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86화 (86/130)

86. 내가 이 맛에 산다.

***

오늘은 기쁜 날이다. 드디어 골치 아픈 일들이 마무리가 됐거든.

적어도 나나 우철이, 좀 더 나아가서 책임자급인 김유진 선에서는 그렇다.

뭐라고 했더라? 일반적인 사회에 알리지는 않지만 우리 쪽이랑 저쪽 마법사 애들 지식 교류도 좀 하고, 우리야 크게 아쉬울 거 없으니 이권도 많이 챙긴다고 들었는데.

나야 그런 건 전생에서 지긋지긋하게 해봤으니 이제 쳐다도 보기 싫고, 코쟁이들 분노 억제기용으로 두어 번 얼굴 비춰주는 거면 충분했다.

“다들 한 잔씩 합시다. 잔 드세요.”

한두 달 전에 일곱 명이서 모였을 때는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더니만 오늘은 튕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모두 웃는 낯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 모인 사람들은 나랑 이수민, 김유진이랑 우철이. 이렇게 네 명뿐이니까. 앙숙 같은 사마군 애들은 전원 불참을 선언했다.

근데 나머지 셋이야 잡혀갈 뻔한 역할 맡은 거 말고는 별 일 안 했다고 쳐도 천유화는 올 만도 한데 말이지.

대강 건배사를 끝내고 한 잔 쭉 들이킨 다음, 테이블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이수민에게 말을 걸었다.

“치코야? 야아, 대답 좀 해. 치코치코?”

“······여기 치 씨 없어.”

이수민 쪽에 놓인 접시로 손을 뻗어서 채소를 하나 집었다.

이거 이름이 바로······,

“여기 있는데?”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어디 가서 그런 개그 절대로 하지 마. 나이는 못 속인다고 욕먹을걸?”

“그래, 고오맙다.”

손에 들린 치커리를 안주 삼아 씹고는 이수민에게 물었다.

“근데 너네 집 얹혀사는 객식구. 우리 유화는 왜 안 왔냐?”

이수민이 싫어하는 건 알지만 걔도 고생했으니까.

좀 오게 해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수민이 단출하게 답했다.

“내가 못 오게 한 거 아냐. 지금 바쁘대.”

“왜 바빠?”

“당신이 시킨 거 이제 길이 좀 보인다던데.”

“진짜로?”

갑자기 마음에 안도감이 가득 차는 게 느껴졌다.

무슨 사단나기 전에 실마리를 찾았다잖아.

“그러면 격려차 오히려 불러와서 맛있는 것 좀 먹여야지. 지금이라도 부를까?”

“냅둬. 당신이 이렇게 보챌까봐 걔가 애초에 말하지 말라고 한 건데.”

“말하지 말라고 한 건데 말은 또 왜 했어.”

“이틀 전인가? 조금만 더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이제 말해도 되겠지 싶어서.”

“그래, 잘했다.”

아예 몰랐다면 또 모를까 알았는데 가만 있을 수는 없지. 내일이라도 천유화를 찾아가볼 생각이었다.

기대감과 안도감이 함께 드니 자동으로 입꼬리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당당하게 외쳤다.

“어우, 기분좋네. 다들 사양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마음껏 시켜요. 오늘 인당 십만원치씩 의무적으로 먹는 거야.”

“이거 부서 회식비로 나가는 건데······.”

김유진이 나한테 들릴 만큼만 작게 중얼거렸다.

뭐, 그래서 어쩌라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내공도 안 쓴 채로 술을 진탕 마셔버렸다.

그리고 얼큰하게 취해서는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도중에, 벚꽃나무가 피기 시작한 게 눈에 들어왔다.

생각해 보니 벌써 달력 4월로 넘어간지도 며칠 됐고 슬슬 벚꽃철이네.

지금도 바람 불 때마다 간간히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허공섭물을 쓰거나 손으로 직접 나꿔채는 건 국민 룰에 어긋나는 짓이지.

낙하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해 손만 내밀고 있으니 어느새 손바닥에 예쁜 색의 벚꽃잎이 두 개 놓여 있었다. 하나는 지현이 주고, 하나는 애 엄마 주고.

잎이 상하지 않도록 한 손에 조심스럽게 감싸쥐었다.

그리고 다시 집을 향해 걷다가······.

“거기서 뭐해?”

“아, 아저씨.”

벤치에 앉아 있던 타샤가 얼굴을 밝히며 마주 인사했다.

사실은 아까 회식자리 때 다른 사람들한테 소개해 주려고 불렀는데 얘가 안 온다고 했지.

