둔 곳에 애 엄마를 앉혔다. 어제부터 불안해 보이더니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자 충격을 많이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럴수록 내가 침착해야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에 대해서 파악이 되어야 하니까.
우선 지현이가 자의로 사라졌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이건 곧바로 기각.
지현이 무공이나 마법 실력으로 나랑 애 엄마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타의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건데.
그러면 원인이 있을 거잖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성화였지만 그것도 너무 뜬금없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갑자기?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현이인가 싶어서 액정을 확인해 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김유진에게서 걸려온 전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며 전화를 받았다.
“네. 여보세요.”
인사치레도 없이 당황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렸다.
<혹시 우철 씨한테 연락 받으셨나요?>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싸했다.
내 생각대로라면 이건······.
“왜 그러십니까.”
<저랑 방금까지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갑자기 우철 씨가 안 보여요. 아무리 찾아도 없고 전화도 안 걸리고······.>
“우철이 없어진 지가 삼 분 정도 됐습니까?”
<네? 네. 근데 그걸 어떻게->
“김유진 씨는 일단 집에 들어가 계세요. 문제가 좀 생겼는데 정리가 되고 나서 연락 드리겠습니다.”
횡설수설하는 김유진을 짧게 설득한 뒤에 전화를 끊었다.
바로 다시 천유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받지 않았다.
내가 아는 환생한 놈들 번호로 모조리 다 걸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한 명.
얘가 전화를 받는 게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발신을 눌렀다.
그리고.
전화가 걸렸다.
<여보세요?>
“수민이냐?”
<목소리 들으면 몰라?>
이수민이 힐난조로 말했다.
안도감. 혹은 절망감.
목소리가 떨리는 걸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너 치코리타 맞지? 전생에 천마였고 우리 딸 사부였던.”
<자꾸 당연한 걸 왜 물어봐? 이상한 소리할 거면 지현이나 바꿔줘.>
“지현이······.”
그 이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 일 있을지도 몰라. 오늘 어디 나가지 말고 있어봐라.”
<뭐야. 무슨 일 생겼어?>
“아직은 잘 몰라. 일단 끊자.”
<잠깐만, 설명 좀 제대로->
전화기 붙잡고 있을 정신이 없어서 그냥 끊어버렸다.
이가 뿌드득 갈렸다.
눈앞에 닥친 상황이 너무 엿 같아서 말도 잘 안 나온다.
시발. 그러니까 이런 거잖아.
전생에 성화 폭발할 때 휘말려서 다른 세계로 갔던 사마군 애들.
같이 있다가 지금 시대로 환생한 정파 애들.
마지막으로 우리 딸까지.
그게 모두 다 없던 일이 됐다는 거잖아.
그 일 있기 전에 죽었던 이수민한테는 아무 일 없는 걸 보면 아마 내 예상이 맞을 거다.
이성을 잃는다고 나아질 일이 아니어서 간신히 침착함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속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다.
이게 지금 앞뒤가 맞는 건가?
그러면 나랑 애 엄마는 왜 멀쩡한 거지?
이수민이는 왜 그대로냐고.
환생이니 뭐니 난리가 난 근본적인 원인이 지현이가 전생에 겪은 일 때문이라면 다 같이 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 이제 좀 괜찮······.”
일단은 여기까지 결론 내린 걸 이야기하고 상의를 해봐야겠다 싶어서 애 엄마 쪽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어느새 진정을 좀 한 걸로 보이는 애 엄마가 무표정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표정이라기보다는······.
속에 들어찬 감정에 너무 침잠해서 겉으로 표현이 안 되는 모습 같았다.
분노, 미움, 살의. 그런 것들.
애 엄마가 시선을 올려다보며 내게 물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오빠 좀 알아낸 거 있어?”
“응. 추측이긴 하지만. 일단 당신 혹시 성화는 지금-”
애 엄마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내가 서 있는 곳 뒤편에 가닿은 시선.
나도 뒤를 돌아봤다.
“타샤?”
급하게 달려온 듯이 상기된 얼굴의 타샤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선이 애 엄마에게 갔다가 이내 나를 응시한다.
복잡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좌우로 돌린다.
마치 나와 애 엄마 둘만 있는 건지 확인하는 것처럼.
그리고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애 엄마가 손가락을 튕긴 소리.
그와 동시에 벚꽃을 보러 온 인파가 일제히, 가능한 빨리 이 자리에서 이탈하고 싶어하듯이 우리 주변에서 멀어져 갔다.
반경 일백 미터 안으로 이제 나와 애 엄마, 타샤 세 사람만이 남았다.
이어서 애 엄마가 가끔 치곤 하던 결계 같은 것이 둘러쳐지는 감각이 느껴졌고, 애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콰아아앙-!
폭발음 같은 굉음이 들렸을 때 이미 애 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타샤를 붙잡고 애 엄마가 소리쳤다.
“우리 딸한테 무슨 짓한 거야-!”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면서도 타샤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애 엄마가 울면서 외쳤다.
