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91화 (91/130)

91. 외전/ 흰 구름 위에서 (3)

하무린으로서는 스물한 해를 살아오며 난생 처음 겪는 충격이었다.

이리저리 쏘다닌 덕분에 여인은 많이 보았다. 자신에게 호감을 표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데도 지금까지 인연이 없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

제갈경이 이따금 핀잔을 준 것처럼······, 그저 눈이 너무 높았던 탓이다.

강호행 중에, 또 무림맹 내에서 알게 된 아름다운 여협들.

‘뭇 사내들에게 능히 구애받을 만하다’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하지만 가슴으로 와닿지가 않으니 하무린 자신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해서 보러 간 것이었다. 천하제일미쯤 되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었기에.

그리고.

기대한 것처럼 확실히 다르긴 했다.

도리어 너무 달라서 문제였다.

하무린이 제갈경의 옷깃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경아, 현기증이 난단 말이다. 어서 알려달라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대책을 세워야-”

“꾸짖을 갈-!”

“······뭐?”

하도 어이가 없어 옷깃을 쥔 손을 풀어내며 하무린이 물었다. 덕분에 거동의 자유를 되찾은 제갈경이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침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내 보기에 네놈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영락없이 입마에 든 놈 같구나.”

“맞아. 입마에 들긴 했- 어딜 도망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문을 향해 달음박질치려는 제갈경을 하무린이 낚아챘다.

다시 질질 끌려서 침상으로 돌아온 제갈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농으로라도 그런 소리는 말거라. 네놈이 주화입마 들면 그건 재앙이다, 재앙.”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무공으로 말하자면 이것을 능히 입마라고 할 것이야.”

한 호흡을 쉬고는 하무린이 말을 이었다.

“그래. 바로 연모戀慕라는 이름의-”

“숙취가 다시 올라올 것 같으니 그만 닥치거라.”

제갈경이 다급히 손을 내뻗으며 제지했다.

“처음부터 하나씩 말해보아라. 누구냐. 방금 만나고 온 게야? 이뻤냐?”

“이뻤지, 이뻤고말고. 허나 단지 용모의 아름다움만으로 이리 허둥대지는 않아. 혼의 떨림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말이다.”

“미친 새끼······.”

퍼억!

“아무튼 들어보거라.”

주먹을 다시 거둔 하무린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매화자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곧장 나룻터로 향했다.

사나흘 전부터 이 시간쯤에는 매일같이 뱃놀이를 즐긴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과연 시커먼 사내놈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하무린은 대강 끄트머리쯤에 자리를 잡았다.

우선 눈으로 확인부터 해보고, 그저 그렇다면 도로 돌아가서 술이나 한 병 더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 소저와 눈을 마주친 순간 바로 알았다. 구태여 술 따위를 마실 필요도 없이, 나는 이미 취해버렸다는 사실-”

“구와아아악!”

“뒷간에 갈 테냐? 등이라도 두들겨주랴?”

“네놈이 개소리만 더 지껄이지 않아도 그럴 일 없다······!”

시뻘개진 눈으로 제갈경이 쏘아붙였다.

하무린이 변명인 듯 이죽거렸다.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네놈이 불쌍하구나.”

“잡소리는 제발 집어치우고 사실만 말하거라. 가능한 짧고 간결하게.”

머쓱해져 헛기침을 하고는 하무린이 말을 이었다.

“실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건 또 무슨 개방 거지 같은 소리야.”

“통성명을 했지. 소저의 방명도 들었다. 내일 어디에서 만나기로 한 것도 기억이 나는데······, 솔직히 머릿속이 멍해서 내가 정확히 무어라 말을 하고 소저께 무어라 말을 들었는지를 잘 모르겠다, 이 말이다.”

“아주 중증이구만. 약방에 먼저 가야겠어.”

“경아, 내가 무슨 실수를 했으면 어찌하느냐? ······그러고 보니!”

불안한 어조로 묻던 하무린의 얼굴이 갑자기 격하게 일그러졌다.

제갈경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뭐냐. 사실은 꿈을 꾼 것이었다고?”

“그게 아니라! 생각해 보니 소저의 곁에 호위가 한 명 있었던 것 같다. 머리칼이 긴 여인이었는데 하도 정신이 없어서 신경을 아예 못 썼어. 혹여 무례한 작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거 내가 아주 큰 실수를 한 게 아니

냐, 이 말이다.”

