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너는 말투가 그게 뭐니?
***
그녀는 태어난 지 이백 년도 되지 않은 어린 신격이다.
어느 곳에서는 천국. 또 어느 곳에서는 선계로 불리는 그곳.
하위세계들을 관장하는 상위차원.
하위세계의 수만큼, 그 안에서도 국가와 종족, 문화의 분화만큼 부르는 방법이 다양한 그곳에서 그녀는 태어났다.
이는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하위세계에서 초월자가 되어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신격이라니.
그녀의 존재가 알려지고, 선계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던 모든 신격들이 그녀에 대해 속삭여댔다.
‘지금부터 잘 보여둬야 하나?’
‘그러게? 나중에 높은 자리 가면 파견 한 번 빼줄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이야기임을 알았지만, 직접 말을 걸어오는 이 또한 없었다.
해서, 우선은 이곳저곳을 발 닿는 대로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그리고 새하얀 궁전에서 들려오는 음성과 마주했다.
상냥한 물음.
‘무엇을 하고 싶니?’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꽤 많이 들었던 말.
‘파견이라는 걸 해 보고 싶어요.’
소원은 곧 이루어졌다.
하계에서 세월을 보낸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금 궁전의 음성을 들었다.
‘어땠니?’
‘즐거웠어요. 그리고······, 싫었어요.’
궁전의 음성은 어떤 점들이 즐거웠는지, 싫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저 변하지 않는 상냥함으로 제안했다.
‘원한다면 다른 곳도 보내줄 수 있단다.’
순수함을 간직한, 그러나 지친 목소리로 그녀가 답했다.
‘한 번이면 족해요.’
‘그러면 이제는 무얼 하고 싶니?’
‘그냥, 쉬고 싶어요.’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거란다.’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꿈 하나 꾸지 않고 수십 년간 편안한 잠에 빠질 수도 있었고, 고통과 슬픔이랄 게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이곳 상위차원에서 영생을 누릴 수도 있었다.
그녀는 대체로 잠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
다소 난처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그냥 계속 잘 걸 그랬나?’
그녀의 바로 곁에, 흰옷을 입은 여아가 울부짖고 있었다.
꽉 쥔 주먹으로 땅을 치면서 눈물을 흘린다.
심장에 난 상처를 눈물로 쏟아내는 것처럼 느껴져서, 투명한 눈물은 꼭 색깔 없는 피인 것만 같았다.
‘이게 뭐람······.’
인세에 남은 사내아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해서 구경을 해 본 것인데,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그녀도 몰랐다.
시야를 밝혀 눈이 닿은 곳은 높은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그녀도 일전에 본 적이 있는 훤칠한 사내아이가 홀로 술병을 들고 있었다.
조금 취한 듯한 얼굴색으로 잔을 쭉 들이킨 후, 빈 잔을 던져버린다. 잔이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아이는 허리춤에 찬 낡은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자기 심장에 꽂아넣었다.
단 한 호흡 만에 일어난 일.
무슨 말을 건넬까 고민하던 여아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고, 사내아이의 눈빛은 흐려져 갔다.
그녀는 여아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하무린-!’
필시 인세에 닿았을 테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내아이의 몸이 활활 타올랐다.
강대한 육신이 마침내 재가 될 때까지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이내 그 자리에는 술병과 깨어진 잔만이 남았다.
그녀의 곁에서 여아가 쏟아내는 망연자실한 읊조림만이 조금 전에 목격한 일을 증거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여아의 어깨로 손을 얹었다.
“괜찮니······?”
“대체 왜······? 그럴 거라면 차라리······. 차라리······.”
본래도 가지고 있었던 측은함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녀는 여아를 꼭 안아줬다.
“미안해, 내가 괜한 일을 해버려서······.”
해가 두 번 뜨고 다시 질 때까지 여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도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다.
캄캄한 밤, 마침내 여아가 말을 건넸다.
“살펴주어서 감사하오이다, 선배······.”
쉰 목소리.
하지만 드디어 그녀를 바라봐줬다.
그녀는 장난스레 말했다.
“너는 말투가 그게 뭐니?”
여아의 표정에 미약한 의문이 깃들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요즘은 그런 말투 쓰나봐? 나 때는 아니었는데.”
“그게 무슨······.”
“됐구, 일어나자. 나 이제 다리 아프단 말야.”
두 사람이 함께 일어났다.
오래도록 앉아 있었더니 일어서도 갑갑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주먹으로 다리를 탁탁 두들겼다.