“하루만······, 내가 하루만 달라고 했잖아! 우리 지현이, 도대체 지현이한테 왜······? 빨리, 지금 당장 우리 딸 이 자리에 데리고 와. 안 그러면 너부터-”
위협과 애원을 오가는 외침.
한 손으로는 타샤의 어깨를 꽉 누르고 다른 한 손은 높게 올렸다.
그 손에 집적된 에너지는 정통으로 맞는다면 설령 나라고 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결국 애 엄마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향했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현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돌려줄 테니까······.”
그리고 타샤가 한없이 슬프고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이 내게는 보였다.
그 뒤에 고개를 떨군 애 엄마에게 들리지 않게 입 모양으로 건넨 말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돌려받을 일이 아니다’라고.
타샤는 그렇게 말했다.
애 엄마의 손을 풀어낸 타샤가 내게로 걸어왔다.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표정이 바뀌어나갔다.
슬픔과 미안함에서,
그리움으로,
이어서 반가움과 애정을 담아서,
내게 말했다.
“약속은 지켰구나.”
“약속?”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타샤와 나는 이런 상황에서 언급할 약속을 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다.
이런 말투. 이런 표정. 이런 몸짓으로 나를 대했던 이가, 예전에 한 명 있었다.
“전의 얼굴도 썩 괜찮았으나 지금도 역시 좋구나.”
“너······?”
“오랜만이다. 하가야.”
혼에 새겨져 잊을 수 없는 이름.
천마 백운상.
내 앞에서 미소 짓는 타샤와 그 얼굴이 겹쳐 보였다.
***
나탈리야가 눈앞에 마주한 남자.
전생에는 협검무제 하무린이라 불리었고 현생에는 유수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물었다.
“타샤······. 네가, 운상이라고······?”
“그래. 얼마 전에야 기억이 났구나.”
그리 말하면서 나탈리야는 유수현이 눈치채지 못하게, 심어로 차수희를 향해 말을 건넸다.
<혼란스러울 거란 거 알지만 잠시만 기다려줘요. 지현이 일은······, 나와 상관없다고는 못하지만 내가 한 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내 책임이니까······. 꼭 돌려놓을게요.>
차수희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나탈리야는 한 번 더 말했다.
<그리고 절대로, 오빠한테 내가 원래 차수희였다는 말은 하지 말고요.>
“······어째서?”
육성으로 차수희가 한 질문.
나탈리야는 짧게 답했다.
<그런 게 아니니까.>
거짓을 말한 것이 아니다.
나탈리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백운상’이었던 걸로 충분하다고.
그리고 복잡한 얼굴을 한 채로 이쪽을 바라보는 유수현과 다시 눈을 마주쳤다.
“무얼 그리 보느냐. 얼굴이 바뀌기는 했으나 이 용모로도 많이 봤거늘.”
“네가, 정말로······?”
“사실은 알고 있으면서 무얼 자꾸 묻는 것이야. 네놈 나이 서른 때 우리가 장강에서 놀았던 일까지 말해줘야 믿을 것이냐?”
“······.”
유수현이 침묵했고 나탈리야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 역용을 하고 사흘을 함께 보냈던 기억을 말하면 아마 많이 곤란할 것이었다.
그리고.
기억을 하나씩 떠올릴 때마다 나탈리야의 심장이 아려왔다.
‘참으로 질기고도 질긴 인연이니라······.’
신교의 교주 백운상.
스무 살까지 맡아두었던 차수희로서의 삶.
나탈리야라는 이름으로 얼굴을 맞댄 지금까지.
자신이 존재한 그 모든 순간이 눈앞의 사내를 위한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나탈리야는 애써 억눌렀다.
그건 이제 그녀에게 허락된 일이 아닐 테니까.
문득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차수희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탈리야는 또 한 번 마음을 억눌러야 했다.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워서,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은 마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구나······.’
아마도 벌을 받은 여파일 터였다.
그 전까지 쌓아왔던 모든 기억이 흐릿해지고 마침내 재로 화해버릴 만큼 오랜 유배.
등 뒤의 여인. 일월령이 어떤 마음을 품고 그것을 견뎌내었을지를 생각하면 나탈리야는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나탈리야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짊어졌기에, 그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던 일월령이 그런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 이제 남은 모든 책임은 응당 나탈리야 자신의 몫이어야 했으며,
지금부터라도 일월령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나탈리야는 그리 생각했다.
몸을 빼앗았다는 얼토당토않은 죄의식은 더이상 품지 않았으면.
유지현을 낳아서 길러낸 어머니로서, 유수현의 아내로서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사실 ‘아내’라는 것은 조금······, 아니, 사실은 굉장히 많이 화가 나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나탈리야는 그것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책무.
본래부터 존재했던 일을, 마땅히 그러했던 것으로 만드는 일.
그것만 끝내고 나면······.
‘그 후에는 이제 내 자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니······.’
물론 많이 슬펐다. 하지만 유수현과, 차수희와, 유지현. 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걸 위해서라면 그 정도쯤이야 나탈리야는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