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외전/ 흰 구름 위에서 (4)
***
술을 한 모금 들이킨 하무린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하려고 했다.
“정말 고맙-”
“한 번만 더 말하면 서른 번째다. 제발 부탁이니 이제 그만 좀 하거라!”
맞은편에 앉은 제갈경이 질린다는 표정으로 역정을 냈다.
“고마우니 고맙다고 하는 것이지.”
“내 말하지 않았느냐. 골탕 좀 먹어보라고 되는대로 지껄인 것이었다고!”
“허나 백 소저께서 그리 좋아하셨는데?”
그로서는 눈앞의 은인이 왜 이리도 질색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루터에서 백희령과 처음 만난 이후, 하무린은 줄곧 제갈경이 일러주는 바를 충실히 이행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의 ‘흩날려라, 천 개의 꽃잎 작전’.
뱃놀이 중에 검격으로 수십 장의 강물을 갈라놓았던 ‘검세의 기적 작전’.
고리타분한 옛 방식 따위가 아니라 ‘백’ ‘희’ ‘령’ 석 자로 시를 지은, 파격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삼행시 작전’까지.
뭐든지 했다 하면 백희령이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던 것이다.
“자, 그러지 말고 한 잔 더 받거라. 정말로 고마워서 그래.”
“이해할 수가 없구나. 어찌 그따위 수작질이 먹힌 것이지? 도저히 그럴 수가 없는 것인데······.”
괴롭게 중얼거리는 제갈경을 바라보며 하무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위풍당당한 몸짓이었다.
“거 될 놈은 절벽이 아니라 바다에 떨어져도 기연을 얻는다지 않더냐. 으하하핫!”
“반박을 할 수가 없어 더욱 화가 치솟는구나.”
심술 가득하게 입을 우물거리던 제갈경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하가야.”
“왜 그러냐. 안주 좀 더 시켜주랴?”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 백 소저 말이다.”
“백 소저? 나의 백 소저는 왜?”
“‘나의 백 소저’는 개뿔. 지랄이 이리도 짠데 안주가 무에 필요 있겠- 아얏!”
하무린이 손으로 튕겨낸 물방울이 제갈경의 얼굴에 직격했다.
흡사 자그마한 화포 같은 위력에 제갈경이 비명을 질렀다.
“이 천하의 깡패 같은 놈아!”
“나의 백 소저를 나의 백 소저라고 하는데 네놈이 왜 구시렁거려. 아무튼 꺼낸 이야기는 끝까지 해보아라.”
하무린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쓰잘데기 없는 말이 나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인 듯이 여전히 손에 물기가 흥건했다.
제갈경은 침을 꿀꺽 삼킨 후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는 나도 얼굴 보았잖냐.”
“그랬지?”
제갈경이 하도 궁금하다고 졸라대기에 사흘 전쯤 딱 한 번 백희령과 만나는 자리에 데려간 적이 있기는 했다. 물론 반 시진이 지나기도 전에 돌려보냈지만.
백희령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하무린 자신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갈경이 궁금해하는 어조로 물었다.
“솔직히······, 그리도 이쁘냐?”
“그게 무슨 소리야.”
“물론 용모가 가히 선녀처럼 아름답기는 하였지. 기품도 있고, 사람이 배운 것도 많아 보였고. 나 역시도 여태 그만한 가인을 본 적은 없다. 능히 옛사람보다 낫다 할 만했지.”
“알긴 아는구나. 그래서?”
“하지만 네놈이 이만큼이나 넋이 나갈 정도냐고 한다면, 으음.”
이야기를 이어가던 제갈경이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침음성을 냈다.
하지만 듣고 있던 하무린은 다른 의미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경아. 네놈 똑똑한 것은 내 익히 아는 바이나 이번 것은 말이 앞뒤가 안 맞지 않느냐?”
“그러니까! 백 소저한테 이 정도로 정신이 나갈 거였으면! 지금껏 달려드는 여인들 손 한 번은 잡아봤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이 말이다!”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백 소저보다야 못해도 몇 명은 그리 빠지는 인물들도 아니었잖냐.”
제갈경이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갔다.
“사천 갔을 때 당문의 처자. 비무행 마지막에 보타암 검후. 그리고······.”
처음 한 손만을 들고 시작했던 제갈경의 말은 양손의 열 손가락을 다 꼽고서야 끝이 났다.
“발가락까지 꼽아도 되겠으나 그것은 너무 추한 것 같아 이까지만 하겠다. 대강 생각해도 열 명은 넘겠구나.”
“물론, 경이 네 말대로 뛰어난 여협들이기는 하였지.”
