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94화 (94/130)

94. 외전/ 흰 구름 위에서 (6)

하무린의 품에 안긴 채로 백희령이 물었다.

“가가,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축 늘어져 아무런 생각없이 밤하늘에 뜬 별의 개수를 세어보던 하무린이 헛기침을 한 번 한 뒤에 답했다.

“별이 무수히 떠 있으나 어느 하나도 령 매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했지.”

소저, 소협으로 서로를 칭하던 두 사람은 이제 다정한 연인으로 서로를 불렀다.

백희령이 하무린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물었다.

“정말인가요?”

“물론이지.”

올려다보는 얼굴이 너무도 예뻐보여서 하무린은 백희령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날이 밝으면 떠날 채비를 해야겠어.”

“네? 어디로 말씀이세요? 설마 무림맹으로 다시 돌아가신다는 뜻은······.”

화들짝 놀란 백희령을 보며 하무린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어디긴. 령 매가 나고자란 곳에 찾아뵙고 인사를 올리는 게 마땅한 도리 아니겠어?”

“아······.”

백희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곁의 개울물 소리를 배경삼아 한 쌍의 연인은 잠시간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하무린이 백희령의 머리칼을 쓸어주며 말했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나면 우선은 각자 묵던 곳으로 돌아가고, 낮에 다시 만나도록 해. 령 매도 나도 준비를 해야 하니까.”

“네, 그때는 가가께 저도 말씀을 드릴 것이 있어요.”

“응. 령 매는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마교의 천마라고 해도 나와 령 매를 갈라놓지 못할 터이니.”

“······그 말이 참말인가요?”

기실 뱉은 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한 오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하무린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네, 가가를 믿을게요.”

주체하지 못할 감정의 격류에 다시금 연인이 입을 맞추었고, 새벽 첫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무린과 백희령은 아쉬워하며 숲을 빠져나왔다.

백희령이 묵고 있던 객잔 근처까지 당도하는 시간이 너무도 빠르게 느껴졌다.

아쉬움을 애써 억누르며 하무린이 말했다.

“그러면 정오에 만나는 것으로 하고. 지금은 이만······.”

“잠깐만요, 가가!”

멀어지려 하는 하무린을 향해 백희령이 몇 발자국 달려왔다. 양팔로 하무린의 목을 휘감고는 뜨겁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입술을 떼어내면서 말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연모했어요.”

“응, 나도 그랬어.”

“부디 그것만은 알아주시길 바라요.”

표정이 흐트러질 것이 두려워 백희령은 그대로 몸을 돌려 객잔으로 향했다.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애달픈 열병이 점차 지워져 갔다.

객실의 문을 열 때는 이미 소천마 백희령의 얼굴이었다.

방 안을 훑은 백희령이 웃으며 말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두었거늘.”

곱게 펴둔 이부자리 곁에 경해연이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양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정말로 한숨도 자지 않은 듯이 눈자위가 퀭했다.

“간밤에 다녀오신 일은 어찌 되셨나이까.”

백희령이 어깨를 두드리며 장난스레 답했다.

“삭신이 쑤시는구나. 이런 것인 줄은 몰랐다.”

“······.”

“표정을 그리 하니 험악해 보이는구나. 그러지 말거라.”

이어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그러는 연이 네게 시킨 일은 어찌 되었느냐.”

“······주군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경해연이 자세를 바꿔 부복하며 답했다.

백희령은 그제서야 평소와 다른 점을 하나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진 보고.

백희령은 다만 한숨을 흘렸다.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만 같아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매듭을 풀어내기는커녕 완전히 타버리게 생겼구나······!”

경해연이 몸둘 바를 모르고 더욱 고개를 숙였다.

백희령의 입에서 한탄 섞인 말이 새어나왔다.

“차라리 엉킨 그대로 놓아두는 것만 못하리라······.”

***

하무린은 싱글벙글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며 객실 문을 활짝 열었다.

“경아, 아침이다! ······응?”

어제까지 함께 마시던 술병들만이 그를 맞이했다.

제갈경은 어디를 갔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수를 하러 간 것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하무린은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걸어두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생각했다.

‘조금 쉰 후에 맑은 정신으로 가야겠어. 령 매의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는 어찌할 것인가.

실은 하무린 스스로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맹을 떠나는 것이야 별일 아니지만 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령 매는 출신이 어쩌면······.’

무가의 자식이라고 확정을 내릴 수는 없으나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정파 무림맹 소속의 하무린과 쉬이 만날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

간밤에 농담이라고는 했지만 사마외도를 말하며 백희령의 얼굴에 스친 고뇌와 갈등을 하무린은 분명히 읽었다.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데는 백희령의 호위도 한몫 거들었다.