“미칠 광-!”

분노에 찬 제갈경의 기백에 놀라 하무린이 흠칫 몸을 굳혔다.

혀를 끌끌 차며 제갈경이 말했다.

“이곳이 맹이 아닌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 이 모습을 맹 사람들이 알았다면 네놈이 받는 연서의 수가 반의 반절로 줄었을 텐데.”

“······그리 하면 나야 편하고 좋은 것을.”

“되었다. 일단 자꾸만 소저, 소저 하지 말고 이름부터 말하거라. 그건 기억을 한다면서?”

“말하기 싫다.”

하무린이 즉각 답했다.

제갈경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어째서?”

“듣자 하니 아직 그 소저의 방명을 들은 이가 아무도 없다더구나. 오직 나만이 안다는 뜻이지. 한데 그걸 왜 네놈에게 알려야 하지? 혹여 소저께서 저어하실까 두려울뿐더러, 그냥 내가 알려주기가 싫다. 나만 알고 있을 것

이야.”

“저, 저런 머저리 같은 놈을 봤나!”

머리로 피가 솟는 게 느껴져 제갈경은 삿대질을 했다.

아랑곳않고 하무린이 재촉했다.

“네놈은 그저 어찌하면 내가 소저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그 방도만 뱉어내면 되는 것이야. 대주로서 명이니 이 조장은 명을 받들거라.”

“가주되고 나면 내가 네 위야, 이 멍청한 놈아.”

이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개세의 무공을 지녔다 한들 출신배경이 없다시피 한 하무린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이미 정해져 있다.

정파제일고수라는 허울과, 무림맹 내의 명예직.

만약 뛰쳐나가 스스로 일문을 창설한다면?

일이 아주 잘 풀린다는 가정하에, 오가와 구파에 버금가는 문파의 장문인 정도.

그나마도 하무린 본인이 죽은 후로 채 십 년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무공의 고강함으로 지위가 결정된다면 한 세대마다 천자의 성씨가 바뀌었을 터이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하지만 하무린은 대수롭잖은 듯이 귀를 후비적댔다.

“그거야 나중 일이고 지금은 내가 상관이잖냐. 이 조장은 어서 명에 따르도록 해라.”

“······그래. 나중의 일이긴 하지.”

해서 제갈경은 하무린이 보여주는 대수롭잖음이 신기했다.

이따금은 존경스러운 마음까지 들었으며, 그보다 드물게 질시를 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제갈경이 심술궂게 생각했다.

그가 판단하기에는 이미 상황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이름을 모른다는데 하무린에게만 알려주었다.

내일 만나기로 약조를 했다.

이쯤되면 대책을 마련하니 어쩌니 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래 연심이라는 것이 총기를 가리는 법이지.’

이놈은 지금 정신이 나가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분도 잘 못하고 있다.

어차피 잘 될 것이니 약간의 장난은 쳐도 무방하리라.

제갈경이 웃음을 감추며 입을 뗐다.

“내 말대로만 하면 모든 일이 술술 풀릴 것이다. 나중에 술이나 거하게 한 잔 사거라.”

‘물론 울면서 돌아온다면 내 쪽에서 술을 사줄 것이니라······.’

음흉한 속내를 감추며 제갈경이 말을 이었다.

***

벌써 시들어 가는 들꽃 한 송이를 들고, 경해연은 생각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한 곳에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후훗, 푸흣.”

곁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찬가지로 손에 꽃을 한 송이 든 백희령이 웃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 달빛을 받은 백희령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경해연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교내에서 보던 모습보다도 훨씬 더.

“지금이라도 명을 내려주십시오. 주군께 무례를 저지른 그놈에게 마땅한 벌을-”

“왜 그러느냐. 너도 받아놓고서는.”

“······지금이라도 버리겠습니다.”

“버릴 거면 내게 주는 것이 어떠니?”

“······나중에 버리겠습니다.”

바로 일각 전까지 경해연과 백희령은 정파의 후기지수 하무린과 자리를 함께했다.

잘 만들어진 누각 앞에서 만난 하무린은 번듯한 태도로 그녀들을 안내했다.

미리 예약을 해놓았다는 곳은 가장 높은 4층.

그리고 올라가 보니, 온통 꽃잔치였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갖가지 꽃잎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중앙으로 갈수록 꽃잎이 수북했다.