이수민이랑은 이미 안면도 있고 우철이나 김유진이 심성이 나쁜 사람도 아니긴 한데, 아무래도 자기 딴에는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애가 착해가지고.

“혹시 나 기다렸니?”

“아, 그게요······.”

타샤가 곤란한 듯이 웃었다.

진짜 안 올 거냐고 메시지 보냈을 때 언제 오는지 묻길래 뭔가 싶었는데······.

왜 기다렸는지 대충 짐작은 됐다.

“그래. 너도 마음고생 많이 했는데 우리도 마무리해야지.”

일단 벚꽃잎부터 주머니에 안 상하게 넣은 다음에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두 개 뽑았다.

나란히 벤치에 앉아서 말했다.

“이걸로 되려나?”

“······네?”

평소에는 워낙 똑부러져서 어른스러워 보였는데,

이렇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니까 그래도 나이 또래답다 싶었다.

“왜, 러시아에서는 보드카를 물처럼 마신다면서? 커피 가지고 되겠나 싶어서.”

그래도 애한테 술은 못 사주고, 적어도 맛있는 거라도 먹이고 싶은데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지.

애 엄마한테 금방 간다고 말도 해놨고.

“푸흣. 아뇨, 괜찮아요. 이거면 충분해요.”

그러면서 캔커피를 내 쪽으로 내민다. ······지금 건배하자는 건가?

손이 미묘한 위치에서 멈춰 있는 걸로 봐서는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나도 커피잔을 마주 갖다댔다.

탕, 하는 소리가 나고 타샤가 옅게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정말 고맙습니다. 다 아저씨 덕분이에요.”

“내가 뭘 딱히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잘못을 하면 했지.”

다행히 다 잘 끝나긴 했지만, 중간에 타샤 기절도 한 번 시켰고.

“아니에요. 아저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듣는 내가 머쓱해질 정도로 단호한 부정이었다.

괜히 멋쩍어져서 다른 말을 꺼냈다.

“아무튼 우리 지현이랑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줄래?”

“응, 당연하죠.”

“애가 타샤 너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집에 있으면 네 얘기밖에 안 해. 지현이 엄마도.”

“지현이 어머니요?”

타샤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애 엄마한테 듣기로도 자기를 어렵게 대한다고 하던데.

내가 옆에서 중재라도 좀 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되나? 네가 눈에 많이 밟히는 것 같더라구. 나한테 맨날 하는 말이 타샤 좀 잘 챙겨줘라, 이런 거야.”

“······그런가요.”

“응. 사실 지현이 엄마도 애 낳고부터 고생을 많이 했거든.”

“고생이라면, 어떤 걸······.”

“글쎄다?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이래저래. 그래서 네가 시무룩하게 있는 게 신경이 많이 쓰이나봐.”

“마음 써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해주시면-”

“직접 말하면 아마 더 좋아할걸?”

커피를 홀짝이면서 말하다 보니 벌써 캔이 가벼워졌다.

한 모금 크게 마셔서 다 비운 후에 함께 일어섰다.

우리 집과 타샤 집 중간지점에서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시간 너무 늦었으니까 오늘은 이만 들어가고, 다음에 우리 집에 한 번 와.”

“······네. 안녕히 가세요.”

애가 대문 열고 현관 문 닫히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나도 집에 들어갔다.

현관 앞에 서 있던 지현이와 애 엄마가 나를 반겨줬다.

“오빠, 왔어?”

“다녀오셨어요!”

“나 선물 가져왔는데.”

“선물? 어디?”

지현이가 내 빈 손에 시선을 두면서 물었다.

호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벚꽃잎을 꺼냈다.

“여기 선물.”

지현이가 보고 반색을 했다.

“맞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슬슬 벚꽃 피더라. 아빠, 이번주나 다음주 주말에 벚꽃 보러 가. 어때?”

“그럴까?”

“이번주도 가고 다음주도 가면 되지?”

가만히 듣고 있던 애 엄마가 말했다.

지현이가 흡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우리 집 내무부 장관님. 하시는 말씀마다 옳으신 말씀뿐입니다요.”

정겨운 대화.

여우 같은 와이프와 토끼 같은 자식.

그래, 이거지.

이게 결혼이고, 이게 가정이지.

내가 이 맛에 산다.

***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나탈리야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불이 꺼진 집은 칠흑같이 까맸지만 나탈리야에게는 별다른 문제는 아니었다.

환한 대낮이기라도 한 것처럼 걸어서 침실 문을 열었다. 그대로 침대에 몸을 누였다.

나탈리야는 한쪽 팔을 들어 얼굴에 댔다.

