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외전/ 흰 구름 위에서 (7)
***
하무린이 정신을 차린 건 해가 산어귀에 걸려 붉은빛을 뿜을 즈음이었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 생사대결을 벌이던 상대는 벌써 자취를 감춘 듯했고, 처참하게 죽어 있는 흑의인들의 시체만이 그가 겪은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거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서, 하무린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쫓아가봐야 백희령을 찾을 수는 없을 터. 우선은 묵고 있던 객잔으로 돌아가야 했다.
모든 것이 몸을 추스린 후에야 가능한 일이니까.
그것이 복수가 되었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피투성이로 돌아온 것을 보고 경악한 제갈경이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대체 누가 하가 네놈을, 그리고 누이는-”
“경아, 맹에 남겠다.”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다짐하는 듯한 말.
심부름꾼이 서신 한 장을 가지고 온 것은 그때쯤이었다. 받아보니 백희령의 필체였다.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제갈경을 내버려둔 채 서신을 읽었다.
내리 세 번을 반복해서 읽고, 떨리는 음성으로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어째서······.”
“하가야, 그게 누가 보낸 서신이냐?”
“경아. 누이를 찾았다.”
“뭐?”
하무린은 필요한 정보, 남궁영령이 갇혀 있다는 곳의 위치만을 전달했다.
곧장 다녀오겠다며 제갈경이 바삐 방을 나섰다.
그리고 홀로 남은 방에서 하무린은 백희령을 생각했다.
맹에 남겠다는 선언은 거짓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마음을 잘 알 수는 없었지만.
확실한 것이 하나 있었으니까.
“칼을 쥐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그때가 되면 어쩌면 알 수도 있으리라.
자신의 마음도, 백희령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 했는지도.
힘주어 들고 있었던 탓에 구겨지고 만 몇 장의 서신을 품속에 갈무리하며 하무린은 그날이 오기를 염원했다.
***
어두운 방에서, 천마 위지혁과 독대한 백희령이 인사를 건넸다.
“사부께서 마중을 보내주신 것은 잘 보았소이다.”
“그랬다면 다행이구나.”
이 시점에서 위지혁은 죽음을 각오했다.
무슨 기연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못 본 사이에 백희령의 경지가 일취월장해 있었다.
천마신공의 10성. 입신지경.
이제 위지혁과 백희령의 무력은 이전만큼 차이가 크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지금 이 방 바깥을 절정고수 수십 명이 포위하고 있었으니 승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위지혁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패배를 선언하려 했다.
“네 자질이 정녕 고금에 제일이라 할 만하구나. 앞으로 신교를-”
“그것 말씀이외다, 사부.”
백희령이 조소하며 말했다.
“사부께서 조금 더 맡아주심이 어떨까 함이 불초제자의 생각이온데 어찌 하시겠소이까.”
“그게 무슨.”
위지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구태여 왜 위협을 남겨둔다는 말인가.
하지만 백희령의 눈빛을 보며 깨달았다.
가치 없는 자를 보는 시선.
이제 그녀가 위지혁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같은 선상에 서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굴욕감을 애써 삼키며 위지혁이 물었다.
“그리 하여 네게 무슨 득이 있나.”
“제게도 득이 있고, 신교에도 득이 있소이다. 사부께 말씀드리기는 무거운 짐이니 그저 이 제자의 말대로 하시지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백희령은 방을 나섰다.
언젠가처럼 그믐날이었다.
흰 구름 사이로 실금이 그어진 것처럼 희미한 달빛을 바라보며, 백희령은 하무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구나.’
백희령은 자신을 잘 안다.
그녀 스스로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앞으로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는지를 잘 알았다.
지금 교주위를 물려받는다면 고작해야 십 년 세월.
역대를 통틀어 가장 강성한 신교로 만들어내는 데에 십 년이면 충분했다.
강성해진 신교는 외부로 나아가려 할 것이 자명하였으며,
그렇더라도 중원무림과 맞부딪쳐 승산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함을 백희령은 알았다.
강호유람을 하기 전이었다면 능히 오할 이상을 점쳤을 것이나 지금은 그리 생각지 않는 것이다.
‘하무린이 호락호락한 자는 아니니 말이야.’
하면 하무린을 죽여 삭초제근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또한 백희령이 그린 그림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마치 하무린에게 말을 걸 듯이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내 너를 강호의 태양으로 만들어주겠노라.’
직접적으로 손을 쓰는 것이야 불가능하나 결과적으로 하무린이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을 주는 정도는 그녀의 기량으로 차고 넘치는 일.