서른이 훨씬 못 되어 보이는 앳된 외모에 그만한 기도. 결코 예삿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마도 령 매는 꽤나 쟁쟁한 가문이나 문파의 여식일 터.’

하지만 하무린은 극복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령 매 같은 여인을 키워낸 분들이 삿된 일을 할 리는 없지.’

하무린은 그런 확신을 담아 불안감을 지워냈다.

그리고 생각했다.

‘경이와 누이께 지금은 말을 할 수 없겠구나.’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백희령에게 이야기를 들은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는 일.

하무린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상에 몸을 누였다.

‘아침이 되면 우선 누이께 감사를 드리고, 그리고······.’

생각을 이어나가던 하무린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객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다급한 얼굴을 한 제갈경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무린이 하품을 하며 말을 건넸다.

“경아, 어디를 다녀온 게야.”

“하가야, 혹시 누이가 다녀왔더냐?”

“영 누이?”

뜻밖의 이름에 하무린이 의문을 담아 물었다.

***

멀리 보이는 강 어귀의 다리.

하무린과 만나기로 약조했던 그곳을 바라보면서, 백희령은 매듭을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에 엉켜버려 누구도 풀어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매듭.

‘그것이 나의 고심이 될 줄은 몰랐거늘······.’

곁에 서 있던 경해연이 일렀다.

“주군. 이제 가셔야 합니다.”

“약조한 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잖니? 일각만 더 있겠다.”

“하오나-”

“먼발치에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구나.”

“······.”

하지만 일각 후에도 하무린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백희령은 그제서야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걸으면서 경해연에게 물었다.

“말한 대로 하였느냐.”

“네, 주군. 해가 질 때쯤 서신이 당도할 것입니다.”

“그래, 네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하였겠지.”

“······송구스럽습니다.”

“연이 네 잘못이 아니란다. 나와 하무린 사이의 일이니, 그곳에 다른 누군가의 공과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너는 그리 알거라.”

백희령과 경해연은 계속해서 걸었다.

열흘 가까이 지냈던 동정호와 주위의 경관이 이제는 작게만 보였다.

그리고 십여 리를 더 걸어 인가도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황량한 길에서, 흑색 무복을 입은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경해연이 칼을 뽑으며 말했다.

“주군, 물러서 계시지요.”

“아니, 되었다. 성치 않은데 무리하지 말거라.”

경해연을 손짓으로 물린 후 백희령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부께서 마중을 나오라 하시더냐?”

대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에 백희령이 경해연을 향해 말했다.

“연아, 천마신공이 자연지기를 다루는 무공인 것은 너도 알고 있으렷다.”

“네, 주군.”

그리고 백희령이 지금껏 이룩한 경지는 9성.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의 일이 있으니 이 또한 자연의 이치라. 이제야 그것을 알겠도다.”

경해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백희령의 몸에서 휘황찬란한 빛이 뿜어져나왔다.

고금제일의 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백희령조차 지난 일 년간 답보상태였던 천마신공 9성. 지금 백희령의 말은 그 너머를 보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천마신공의 10성이라 함은 또다른 의미를 가진다.

지닌 바 무를 통해 능히 신을 엿본다는 입신지경入神之境. 그 영역에 들어선 초인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비록 초입이라고는 하나 이제 고작 스무 살 나이로 입신경의 단초를 엿보았다니.

시천마 일월령 이후로 강호사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취였다.

경해연은 마음속으로 자책하던 것도 잊고 백희령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허공을 밟고 올라서 소맷자락을 떨쳐내는 모습.

온 천지의 자연지기가 백희령과 호응했다.

십여 명의 흑의인들은 백희령을 죽이기 위해 천마 위지혁이 보낸 자객.

결단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으나, 위지혁이 상정했던 것과 지금의 백희령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았다.

가장 처음 흑의인 한 명의 목숨을 거두는 데 걸린 시간은 일각여.

두 번째는 그보다 조금 더 짧았고, 세 번째는 더욱 짧았다.

채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심장이 꿰뚫리고 목이 달아난 열 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흰옷을 피로 적신 백희령이 지상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멀찍이서 달려오던 하무린과 눈을 마주쳤다.

하무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더듬거렸다.

“누이, 누이가 사라졌다 해서······, 찾으러 다니다 령 매와 약조한 시간이······.”

“가가께서 늦으신 것이 잘못이지요.”

백희령이 단조롭게 답했다.

“이게 어찌된······. 어떻게 령 매가······.”

하무린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궁영령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간밤에 그녀가 다녀갔을 곳들을 추적했다. 그중 한 곳에서 미세하게 남은 싸움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누구도 모르겠지만, 하무린만은 남궁영령의 흔적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무언가. 제갈경에게 그것을 알린 후에 다시 동정호 주변을 헤맸다.

