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외전/ 흰 구름 위에서 (2)
하무린은 저도 모르게 매화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천하제일미. 쉬이 들을 수 있는 표현은 아니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용모이길래 저리 호들갑이지?’
그가 알기로 현 강호에서 인물과 세력을 막론하고 천하제일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둘뿐이었다.
바로 십만대산의 마교와······,
‘그리고 나.’
천하제일기재라 불리는 하무린 자신.
해서 천하제일미라 한다면, 예쁜 걸로 쳤을 때 자신의 무공 자질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나온 결론이 우스워 하무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만큼 예쁘면 그게 어디 사람인가? 하계로 놀러온 선녀쯤 되어야 가능할 일이다.
하무린은 점소이를 불러 철전 몇 개를 건넸다.
“여기 내 친구놈인데, 술 좀 깨운 뒤에 묵을 방 있으면 데려가주시게. 경아! 이놈아, 정신 차려라.”
“어, 어······? 뭐냐. 한 병 더 시킬 거냐?”
“얼씨구. 이 새끼 빠져가지고. 찬물 먼저 가져다주어야겠구만. 술도 적당한 걸로 한 병 가져다주고.”
점소이가 곧장 찬물 한 대접과 술병을 들고 왔다.
“그러면 부탁 좀 하겠네.”
다시 탁자로 얼굴을 처박은 제갈경을 뒤로 한 하무린은 매화자가 앉은 탁자로 다가갔다. 손에는 방금 시킨 술병이 들려 있었다.
탁, 하고 술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거 흥미가 동해서 그러는데 자세히 좀 들어봅시다.”
“소협께서는 무엇이 궁금하신가?”
마침 먹던 술이 다 떨어진 매화자가 화색이 되어 물었다.
하무린이 웃으며 말했다.
“그 소저의 이름만 빼고 노인장이 아시는 게 있으면 모두 말씀해주시면 되오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여기서 들어도 괜찮지만, 방명은 직접 듣는 것이 예의겠지.’
그러자 매화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마침 잘 됐구려.”
“무엇이 잘 되었단 말입니까?”
매화자가 고개를 쭉 빼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여지껏 그 소저의 이름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다오.”
***
“과연 천하절경이로구나. 연아, 그렇지 않느냐?”
길이가 두 장 정도 되는 자그마한 배 위에 선 소천마 백희령이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함께 배에 타고 있던 경해연은 흘낏 주변을 바라본 후에 동의하는 뜻을 표했다.
“네, 주군.”
“······.”
“주군?”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올려보니 백희령이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에 경해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백희령이 낮은 목소리로 꾸중했다.
“유람을 온 것인데 너는 어찌 이곳에서도 내게만 신경을 쓰는 것이야.”
“송구하오나 그것이 제 일인지라-”
경해연이 변명처럼 한 말에도 백희령은 언짢은 기색이 가시지 않은 듯이 도로 뱃전에 앉았다.
“되었다. 이미 흥이 식어버렸으니, 네가 책임을 져야겠다.”
“책임······이라 하시면.”
“지금부터 일각 동안 너와 내가 바뀌는 것이야. 내 너를 유심히 지켜볼 터이니 너는 이곳 풍광을 구경하고 있거라.”
“주군. 그것이 대체-”
“어서. 본녀가 지금 화가 단단히 났으니 너는 명에 충실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표정이 사뭇 진지했으나 말을 곱씹어 보면 농을 거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백희령은 정말로 경해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결국 경해연은 동정호 곳곳의 풍광을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참담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나의, 나의 주군이······.’
이곳 동정호로 유람을 온 지가 벌써 나흘째.
백희령의 제일 심복을 자처하는 경해연이었지만 이제는 그녀도 인정해야만 했다.
그녀의 주군에게는 십만대산에서 결코 보이지 않았던 일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백희령.
신교 내에서 그 이름 석자는 완벽이라는 단어의 다른 표현이었다.
삼대에 걸쳐 팔대 장로의 일각을 맡아온 백씨 가문.
그 명문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열여섯 나이에 아비인 칠 장로를 능가하는 무공 성취를 이루었다.
천마 위지혁의 제자로 들어가서는 삼 년만에 천마신공을 구성까지 성취했다.
그리고 본래 가진 배경과 일신의 무공을 앞세워 교내의 실질적인 권력을 모두 장악했다.
불과 스무 살 나이로 이루어낸 위업.
눈으로 보고, 귀로 직접 들어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일이었다.
허나 경해연은 안다.
그러한 모든 경이로움이, 백희령에게는 그저 마지못해서 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신인이며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을 주군이었다.
한데 어째서 이곳에서는······.
“연아. 경치가 네 보기에 좋으냐?”
“······네.”
“대답이 시원찮구나. 일각을 더 주면 알 것도 같으냐?”
“아주 아름답습니다, 주군!”
경해연이 눈을 꼭 감으며 외쳤다.
문득, 곁에서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백희령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래, 그만하면 되었다. 이리 와서 앉거라.”
아리따운 주군과 신하가 함께 뱃전에 앉았다.
경해연이 쭈뼛쭈뼛 말을 건넸다.
“조금 더 있으면 어귀에 닿습니다. 주군.”
“그렇겠지? 혹시 저것들 때문에 그러는 것이더냐?”
백희령이 눈짓으로 곧 배가 당도할 호수 어귀를 가리켰다.
잘 차려입은 사내들이 수십 명이 넘게 무리를 짓고 서 있었다.
아니, 무리라기보다는 제각기 온 이들이 많아 자연스레 무리처럼 보이는 것이다.
모두 백희령을 보려고 몰려온 자들이었다.
경해연이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길을 열겠습니다. 주군께서 신경 쓰이실 일이 없도록-”
허나 백희령은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연아. 네 눈에는 저것들이 사람으로 보이더냐?”