하무린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무림맹의 맹주 자리까지도 노려볼 수 있으리라.
배경과 신분이 일천한 자가 정파무림의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간다.
그것을 구파와 오가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음이니, 도리어 신교와 정파무림 사이는 평온할 터였다.
모든 것을 얻거나 모든 것을 잃는 도박보다는 향후 수십 년의 안정.
정인의 목숨을 도저히 해할 수 없었던 마음을, 천하를 바라보는 큰 뜻 안에 그리 숨겨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끄러운 꿈을 하나 품었다.
백희령은 그믐달 주위를 두른 흰 구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름을 새로 지어야겠구나, 라고.
백희령이 신교의 천마로, 하무린이 정파의 맹주로 오랜 세월을 지낸 후에.
두 사람이 마침내 무를 통해 신이 될 수 있다면.
‘그때는 구름 위를 노닐며 하 가가, 령 매. 그리 부를 수도 있겠지.’
낯부끄러운 생각에 백희령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새로 지은 이름을 입에 담아보았다.
“운상, 백운상이 좋겠구나.”
백운상白雲上. 흰 구름 위에서.
애달픈 마음을, 그녀는 그 이름 안에 품었다.
***
일월령이 팔짱을 끼고 눈을 지긋이 감았다.
백운상이 물었다.
“조사님, 무엇을 생각하시는지요.”
“잠깐, 잠깐만 기다려줘. 지금 고민 중이니까.”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둘이 도망을 치지 그랬냐!’라고 운상이 너한테 화낼 건지 결국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하가놈을 욕할지 고민 중이란 말야.”
“지금 둘을 한 번에 하셨군요.”
“이잇!”
일월령이 베개를 들어 백운성을 향해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가 방에 울렸다.
답답한 심정을 조금 가라앉힌 일월령이 말했다.
“그러면 처음 하가랑 만난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야?”
“네. 두 번째 얼굴을 맞댄 것은 일 년이 조금 더 지난 후의 일이지요. 그 이야기도 들으시겠습니까?”
“오늘은 속이 터질 것 같아서 그만 들을래. 뭐야. 그렇게 아쉬워하지 말구. 내일 들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신에 질문을 몇 가지 해도 될까?”
“무엇인지요?”
일월령이 궁금한 어조로 물었다.
“첫 번째 질문인데, 그러면 방금 이야기에 나온 다른 사람들은 그 후에 어찌 됐어?”
“제갈경은 그 후로 무림맹 총군사를 지냈습니다. 하가와는 세월이 지나면서 관계가 틀어졌다가 조금 좋아졌다가를 반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해연이라는 아이와 남궁가의 훼방꾼은 어떻게 됐는데?”
백운상은 조용히 왼팔을 들어보이며 답했다.
“이 팔이 연아의 목숨값입니다.”
“아······.”
“남궁영령은 오 년쯤 후에 하가를 살리려다 죽었다 하더군요.”
“그랬구나. 괜히 물어서 미안해.”
“아니요. 그런 시대였으니까요.”
단출한 대답을 끝으로 방 안의 공기가 가라앉았다.
백운상이 물었다.
“다른 질문은 무엇입니까?”
“그러면 하가가 맹주 자리에 오르고 운상이 네가 교주가 된 건 언제쯤인데?”
“제 나이가 스물셋에 하가는 스물넷이었을 때 세 번째로 만났습니다. 그때 몹시 추하게 싸움박질을 하였는데 둘 다 힘이 떨어져 땅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제가 제안을 했습니다.”
“맹주 자리를 한 번 노려보라고?”
백운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저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교주위를 가질 수 있었지만, 하가의 입지가 궤도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지요. 제가 서른 살쯤에 먼저 교주가 되었고, 그 후로 삼사 년이 지나서 하가도 맹주가 됐습니다. 보이지 않게 힘을 써주기는 했지만 하가의 신분으로 서른다섯에 무림맹주 직위에 오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위업이었지요.”
무엇이 그리도 자랑스러운지 백운상이 다소 들뜬 어조로 말했다.
듣는 입장인 일월령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하가놈 칭찬을?”
“사실을 말하였을 뿐입니다.”
“하가는 운상이 네가 이렇게 푼수데기인 것은 몰랐지?”
“이를 말씀입니까.”
“아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일월령이 의뭉스러운 눈치로 재차 물었다.