“그렇지? 네놈도 그리 생각하지? 한데 어째서-”
“하지만 거절한다.”
하무린이 단호하게 선언했다.
“그 여협들과 백 소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어. 무어라 해야 할까. 그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되었다. 말을 한 내가 멍청했구나.”
제갈경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술병을 기울였다.
입가에 묻은 술을 닦아내며 제갈경이 물었다.
“하면 어찌할 테냐?”
“무엇을?”
“아직 이름과 나이만 알지 않느냐? 열흘 안에 맹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찌할 것이냐는 말이야.”
제갈경의 말대로였다.
최대한 길게 얻은 한 달여의 휴가.
무림맹 본단이 있는 안휘성 남단에서 이곳 동정호까지 오는 데만 닷새가 걸렸다.
오늘까지 열흘을 유람했고, 돌아가는 데 소요될 닷새를 뺀다면 기껏해야 열흘밖에는 남지 않는다.
허나 아직도, 하무린은 백희령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이다.
하무린 본인은 백희령에 대한 연모의 정을 여과없이 드러냈고 백희령도 그리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칠주야를 넘게 붙어 있으면서 알아낸 신상명세라고는 백희령 이름 석자와 올해 스무 살이 되었다는 것뿐. 그 외의 모든 것이 불명이었다.
물론 생각해놓은 방도가 있기는 하였다.
“경아. 화내지 말고 들어다오.”
“일단 말부터 하거라.”
“나 그냥 대주 때려칠까?”
“뭐!?”
“자세히는 모르나 백 소저가 형제자매 없이 홀로 자란 듯하더라. 내가 그 집 사위로 들어가면-”
“이 미친놈아!”
어찌나 놀랐던지 제갈경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하가야. 제정신이냐? 지금 여인 때문에-”
“뭘 그리 역정을 내느냐. 애당초 나와는 맞지도 않는 일이었는데. 비무행만 끝내고 대충 은거나 하려고 했던 것을 재수없이 일이 꼬여서 이리 된 것이지.”
손바닥을 툭툭 털며 하무린이 말했다.
“일 년이나 했으면 오래도 했다. 스스로를 칭찬해주어도 부족할 지경이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내가 일 갑자를 맹에 있어봐라. 맹주는커녕, 허울뿐인 거창한 명함이나 달고 칼잡이 노릇밖에 더하겠느냐?”
“······!”
“경아. 구태여 권세를 원하지 않을 뿐이지 내가 바보는 아니다.”
“알고 있다.”
복잡한 얼굴을 한 제갈경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괜시리 미안해져서 하무린은 어깨를 두들겨줬다.
“왜 네가 풀이 죽어, 죽기는. 맹주니 뭐니 귀찮은 일은 하라고 감투를 주어도 하기 싫거늘. 네가 마음 쓸 일이 아니야.”
“······그래서 정말로 관두겠다고?”
“일단 백 소저와 이야기는 한 번 해봐야겠지. 관둔다고 해도 네놈 보러 해마다 찾아올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나중에 군사니 맹주니 높은 자리 올라가면 바쁘다고 박대하지나 말거라.”
“찾아오고 나서나 말해라. 망할놈아.”
이후로 말없이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안주도 없이 독주를 들이키던 제갈경이 꼬인 혀로 중얼거렸다. 다소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였다.
“맹에 돌아가면 돈부터 빼야겠구만.”
“무슨 돈을 뺀다는 말이냐?”
“내기를 걸어놓은 게 있거든.”
“그러니까 무슨 내기.”
“결국 네놈이 누구와 짝짜꿍하게 될지. 꽤 큰 내기판이 걸려 있었다 이 말이다.”
“나원, 그리 할 짓들이 없는가?”
어처구니가 없어 하무린이 중얼거렸다.
제갈경이 손끝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나는 손해 보는 상황은 만들지 말자는 주의라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에 걸었는데······. 계산이 틀렸구나.”
“네놈은 어디 걸었는데?”
“그건 말 못해준다.”
“나를 두고 한 내기인데 왜 말을 못해줘. 어서 말해보아라.”
“아니, 절대로 말 못해.”
“이래도?”
하무린이 주먹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제갈경은 여전히 결사적인 어조로 고개를 붕붕 흔들며 답했다.
“세상에는 네놈 주먹보다도 무서운 것이 있지. 나는 말 못한다.”
“됐다. 싫으면 말거라.”
하무린이 주먹을 내리며 말했다.
어차피 시답잖은 내기판. 크게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도리어 백희령이라는 정인이 있는데 그런 곳에 흥미를 두는 것이 죄악일 터.
그리고.
다시 술잔을 몇 번 부딪친 후, 무언가를 골몰하던 제갈경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하가야.”