“······네?”
“내 눈에는 기개 없는 한낱 허수아비들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저런 것들을 구태여 신경 쓰는 것은 그야말로 광인이나 할 작태가 아니겠느냐.”
경멸도 무엇도 아닌, 단순한 무관심.
백희령의 말 그대로였다.
두 사람이 탄 배가 호수 어귀에 닿고, 발이 땅에 내려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함에도 몰려든 자들 중 그 누구도 말을 걸어오는 이가 없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 전부일 뿐 오히려 백희령과 경해연의 주위 일 장으로 빈 공간이 생기고 말았다.
백희령이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보아라. 내 말이 틀리지 않지?”
“과연 그러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스무 걸음을 걸었을 무렵.
경해연은 백희령의 시선이 정면이 아니라 조금 옆을 향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사내가 한 명 서 있었다.
사내와 백희령의 눈이 마주쳤고, 그대로 시간이 흘렀다.
물 흐르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릴 뿐 온통 적막한 사위로, 경해연은 사내가 흘린 말을 들었다.
“아주 실없는 소리는 아니었군그래.”
경외나 동경이라기보다는 호기심.
그리고 호감.
백희령의 호위로서, 경해연은 건방진 사내를 치워버릴까 잠시간 고민했고,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앞서 백희령이 입을 뗐다.
“거기 소협?”
“······주군?”
경해연이 놀라 묻는 것과는 관계없이, 사내와 백희령의 대화가 이어졌다.
“나를 불렀소?”
“그러면 이곳에 당신 말고 사내가 또 있나요?”
“어디를 봐도 널린 게 사내들이오만.”
사내가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백희령이 웃었다. 웃음이 향하는 곳을 황홀케 하는, 고혹적인 미소.
“그럴 리가 있나요. 적어도 내게는······, 소협밖에는 보이지가 않는군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당황에서 경해연이 헤어나온 건 이미 사내와 백희령이 나란히 걸으며 한창 담소를 나누던 때였다.
얼굴이 심히 훤칠하다 못해 뺀질해 보이기까지 한 사내가 말했다.
소저의 방명을 알고 싶다, 라고.
백희령이 답했다.
자신의 이름은 백희령이라고.
경해연은 답답한 마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가, 다시 쩍하고 벌려야만 했다.
“아, 원래 백희령. 백 소저셨군요. 저는 하가 사람으로 이름은 무린이라 합니다.”
‘하무린?’
경해연도 아는 이름이었다.
분명 당금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후기지수의 이름이 그러했다.
“무린. 하무린······. 멋진 이름이네요.”
경해연이 이것이 우연의 일치인지를 고민하는 와중에, 백희령과 하무린은 통성명을 마치고 다음날 만나기로 약조까지 하고 말았다.
하무린이라 이름을 밝힌 사내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경해연은 따지듯이 말했다.
이것 또한 주군에게 처음 행하는 불충이었다.
“주군, 어째서······.”
물론 강호무림에 백희령이 알려진 바는 없다.
하니 이름을 밝힌다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경해연으로서는 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것인지 주군의 속내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백희령은 감탄한 듯이 고개를 주억거릴 뿐이었다.
“과연 용모파기로 보았던 만큼은 되는구나.”
“주군. 그러하시면-”
그 말인즉슨 백희령은 애초에 저 사내가 정파 후기지수 하무린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뜻이었다.
“당연하지 않겠느냐. 알고 말을 걸었던 것이지.”
“······그렇군요.”
“용모는 보았던 그대로이고 기개도 가상하다. 만약 자질까지 듣던 대로라 하면,”
백희령이 미소지으며 선언했다.
“신교로 데려와야겠다. 저자는······, 내가 가져야겠어.”
백희령이 무언가를 ‘가진다’고 말했다.
경해연은 그 말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
문이 열렸다.
술이 얼추 깨어서 침상에서 노닥거리고 있던 제갈경이 문 쪽을 바라봤다.
넋이 나간 얼굴을 한 하가놈, 하무린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갈경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하가야, 어디 갔다 온 게냐.”
“······.”
대답은 하지 않고 하무린이 벽 쪽에 걸터앉았다.
제갈경이 가만히 보니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근심, 우려, 기대, 기쁨, 행복. 오만가지 감정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갔다.
제갈경이 재차 외쳤다.
“하가야! 하무린! 개새끼!”
벽에 걸터앉아 있던 하무린이 손을 한 번 튕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제갈경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욕지거리에 반응을 하는 걸 보니 아주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닌 듯한데, 하무린이 뭔가를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제갈경이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족해.”
‘뭐라는 거야?’
제갈경이 하무린의 바로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야 확실하게 들렸다.
“노력이 부족해······, 노력이······.”
몇 시진 전 번듯한 누각에서 제갈경이 읊조리던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제갈경은 생각했다.
‘이 새끼······, 주화입마에 든 건가?’
그렇다면 큰일이었다.
주로 제갈경 자신의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그 순간 하무린이 제갈경을 향해 몸을 휙 돌렸다.
괜시리 제발이 저리고 만 제갈경이 뒷걸음질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무린이 양손으로 제갈경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경아, 네놈은 항상 노력을 한다고 했지?”
“노력 말이냐······?‘
맥락상 지금 말하는 노력은 ‘그걸’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근데 하가놈이 그걸?’
비무행 중에도, 무림맹 내에서도, 아무리 아리따운 소저들이 호감을 표해도 눈 하나 꿈쩍 않던 놈이?
긴가민가하면서도 제갈경이 물었다.
“혹시······, 여자 꼬여내는 것 말이냐?”
“그래, 그거 말이다! 나 좀 가르쳐다오!”
열정적인 눈빛을 한 하무린이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