“내가 보기엔 운상이 너는 가능하면 오래 소교주로 있고 싶었던 것 같아. 교주보다는 운신이 훨씬 자유롭고 그러면 하가도 더 자주 볼 수 있었을 테니까. 내 말이 맞지?”
“크흠.”
말끝을 흐리는 백운상을 향해서 일월령이 호통을 쳤다.
“어서 대답해!”
“천하에 피를 가장 적게 흘리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부정은 안 하는구나?”
“사사로운 마음과 신교의 주인으로서 가야 할 길이 일치했으니 부끄러운 바를 행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 너 잘났다.”
“궁금하신 것은 그것이 전부이십니까?”
“아······.”
갑자기 일월령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백운상이 의문조로 불렀다.
“조사님?”
“사실 질문이 하나 더 있긴 한데.”
“개의치 마시고 여쭈시지요.”
“그으, 있잖아. 하가랑 숲에서 그-”
“······네.”
분위기가 급격히 싸늘해졌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어 일월령은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그거, 어땠어?”
“분명 조사님이 태어나신 것은 백 년도 전의 일이나 주무시지 않고 깨어계신 날만을 센다면 십 년을 겨우 넘는다고 하셨지요?”
“그렇긴 한데······. 그건 왜 물어봐?”
“하면 자세히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치사해.”
백운상의 단호한 말에 일월령이 입을 삐죽였다.
“그저,”
“그저?”
“제 이름과 비슷한 기분이었다고만 해두지요.”
“구름 위를, 어······.”
멍한 얼굴을 한 일월령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백운상이 말을 이었다.
“뿐만이 아닙니다. 하가와는 역용을 하고 술자리도 이따금 같이 하였는데, 때로는 거대한 파도와 뜨거운 화산이-”
“미안해. 안 들을래! 내가 잘못했어!”
얼굴이 시뻘개진 일월령이 귀를 막았다.
과장된 몸짓에 백운상이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일월령도 함께 웃었다.
다정하게 풀린 분위기에서 일월령은 생각했다.
‘오늘은 괜찮을지도 모르겠어.’
내친 김이라고 곧바로 말을 걸었다.
“운상아.”
“네. 조사님.”
“하가. 보고 싶지?”
“그렇기는 하나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본래도······, 그리 자주 보지는 못했으니까요.”
마음을 억누른 대답.
하지만 그것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을 기대하며 일월령이 제안했다.
“보러 갈래?”
“그것이 정녕 가능한 일입니까?”
“응. 아직까지는.”
백운상의 손을 부여잡고 일월령은 거처를 나섰다.
주위에 지나다니는 자가 없는지 경계를 끝마친 다음 땅바닥을 털었다.
“각자覺者가 아닌 혼은 본디 땅에서 소멸하는 것이 이치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가 정도 되면 아직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운상이 네가 올라온 그곳에.”
“하면-”
“말을 걸거나 모습을 볼 수는 없겠지만 느낄 수는 있을 거야. 해볼래?”
이 또한 들킨다면 벌을 받을 일이었으나 일월령은 들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네가 천하를 생각한 마음이 이루어낸 일이야.’
하위세계가 정도 이상으로 혼란스러워지거나 그러한 위험이 감지될 때 선계의 신격이 파견된다.
그리고 백운상이 있었던 그곳은 선계의 기준으로 지극히 평안했다.
일월령이 다녀간 이후로는 선계의 시선이 거의 닿은 적이 없을 만큼.
해서 백운상이 등선한 다음 일월령은 자신이 그곳의 관리를 맡겠다 선언했다.
별달리 신경을 써야 하는 곳도 아니었으니 권한을 받기도 용이했고, 오늘까지 기다린 것이다.
백운상의 정신이 안정되어서 다만 기쁜 마음으로 하무린의 혼과 닿을 수 있을 때까지.
“일단 내가 한 번 찾아볼게. 그런 다음에 운상이 너한테도 보여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조사님.”
“응!”
기쁜 마음으로 감사의 뜻을 받아들이며 일월령은 하계를 내려다보았다.
‘운상이가 등선한 곳이 저기였지?’
인세에서 황산이라고 부르는 곳.
그 산에서 하늘이 올려다보이는 황량한 땅.
아직 사람이 다녀가지 않았는지 깨어진 술병이 그대로 보였다.
일월령은 정신을 집중하고 높은 격에 이른 혼의 흔적을 짚어나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어?”
“조사님. 왜 그러시는지요.”
조심스러운 어조로 백운상이 물었다.
일월령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음으로 싸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어째서 아무런 흔적이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