얇은 팔목에 닿은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겨우, 입 밖으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럴 리가 없어······.”

말에 물기가 스몄다.

나탈리야는 이어서 간절하게 되뇌었다.

“오빠가, 오빠가 알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나탈리야의 냉철한 이성은 말과 다른 생각을 했다.

오늘 들은 말.

유지현이 태어난 후로 그 여자가 마음고생을 했다.

먼젓번에 그 여자와 이곳 침실에서 나누었던 대화.

어쩌면 피해망상일지도 모르지만 나탈리야에게는 집착처럼 들렸던, 유지현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

유지현과 관련된 몇 가지 사건.

논리적인 단서들로 직조된 예감이 확신처럼 속삭였다.

유수현은, 차수희가 가짜라는 걸 안다고.

알면서도 묵인해주는 거라고.

심지어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은 ‘사랑’이라고.

“아냐!”

의도치 않은, 혹은 주체하기 싫은 비명 같은 외침.

그런 와중에도 나탈리야는 유수현을 위한 변명을 몇 가지나 찾아내고 있었다. 방법은 많았으니까.

‘오래 숨기다가 말한 건지도 몰라. 사실을 감춘 걸 수도 있어. 그 여자 스스로도 정확하게 어떻게 된 건지 모르는 걸지도······.’

하지만 무엇을 생각해내든 절망적인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유수현이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차수희’가 아닌 사람을 옆에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나탈리야 본인이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럴 리가, 없어······.”

나탈리야는 결심을 굳혔다.

무엇이 진실이건간에 확인을 해 봐야 했다.

두려움은 없었다.

설령 최악의 진실이 기다리더라도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나한테는 이제 남은 게 없잖아······?’

잃을 게 없으니 두렵지 않다.

나온 결론이 우스워 나탈리야는 실소를 흘렸다.

다음날, 학교에서 점심을 먹던 중 나탈리야가 유지현에게 물었다.

“근데 있잖아. 나 물어보고 싶은 거 하나 있는데.”

“응, 뭔데?”

“지현이 아버지랑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 엄마아빠? 우리 엄마아빠가 왜?”

“두 분이 어릴 적부터 엄청 친하다고 하셨지?”

“응. 미취학 아동 때부터!”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니 유지현의 대답이 활기를 띠었다.

나탈리야는 호흡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혹시 싸우신 적은 없어?”

“싸운 적? 글쎄? 우리 아빠 중학교 2학년 땐가? 아빠가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괜히 반항아처럼 다녀서 엄마가 속 좀 썩었다고 듣긴 했는데. 우리 아빠 지금도 그 얘기 나오면 막 쩔쩔맨다?”

“······그래?”

그건 나탈리야의 기억에도 있는 일이었다.

당장 자신이 차수희임을 자각할 때 꿨던 꿈의 내용이기도 했고.

“그거 말고는?”

“그거 말고?”

으음, 음 하는 침음성이 길게 이어졌다.

나탈리야는 숨 죽이고 기다렸다.

이윽고, 유지현이 망설이며 말했다.

“이거는 이제 지난 일이라서 말하는데, 나 중학교 들어갈 때쯤? 싸운 건지 뭔지 사실 나도 잘 모르는데. 하여튼 집안 분위기 엄청 안 좋았던 적 있어.”

“······그래?”

“근데 지금은 완전히 화해했구. 아, 그때의 잔재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바뀐 게 하나 있긴 해.”

“바뀐 거?”

나탈리야는 유지현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유지현이 답했다.

“응. 이제 이름을 안 부르거든.”

“이름?”

“우리 엄마 이름이 차 수자 희자 되는데.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려나? 우리 엄마 이름이 차수희란 말야? 원래는 아빠가 수희야, 수희야. 우리 수희. 차수희 씨. 이런 식으로 불렀거든. 근데 그 뒤로는 이름은 안 부르고 당

신, 애 엄마 이렇게만 부르니까.”

“······!”

나탈리야는 왼손을 들어서 숟가락을 든 오른손 팔목을 잡았다.

덜덜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게 처음에는 내가 괜히 엄청 섭섭했는데, 둘이 다시 찰싹 붙고 나서는 그럴 수도 있지 싶어서 지금은 별 생각 안 들어.”

“그렇구나······.”

그에 관련한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나탈리야는 아무런 내색도 않고 유지현과 다른 대화를 즐겁게 이어나갔다.

밥을 다 먹고, 양치를 하고 다음 수업까지 착실하게 받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온통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자신을 도둑질해 간 그 여자를.

반드시 죽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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