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하나 놓치는 것이 없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눈빛에서는 순수한 적의만이 읽혔다. 나탈리야가 결코 살가운 마음으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차수희는 알았다. 하지만 우선은 물어보는 게 순서였다.
“왜 그래? 둘이서 해야 될 이야기라도 있니?”
“네. 있기는 하죠. 근데······.”
나탈리야가 한 손을 드는 것과 동시에 차수희는 표정을 굳혔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조금 있다가 해도-”
파아앙!
정교한 구속마법이 한순간에 터져나갔다.
다시금 자유를 되찾은 차수희는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평온하게 말을 건넸다.
“지금 하지 그래?”
“······지금 하면 의미가 없는데.”
“어째서?”
“그것도, 무릎 꿇려놓은 다음에 알려줄게요.”
다시 한 번, 아까보다도 훨씬 강력한 구속마법이 차수희를 옥죄었다.
차수희의 움직임이 그대로 정지했다.
“걱정하지 마요. 상처 하나 안 낼 거니까.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예요. 당신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
차수희에게 한 걸음씩 다가서며 나탈리야는 조소를 흘렸다.
그리고 세 발자국을 남긴 앞에서 걸음이 멈췄다. 자의가 아닌, 온전한 타의에 의해서.
반면에 차수희는 어느새 주먹을 들어 어깨를 통통 두들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됐다.”
“뭐?”
떨리는 물음에 차수희가 별 것 아니라는 어조로 답했다.
“결계라고 해야 하나? 타샤 네가 친 거는 새어나갈지도 몰라서 덧씌웠는데. 그으, 들키면 서로 곤란하잖아?”
“너······!”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유부터 말해주면 안 될까? 내가 집에서 노는 것 같아도 꽤 바쁘다? 들어가서 저녁식사 준비도 해야 하고, 조금 있으면 오빠랑 지현이도 올 거니까.”
“닥쳐-!”
나탈리야의 길다란 머리칼이 휘날렸다.
깨어져 나간 마나의 감옥이 파편으로 날아들었다.
물론 차수희에게는 어떠한 타격도 줄 수 없었지만 지금 눈을 부릅뜬 나탈리야는 거의 차수희를 씹어먹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 입으로! 오빠에 대해서 지껄이지 마-!”
말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감정.
갑자기 격분하는 모습.
사용하는 단어들까지.
차수희는 오싹한 생각에 잠시 발을 휘청였다.
“방금 뭐라고······?”
하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거리를 벌린 나탈리야가 전력을 다해 갖가지 마법들을 쏘아냈다.
어찌나 강대한 마나를 사역하던지 검은색의 머리칼이 푸른빛을 흘리며 빛날 정도였다.
차수희가 판단하기로 몇 년 전에 상대했던 천유화보다도 수준이 높았고, 천유화와 마찬가지로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는 상대였다.
해서, 싸움이 길어진 이유는 달리 없었다.
지금 이 일이 ‘누군가’에게 알려질 것을 차수희가 극도로 경계했기 때문에.
나탈리야를 결코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힘을 한계까지 소진시키고 싶었기에.
들어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그런 이유였을 뿐이다.
마침내 힘을 다한 나탈리야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차수희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공격을 당할까 대비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나탈리야를 자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차수희는 불안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떨리는 입을 떼었다.
“이제······, 말해줄 수 있니?”
나탈리야가 고개를 들었다.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한 얼굴.
“돌려줘······.”
차수희는 이제 나탈리야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하지만 물어보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혹은, 직접 들어야만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뭘 돌려달라는 건지, 알려줄 수 있어?”
“우리 오빠······. 수현 오빠······.”
나탈리야는 울면서 외쳤다.
“내 몸, 돌려줘······!”
***
차수희가 집에 돌아온 건 유수현과 유지현이 이미 귀가를 마친 후였다.
부엌에 나란히 선 부녀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었다.
“스테이크 먹자니까?”
“아빠는 오늘은 김치찌개 먹고 싶은데.”
“그놈의 김치찌개! 그저께도 먹었잖아.”
“······그랬나?”
가만 들어보니 고민이 아니라 의견대립이었다.
차수희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둘이 거기서 뭐해?”
“엄마! 스테이크 먹자, 스테이크. 냉동실에 두툼한 거 있잖아.”
유지현이 지원군을 만난 반가움을 더해 말했다.
차수희는 손에 든 봉투를 들어보였다.