약조한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고 기다리고 있었을 정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백희령이 묵고 있던 객잔을 찾아갔지만 이미 길을 나섰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해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로 약속장소에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달렸고, 마침내 백희령을 찾아낸 것이다.

피를 뿌리며 흑의인들의 목숨을 거두는 모습.

일전에 천마 위지혁에게서 보았던 것과 같은, 천마신공의 기세.

하무린은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다잡고 간신히 물었다.

“설명을······, 설명을 해줘.”

“보시는 바 그대로랍니다.”

“령 매가······.”

다른 해석의 여지는 없었다.

천마신교 천마일맥. 정파무림의 제일대적.

백희령이 침착하게 말했다.

“여기까지는 왜 찾아오신 건가요?”

“약조를, 령 매와 약조를 했으니-”

“그저 모르는 채로 끝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

“남궁영령이라고 했던가요? 그 사람이 말한 것이 틀리지는 않았지요. 누백 년을 거쳐 꼬인 매듭은 사람의 힘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랍니다.”

“······영 누이?”

그 이름에 하무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궁영령을 이겨낼 만한 사마외도의 고수.

백희령과 그 호위인 경해연은 천마신교의 사람.

그리고.

방금 싸움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던 경해연의 손.

손가락이 몇 마디 잘려 있었다.

여봐란 듯이 대검을 패용하고 다니는 남궁영령의 진신절기는 실은 허리춤에 매어둔 하늘거리는 연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생사대적을 만난다면 대검이 아닌 연검을 쓸 터였다.

남궁영령과 둘이서만 몰래 수련했기에 하무린은 그것을 안다.

그리고 폐가에서 발견했던, 연검이 스쳐 지나간 흔적.

하무린은 가슴속의 모든 분노와 충격을 폭발시키듯이 외쳤다.

“누이를 어찌하였는가-!”

외침과 동시에 땅을 박차고 경해연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검강을 머금고 짙푸르게 이글거리는 검이, 막혔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백희령의 손에 의해.

무감한 어조로, 백희령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신교의 사람에게 정파 무인이 어찌 되었는지를 묻는가.”

“······!”

백희령이 손을 떨쳐냈다.

충격을 어렵사리 해소하며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잡은 하무린이 다시 땅에 섰다.

“령 매!”

백희령이 코웃음을 쳤다.

“호칭이 자주도 바뀌는구나.”

“뭐라고?”

“처음은 소저. 그 후로는 백 소저. 간밤부터는······, 령 매.”

한 마디를 말할 때마다 백희령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하면 지금부터는······, 이제는 나를 무어라 부르겠는가.”

눈물에 젖어 붉어진 눈으로 하무린이 무어라 외쳤다.

백희령이 이미 알던 답이었다.

***

“하가놈! 하가놈! 어린 강아지!”

안고 있던 베개를 퍽퍽 두들기며 일월령이 소리쳤다.

백운상이 난감해하며 타일렀다.

“조사님, 진정하시지요.”

“이번에는 더 진정 못해! 그 전까지 그렇게 죽고 못 살 듯이 굴었으면서 어떻게 손바닥 뒤집듯이 마종이라고 할 수가 있어? 하무린 이 나쁜놈!”

“그것이야······, 하가의 입장에서는 그리 할 만도 했지요.”

“운상이 너도 답답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아! 안 죽였으면 안 죽였다, 제압해서 가둬두기만 한 거고 저녁에 당도할 서신까지 미리 보냈다. 이렇게 말을 하면 되잖아! 왜 안 그런 건데? 대체 왜?”

일월령이 이번에는 화살을 백운상 쪽으로 돌렸다.

백운상이 멋쩍은 듯이 머리칼을 매만졌다.

“두 번째 만났을 때 하가놈이 처음 한 질문도 그것이었습니다.”

“당연한 거 아냐? 듣는 나도 열이 뻗치는데!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빙빙 꼬던 백운상이 볼멘소리로 답했다.

“오해를 푼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그래도 수습은 해야 할 거 아냐!”

“게다가······.”

“게다가?”

“제 앞에서 그놈의 누이를 몇 번이나 찾길래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만······.”

주저하며 백운상이 실토했다.

일월령이 도끼눈을 뜨며 말했다.

“그게 본심이었구나?”

“······저도 그때는 어렸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래서 안 돼. 어휴······.”

일월령이 흘겨보며 핀잔을 줬다.

백운상은 할 말이 없어 딴 곳만 쳐다봤다.

그리고 침상의 구석자리에서 한참을 구시렁거리던 일월령이 다시 다가와 물었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백운상이 다소 의기양양한 어조로 답했다.

“일단, 흠씬 두들겨 패줬습니다. 그때는 제가 하가보다 싸움을 잘했으니까요.”

“너네 둘······. 들으면 들을수록 똑같은 애들끼리 잘 만난 거 같아······.”

일월령이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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