“왜 부르냐.”
“좋다. 맹을 관둔다고 치자. 네가 관둔다고 하면 말릴 수 있는 이가 없겠지.”
“없지?”
“한 명. 단 한 명만 빼고.”
“누구?”
하무린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제갈경의 말마따나 자신이 박차고 나간다고 하면 말릴 수 있는 이가 없다.
맹에는 빚진 것도 없었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면 떨쳐내면 그만이다.
한데 제갈경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이름이 거론됐다.
“영 누이는 어찌할 테야.”
“여기서 영 누이가 왜 나와?”
제갈경과 하무린이 공통적으로 누이라 살갑게 부르는 이는 무림맹 내에 단 한 명밖에 없다.
하무린 본인이 대주로 있는 용봉대의 일 조장.
대남궁세가 직계 남궁영령.
올해 나이는 스물셋. 무공이나 지모는 물론이고 지닌바 아름다움이 하늘 사람과 같다는 정파제일의 여협을 일컬음이었다.
그리고.
하무린이 알기로는 이런 맥락에서 나올 이름은 아니었다.
“누이가 말리지는 않을 텐데? 아쉬워야 하겠다만 응원해 줄 것이야.”
“······모른다. 네놈은 영 누이를 몰라······.”
“내가 네놈보다 누이랑 친해. 이 얼빠진 놈아.”
남궁영령은 하무린으로서는 드물게도 마음 편히 대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자질도 뛰어나 대화가 잘 통했고, 하무린 자신에게 연심을 품지 않았다.
일례로 조금 전 열거되었던 이름에서도 남궁영령은 빠져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두어 번 흔든 제갈경이 단호히 말했다.
“모르겠다. 나는 모르는 일이니 네놈이 알아서 하거라. 나는 분명히 말렸으니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어디 가서 빠뜨리지 말고 이야기해야-”
“네놈 조잘대는 것이 그야말로 촉새 같구나! 술이나 더 마시거라.”
“끄응.”
“그리고 내일도 백 소저와 약조를 했는데······.”
하무린이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바로 눈치를 챈 제갈경이 말했다.
“은자 한 냥이면 되겠느냐?”
“······혹시 모르니 두 냥.”
“날강도 같은 놈.”
그날의 술자리 역시도 술병이 몇 병이나 더 쌓이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바깥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하무린은 눈을 떴다.
나무로 만들어놓은 창을 열어보니 객잔 마당이 소란스러웠다.
‘무슨 난리라도 난 것인가?’
하무린이 아래쪽을 살폈다.
그리고 한 명의 여인을 발견했다.
먼 길을 달려온 듯한 여인.
행색이 초라했다.
수수한 무복을 입고 손에는 커다란 봇짐을 하나 들고 있었다.
머리칼은 별다른 치장없이 뒤로 질끈 묶었고, 모래바람을 맞은 듯이 얼굴이 먼지투성이였다.
그리고 등 뒤로 차고 있는 어린아이 키만한 대검.
영락없이 강호를 오가는 무인의 행색이었으나······,
압도적인 용모가 그 모든 것을 가려버렸다.
하무린은 여인의 이름을 알았고, 반갑게 외쳤다.
“영 누이!”
여인이 시선을 올려다봤다. 눈을 마주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 올라갈 테니 기다리거라!”
하무린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창을 닫았다.
“경아, 일어나봐- 너 지금 뭐하는 게냐?”
잠을 깨우려고 했던 제갈경이 어느새 일어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손으로 자기 입을 두드리는 이상한 행동까지 반복하면서 무언가를 계속 외쳤다.
“이놈의 입! 이놈의 입방정!”
“······미친놈인가?”
하무린이 안타까운 눈길로 중얼거렸다.
***
다소 분개한 어조로 일월령이 외쳤다.
“나 알겠어! 그 남궁영령인가 뭔가가 사실은 속이 엄청 시커먼 인간이었던 거지? 그래서 우리 운상이랑 하가 사이를 이간질하고 막 훼방놓고 그랬던 거지? 나쁜 계집애!”
일월령의 감정에 호응해 바닥의 꽃잎들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백운상이 달래듯이 말했다.
“조사님, 진정하시지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잘 되고 있는 연인을 천하의 못된 심보로다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응?”
격분하던 것도 잊고 일월령이 백운상을 바라봤다.
씁쓸하게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허공에 떠 있다가 다시 내려앉은 꽃잎들이 백운상이 입은 의복에 닿았다.
꽃잎들을 털어내며 백운상이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어찌 된 일인지. 어찌하여 그리 되어야만 했는지.”
“······”
“저로서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