하지만 여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똑바로 섰고, 그 모습에 눈가를 좁힌 그녀는 또 잔소리를 했다.
“꽤 오래 걸어야 하는데 다리도 좀 주무르고 그래. 아니면 내가 해줄까?”
“괜찮소이다.”
“으으, 그거 말투 진짜 좀······.”
듣기만 해도 손발이 잘 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아도 지지 않고 말대답을 해댔다.
“내 지금은 등선하여 인세를 벗어났으나 신교의 천마로서 지낸 세월이 수십 년일지니 어찌 언행을 경박하게 하리오.”
그녀는 생각했다.
너 잘 걸렸다, 라고.
“신교의 천마? 그거 하면 말투도 그런 거만 써야 하고 다리 저려도 주무르지도 못하고, 그런 거야?”
“그리 흑백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래서 맞아? 아니야? 그거만 대답해봐.”
“······오래도록 내려온 가르침이오이다.”
대화가 석연찮게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여아가 표정을 살짝 찌푸리며 답했다.
그녀의 눈빛이 사냥감을 노리듯이 시리게 빛났다.
“흐응, 그래애? 오래도록 내려온 가르침?”
“그러하오이다. 한데 그것은 어인 일로-”
“그거 차암 이상하다? 나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는데.”
여아는 결코 아둔한 아이가 아니었다.
말에 담긴 뜻을 곧바로 알아챘다.
흠칫 표정을 굳히는 여아를 보며 그녀가 생각했다.
‘당황하는 건 또 엄청 귀엽네?’
처음 느꼈던 호의가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걔는 잘 있니? 우리 말썽쟁이 불덩어리.”
“혹시 성화를 말씀하시는······.”
“응. 십만대산 안에서만 놀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왔는데. 그래도 말 잘 듣지?”
어쩌면 다음대의 신으로 예정 지어진, 아직은 어린 신격.
단 한 번 인세에 내려가 얻은 이름은 시천마始天魔 일월령日月令.
천마신교 개파조사.
그녀가 여아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문 열어! 빨리 문 열어!”
문을 쾅쾅 두드리며 거칠게 외쳤다.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 퇴근하자마자 바로 찾아왔는데······, 어째 나올 기색을 안 보인다.
어쩔 수 없다. 최후통첩, 아니, 최후의 협상을 하는 수밖에.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십 초 안에 나오면 풀어준다. 대머리랑도 이제 같이 살 수 있는데, 어떡할래?>
보낸지 일 초 만에 숫자 1이 사라지고, 삼 초 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천유화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거 정말이지!?”
“안에 있었던 거 맞잖아!”
“아얏!”
딱밤을 얻어맞은 천유화가 이마를 감싸쥐었다.
아랑곳않고 집 안으로 침투했다.
오히려 내가 주인이라도 된 것처럼 현관문 쪽을 바라보며 선언했다.
“빨리 내놔.”
“뭐, 뭘 말이야.”
“차원이동 완성했다면서! 현기증 나니까 빨리 가르쳐줘!”
천유화가 화들짝 놀라더니 표정을 오묘하게 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더니 중얼거린다.
“좋은 치코리타는 입이 무거운 치코리타뿐······.”
“뭐래는 거야.”
입이 무겁건 가볍건 치코리타는 치코리타지.
이수재한테 맡겨놓은 것만 빼고는 전부 아무짝에 쓸모없는 타는 쓰-, 아무튼.
“빨리 설명해줘. 종이에 적어뒀지? 마법 쓰는 방법까지 설명 다 해줘.”
“아직 아냐. 좀 남았으니까 하루이틀만 더 기다려.”
“구체적으로 얼마나 남았는데.”
“······두어 시간 정도?”
거짓말은 못하는 천유화가 솔직히 실토했다.
두어 시간이면 정말로 정리만 남은 거잖아.
쇼파에 앉으며 말했다.
“기다릴 테니까 빨리 끝내.”
“근데, 우리 무식한 교주님이 뭐라고 말하셨는지는 몰라도 당신 생각처럼 주문 외워서 팡! 하고 다른 세계로 갈 수 있고 그런 거는 아냐.”
“그럼 뭔데?”
“그게 뭐냐면 말이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라.”
“······하무린 개새끼.”
퍼억!
머리통을 어루만지면서 천유화가 한 설명은 이랬다.
일반적인 이론을 통해서 차원이동 마법 자체를 구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힘으로 우직하게 뚫어내는 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고, 어디를 뚫어낼지 공간을 찾아내는 게 천유화가 진행한 연구의 핵심이었다.