“김치찌개도 먹고 스테이크도 먹으면 되지?”
“앗, 그런 방법이······!”
“그리구 초밥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소갈비도 먹고.”
“그렇게 많이? 다 못 먹잖아.”
장을 봐온 봉투를 식탁에 올려두며 차수희가 말을 이었다.
“마트 가니까 맛있는 거 많아 보여서 좀 사왔어. 먹고 남으면 내일 먹으면 되지.”
“아빠 들었지? 내무부 장관님이 대통합하라시는데.”
“아, 오빠.”
“응?”
묘하게 기분이 들떠 보이는 유수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차수희는 울컥하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며 봉투에서 뭔가를 꺼냈다.
“오늘 세일하더라? 와인이랑 맥주 같은 거도 좀 사왔는데.”
“어? 오늘 무슨 날이야?”
“그냥, 기분이 좀 좋아서.”
부녀를 거실로 보낸 차수희는 팔을 걷어붙였다.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선언했다.
“그리고 내일은 둘 다 일찍 일어나.”
“내일 왜? 토요일인데.”
“벚꽃 구경. 주말에 가기로 했잖아. 내일 가자.”
“평소에도 독재자였지만 오늘은 좀 더 격렬하다. 그치, 딸?”
“왜? 난 좋은데? 차수희 각하 만세!”
부엌에 선 차수희는 등 뒤로 들려오는 대화에 미소를 지었다.
오늘과 내일만큼은 최고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 정도는······. 그래, 이 정도는 괜찮겠지······?’
마침 물기가 얼굴로 묻었다.
차수희는 팔을 살짝 움직여 눈가를 훔쳐냈다.
***
불을 켜지 않은 어둑한 집.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나탈리야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침실까지 갈 힘도 없었다.
바닥에 그대로 누운 나탈리야는 생각했다.
오늘이 살면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은 날일 것이라고.
‘저쪽은 반대려나······?’
아마 그럴 것이다.
나탈리야의 기억에도 사과를 했던 기억은 그다지 없으니까.
‘복잡하게도 꼬였네······.’
자신의 몸을 차지한 여자에게서 들었던 진실.
차분한 어조였지만 여자는 몇 번이나 말을 멈췄다. 중간중간 울컥하는 것을 참아내기 위해서.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했지만, 그 마음이 진심이 아닌 가식이라고는 아무래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진실을 털어놓은 후 여자가 나탈리야에게 간청했다.
단 하루. 내일까지만 시간을 달라고.
나탈리야는 단번에 거절했다.
여자는 애원했다. 제발, 단 하루만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이 몸을 돌려줄 방법도 이미 생각해 둔 게 있어. 아까 너한테 넘겨준 성화. 그것도 무사히 받았으니 다른 건 신경 쓸 것도 없어. 절대로 들키지 않게 해줄 테니까, 제발. 부탁이니까 나한테 하루만 시간을 줘······.’
억지로 참아내던 것을 여자는 이제 참아내지 못했다.
아름다운 얼굴로 눈물이 쏟아지고, 오열하는 소리가 오래 이어졌다.
‘하루만······. 주말에, 벚꽃 보러 가기로 약속했는데······. 제발······.’
‘······맘대로 해.’
계속 있다간 고맙다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 그걸 들으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나탈리야는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지금.
나탈리야는 누운 상태로 손을 천장으로 뻗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손바닥으로 푸른빛이 은은하게 빛나서 어두운 실내를 밝혔다.
아까 그 여자에게서 넘겨받은 신비한 무언가.
성화라고 불렀던 막대한 힘.
어쩐지 편안하게 느껴졌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수마가 밀려왔고, 나탈리야는 그대로 잠에 들었다.
그리고.
푸른빛이 환하게 빛났다.
기억.
‘거기 소협?’
‘나를 불렀소?’
기억.
‘나는 교주가 될 거다. 너는 맹주라도 되는 게 어때?’
‘그게 말은 쉽지. 그러면 나보고 평생 맹주 노릇 하라는 말이냐?’
기억.
‘왜······? 어째서 안 간다는 거지?’
‘그냥. 가기 싫어서.’
‘우리가 나눈 약속은, 그러면······.’
‘······거 미안하게 됐다.’
‘내 눈을 봐라. 똑바로 보고 대답해!’
기억.