계단을 먼저 올라선 하무린이 의기양양한 걸음걸이로 4층의 정 가운데로 걸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백희령과 경해연 쪽을 바라보더니, 기름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조로 말했다.

‘이 많은 꽃들이 백 소저를 맞이하니 빛을 잃는군요.’라고.

물론 꽃들은 아름다웠다.

망발을 지껄이는 하무린의 뺀질한 얼굴도 크게 나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추했다.

압도적으로 추했다.

도저히 눈뜨고 보기 힘든 참상에 경해연은 백희령을 데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박차려 했다.

하지만.

주군인 백희령은 환한 웃음을 짓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와아, 저를 위해 준비하신 건가요?’

‘백 소저의 아름다움에 혹여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일 뿐입니다.’

어디서 나왔는지 어느새 하무린의 손에는 흰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마침내 꽃이 백희령의 손에 건네질 때 경해연은 도저히 참기가 힘들어 눈을 꼭 감아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백희령의 손에 곱게 들려 있는 그 꽃송이.

“연아, 왜 그러니? 나는 이리도 아름다운 꽃을 받았는데 네게는 그보다 못한 것을 주었다고 역정을 내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무 그러지 말거라. 어제는 네게 신경을 못 써서 미안했다고 하지 않느냐.”

“그런 놈이 신경을 쓰건 말건 소신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잠시 단어를 고른 다음 경해연이 말했다.

“정말로 그 얼빠진 놈을 신교로 데려가실 작정이십니까?”

“왜 아니겠니.”

백희령이 어째서 그런 걸 묻냐는 듯이 선선히 답했다.

경해연은 복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는 짓거리를 보아하니 소문이 과장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주군이 결정하신 일에 입을 대는 불충을 용서하소서. 허나 한 번 정도는 시험을 해 보시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알아보기는 해야 하겠지. 허나 그것은 그것이고,”

다시 한 번 흰꽃으로 시선을 주며 백희령이 말했다.

“이 꽃을 가져온 마음만은 참으로 가상하지 않느냐.”

경해연은 불안했다.

혹여나.

그럴 일은 만에 하나라도 없겠지만 혹여라도, 하늘같은 주군이 정파놈에게 관심을 두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차마 입밖으로 꺼내기도 불경한 마음.

허나 얼굴에 드러나고 말았나 보다.

백희령이 장난스레 말했다.

“왜 그러느냐. 내가 그자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그리도 이상하더냐?”

“주군!”

경해연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 모습에 백희령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낭랑한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렸다.

“걱정 말거라. 자질을 알아보고, 의중을 알아본 후에 어느 하나라도 족하지 않는다면 목을 칠 것이야. 비록 유람을 온 것이기는 하나 놓아두면 신교에 해가 될 자를 살려둘 이유도 없겠지.”

얼핏 듣기에는 이상한 말이었다.

관심이 간다고 한 사내의 목숨을 거두겠다니.

하지만 백희령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 않니.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라고.”

“······.”

“볼수록 꽃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달빛에 꽃잎을 대어보며 백희령이 중얼거렸다.

***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어?”

얇은 이불을 몸에 둘러멘 일월령이 재촉하듯이 물었다.

방 안은 어느새 꽃잎으로 가득했다.

백운상의 이야기를 듣던 일월령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곁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신 백운상이 답했다.

“그 후로 칠주야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만났습니다.”

“만나서 뭘 했는데?”

“함께 뱃놀이도 하고,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짓기도 하고, 하가놈이 칼춤을 잘 추는데 그것을 구경하기도 했지요.”

백운상이 한 마디를 더했다.

“저희가 제법 죽이 잘 맞았습니다.”

“응. 듣기만 해도 그랬던 것 같아. 천생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일월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로 첫눈에 반했고, 만나보니 잘 맞았다.

이것이 천생연분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도 일월령은 불안한 생각을 했다.

정말로 그리 행복하기만 했다면,

그랬다면 지금 일이 이렇게 흘러왔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백운상이 말끝을 흐렸다.

“글쎄요······. 저와 하가놈만을 본다면 저도 그리 여깁니다만,”

“아······.”

“오히려 하늘이 갈라놓으려고 악을 쓴 것이 아닌가. 지금에 와서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쓴웃음과 함께 백운상이 이야기를 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