“전에 들었던 거랑 좀 다른데? 아예 마법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냐?”
천유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아. 그래서 쩔쩔맸던 거지. 지금까지는 완전히 방향성을 잘못 잡았던 거라고 해야 하나? 이게 다 이론만 만들고 제대로 실험을 못해서 그런 거야. 마나만 되돌려줬으면 훨씬 빨라졌을걸?”
“아무튼 탐지마법 비스무리한 거라는 건 알겠는데. 그러면 그 우직한 힘이라는 건 어디서 구하는데?”
천유화가 대답은 않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
“응. 당신 엄청 세잖아. 진짜로 엄청나게,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뒤집힐 만큼 세잖아?”
“내가 그 정도인가······?”
작정하고 하라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런 거 하면 머리가 너무 아픈데.
천유화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정도여야 해. 그런 사람의 힘을 동력으로 쓸 걸 가정하고 이론 만든 거니까. 신화경 올라가서 전전대 교주님이랑 같이 등선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사람이 왜 갑자기 자신이 없는 척이야?”
“아니, 자신이 없는 건 아니고. 아무튼 신화경 정도 되면 네가 말하는 거 가능하다 이 말이지?”
“직접 시험해본 건 아니지만, 아마도.”
그거면 충분했다.
천유화가 작성해둔 종이뭉치를 넘겨받았다.
확인해 보니 들은 대로 이 자체로 초고난이도의 마법이라고 할 것까진 없었다.
탐지마법을 아주 정교하게 사용하는 정도?
“사실 이 마법도 당신 정도로 컨트롤 안 되면 알아도 쓰지도 못해.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만 쓸 수 있는 마법이니까. 나중에 어디 가서 시험해보고 알려줘. 부족한 거 있으면 개량해 줄 테니까.”
“······고맙다야.”
“됐어.”
쌀쌀맞게 말한 천유화가 자리에서 휙 일어섰다.
그리고 방으로 향하더니 커다란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나왔다.
“아까 말한 거 잊지 마. 나 이제 나간다? 언니오라버니들 있는 데로 갈 거야.”
“알겠다. 다음에 연락할 테니까 넷이서 와. 그때는 힘도 다 회복시켜줄 테니까. ······지금까지 미안했다.”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천유화가 먼저 집을 나서고, 혼자 남은 나도 잠시동안 종이뭉치를 한 번 더 읽어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날아올라서 인적이 드문 산 봉우리로 향했다.
지금 당장 실험해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거렸다.
***
차수희는 집 근처의 공원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주위에는 그녀 혼자밖에는 없었다.
노을이 옅어지고, 어둠이 그 자리를 채우는 광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 또다시 꾼 꿈에 대해서.
지난번에는 이미지와 희미한 감상 같은 것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꿈에서 깬 후에도 좀 더 선명하게 남았다.
흰옷을 입은 여성과 대화를 나눴다.
그 여성과 자신은 결코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꿈에 대해 생각할수록 차수희는 망설임이 마음에 찾아오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볼까······?’
굳이 유수현과 유지현을 떠나지 않더라도, 이대로 기다리면서 꿈이 계속된다면 분명히 뭔가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애써 떨쳐냈다.
‘그런 건 비겁한 거야. 성화를 넘겨주자.’
이미 건네줄 사람은 마음속으로 정해놓았다.
유지현의 친구이자, 왠지 모르게 호의가 갔던 소녀.
‘타샤라면······, 그 애라면 괜찮을 것 같아.’
물론 나탈리야 쪽에서 조금이라도 꺼려하는 기색을 보인다면 모두 백지로 돌릴 일이기는 하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나탈리야는 차수희의 가족과 관련된 일의 진실에 가닿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알고 싶어하고 그 울타리 안에 들어오고 싶어한다고.
차수희에게는 그런 확신 같은 예감이 있었다.
문득, 차수희는 주위가 적막해짐을 느꼈다.
원래도 인적이 드물고 고요한 곳이었지만······, 조금 전과 지금은 질적으로 달랐다.
명백하게 어떠한 힘이 개입한 결과였다.
‘누구지?’
이런 결계 정도 마음만 먹으면 금방 깨어버리는 건 간단한 일이지만 일부러 차수희는 기다렸다.
집 근처에서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있다면 정체를 밝혀내고 제재를 가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리고.
안개가 짙어 뿌옇게 된 공원 입구로 누군가가 모습을 보였다.
차수희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타샤?”
“안녕하세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나탈리야가 마주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