‘얘 이름이 운상이라고 하는데, 내가 진짜 아끼는 동생이니까 어디 파견 내보낼 생각도 하지 말고 부려먹을 생각도 하지 마요. 다들 아시겠죠? 아무것도 시키지 말고 애 그냥 가만히 냅둬요.’
기억.
‘운상아, 운상아! 어제 했던 얘기 또 해줘.’
‘어제 했던 이야기를 오늘 또 말입니까?’
‘와, 숨기고 사느라 답답했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귀찮은가봐?’
기억.
‘······이건 알려야 해. 그냥 덮을 문제는 아냐.’
‘사조님, 도와주십시오. 부디······.’
기억.
‘나도 죄 없는 거 아니잖아요. 나도 공범이니까 절반 몫은 내가 책임질게요.’
‘그걸로 해결될 문제가-’
‘그러면! 쟤가 감당할 수 있는 거만 빼고, 전부 다 내가 책임질 테니까 그러지 말라고요!’
기억.
‘괴로움을 품고 올라온 아이야. 어찌하여 그랬니? 너로 말미암아 생긴 혼란을 너는 아느냐?’
‘······압니다.’
‘그래. 너라고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 허나 네 업에 대한 책임을 너는 져야 한단다.’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둘이 저지른 짓이니 둘이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 아이야, 한 가지만은 기억하거라.’
‘무엇을 말씀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고.
나탈리야는 꿈에서 깨어났다.
꿈의 마지막에 들었던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하나······, 결코 놓치는 것이 없으니······.”
나탈리야는 곧장 집 밖으로 뛰쳐나와, 어딘가로 달려갔다.
***
요즘 이 말을 자주하는 것 같다.
“이게 가정이고, 이게 행복이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직장에서 골치아픈 일도 정리됐고, 지현이는 학교 재밌게 다니고, 애 엄마 관련한 일도 순조로웠다.
천유화 이 기특한 녀석이 옳게 된 마법을 만들어냈다 이거야.
이게 해 보니까 진짜 되더라고. 트럭에 치이거나 길 가다가 소환진 같은 거 안 밟아도 이세계로 가는 문을 뚫어낼 수가 있다니까?
물론 아직은 어디로 갈 건지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도 방법을 생각해 놓은 게 있다. 애 엄마 구슬려서 뭔가 증표 같은 거라도 만들어두면 그걸 매개체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 몇 번 몰래 실험을 더 해봐야겠
지만, 이 문제도 이 정도면 거의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 행복하다······.”
“응?”
저절로 나온 말에 애 엄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손을 꼭 잡으면서 답했다.
“행복하다고 했어. 엄청 많이.”
“응, 나도······.”
사실 어제 애 엄마가 마음이 좀 복잡해보여서 긴장상태이긴 한데, 지금이야 크게 걱정할 건 없겠지.
“아빠, 나 여기서 사진 찍어줘!”
커다란 벚꽃나무 앞에 선 지현이가 나와 애 엄마를 향해서 외쳤다.
“일단 나부터 찍고, 엄마 한 장, 아빠 한 장 찍고, 엄마아빠 둘이서 찍고, 그 다음엔 셋이 같이!”
“그렇게 많이?”
“응. 완전 예쁘잖아!”
우리 딸이 하자면 해야지.
지현이부터 시작해서 애 엄마도 찍어주고, 내 사진은 애 엄마가 찍고, 나랑 애 엄마 커플 사진 한 장.
마지막으로 세 사람 사진.
삼각대에 카메라를 올려두고 타이머를 맞춘 다음에 셔터를 눌렀다.
“빨리, 빨리! 둘 다 옆으로 와!”
지현이가 재촉을 했다.
나와 애 엄마가 웃으며 지현이의 양 옆에 섰다.
카메라 불빛이 깜빡거렸다.
타이머를 10초로 맞춰뒀으니까 이제 3초 정도 남았나?
딱 맞춰서 내가 외쳤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바람이 불었다.
사진이 잘 찍혔는지 확인하려고 카메라 쪽으로 갔다.
어디 보자, 잘 찍혔나?
“오빠, 오빠!”
애 엄마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들어 보니 소스라치게 놀라서 당황한 얼굴이었다.
나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우리 딸은 어디 갔지?
방금까지, 나랑 애 엄마 옆에 있었는데.
손에 든 카메라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방금 찍은 사진.
예쁘게 핀 벚꽃나무를 배경으로,
나와 애 엄마 두 사람만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