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머리가 나쁘면 몸이 편할 수도 있구나.
‘문제’라는 말에 선뜻 걱정부터 들었다.
물론 어지간해서는 남편인 유수현이 손끝 하나 다칠 일이 없다는 건 알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은 그런 것과는 무관했다.
차수희는 가장 먼저 질문해야 할 것부터 물어봤다.
“오빠는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나야 걱정 안 해도 괜찮은데, 타샤가 좀······.>
“타샤?”
<응. 거의 다 와 가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가서 할게.>
“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냥 기다리려니 도무지 안심이 되지를 않았다. 차수희는 대문 밖을 나섰다. 멀찍이까지 내다보이는 곳에서 서성이기를 십여 분.
이윽고 새까만 고급 승용차 한 대가 골목으로 진입해 왔다.
문이 열리고, 먼저 보인 것은 유수현이었다.
“오빠!”
“어? 당신 안에서 기다리지.”
미안한 투로 그렇게 말한 유수현이 차 안쪽으로 팔을 뻗었다. 의식을 잃은 채 축 늘어진 나탈리야를 유수현의 팔에 안기다시피 해서 모습을 보였다.
유수현아 그대로 나탈리야를 업고 걸어왔다.
‘무공은 뒀다가 국 끓여먹나?’라는 생각을 할 상황은 아무래도 아니어서, 차수희는 유수현에게 마주 달려갔다.
“괜찮아?”
“응. 그냥 기절한 거야. 일단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나탈리야의 집 방향으로 향한 유수현이 대문과 현관의 비밀번호까지 망설임 없이 눌렀다.
집 안에 들어서고, 나탈리야를 침실에 눕힌 뒤에야 차수희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야기하자면 좀 복잡한데, 간단하게 말하면 쟤. 타샤 말이야.”
“응. 타샤가 왜?”
“러시아로 도로 끌려갈 뻔했어.”
이어진 설명을 들어보니 과연 약속시간에 늦을 만도 했다.
“그러다가 싸움 나고······. 단순히 집안 일이면 내가 개입할 상황은 아니지만 이게 아무래도 복잡하게 엮여 있잖아? 그래서 그 사람들이 평화적으로 이야기 듣게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부서에 연락해서 인계하고 왔
으니까 지금은 아마 우리 쪽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
“그랬구나······. 근데 타샤는 왜 기절한 거야?”
러시아 사람들을 손봐주느라 늦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나탈리야는 왜 기절해서 유수현의 등에 업혀와야만 했는지. 그것 역시도 궁금했던 것이다.
한데 유수현이 굉장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으. 워낙 상황이 급박해서 그 와중에······.”
“실수로 맞았다구?”
“응. 정확하게는 나 감싸다가 그렇게 된 건데, 그렇게 세지는 않았거든······. 아직 못 일어나는 거 보면 애가 안 그래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나봐. 그래도 크게 다친 건 아니니까, 조금만 더 있으면 일어날 거야.”
“그래? 그러면 일단 오빠는 집에 가서 쉬어. 피곤할 텐데.”
“나? 별로 안 피곤한데. 굳이 따지면 나 때문에 저렇게 된 거니까 내가 사과 한 마디라도-”
난처한 듯이 말했지만 차수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으응. 사람 여러 명 있으면 오히려 정신 사나워. 어차피 오늘 나랑 이야기할 것도 있었고, 내가 보고 있다가 정신 차리면 좀 챙겨주고 집에 들어갈게.”
“그러면 그렇게 해 줄래?”
“응. 사과할 거면 나중에.”
“알겠어. 그러면 수고 좀 해줘?”
여전히 미안한 얼굴로 유수현이 현관을 나섰다.
배웅을 끝낸 차수희는 소리를 죽여 침실 문을 열었다. 나탈리야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새근새근한 숨소리를 들어보면 크게 이상이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이따금 이맛살을 찌푸리는 모습이 퍽 안쓰러웠다.
침대맡으로 다가간 차수희가 나탈리야의 이마께를 쓸어 올려줬다.
칠흑같은 머리칼이 걷히고, 아직 앳되지만 아름답고 기품 있는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예쁘네······.’
사실은 차수희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탈리야에게 쏠리는 호의와 연민 같은 것들을.
아무리 유지현과 친한 친구이고, 일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는 하나 유수현이 이미 이 집 비밀번호까지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차수희가 알기로는 이게 네 번째였다.
어릴 적 유수현이 살던 집, 차수희가 살던 집, 그리고 지금 유지현과 세 가족이 사는 집.
마지막으로 지금 이 집.
나탈리야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지금 같은 마음이 들었을까?
깊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어림도 없지.’
한숨을 얕게 내쉬면서 차수희는 한 번 더 나탈리야의 이마를 쓸어줬다.
그때 나탈리야가 무어라고 말을 흘렸다.
“왜······?”
‘응?’
처음 든 의문은 심각한 건 아니었다.
‘얘는 한국말 오래 배웠다더니 잠꼬대도 한국말로 하네?’
하지만 말이 이어지면서 차수희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해갔다.
“대체 왜······. 네가, 그럴 필요는······.”
잠꼬대에 불과한데도 거기에 담긴 감정이 선연하게 읽혔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애타게 슬퍼하는 음성.
나탈리야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일자로 반듯하게 다물고 있던 입에서 억누른 절규가 새어나왔다.
“으흐윽, 으으.”
차수희는 놀라서 나탈리야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었다.
“타샤, 타샤!”
“아······!”
여러 번 깨우고 나서야 나탈리야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눈을 떴다.
그러더니 갑자기 상반신을 확 일으켰다.
“타샤, 괜찮니? 악몽 꿨어?”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칼이 시야를 가렸지만, 곁에 있다가 깨워준 사람이 차수희라는 건 목소리로 알았는지 나탈리야가 속삭이듯이 답했다.
“아니, 아뇨. 꿈을, 꾼 것 같은데······.”
그렇게만 말하고는 한참이나 고개를 숙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차수희는 이불에 눈물이 떨어지는 걸 봤다.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괜찮니?”
“······네. 괜찮아요.”
나탈리야가 머리칼을 정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차수희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
오늘 새벽에 꿨던 꿈.
저절로 연민과 호의가 들게 했던, 슬퍼보이는 얼굴.
그 여성과 지금 나탈리야의 얼굴이 한순간 겹쳐 보였다.
***
“아무래도 수상해.”
거실 쇼파에서 야채주스를 빨대로 흡입하던 이수민이 툭 말을 흘렸다.
쇼파가 워낙 큰 덕분에 이수민과 몸을 닿지 않고도 반대편에 몸을 누일 수 있었던 천유화가, 읽고 있던 종이뭉치를 잠시 내려놓고 물었다.
“뭐가?”
“한 번만 더 반말하면 냉동고에 있는 고기 전부 다른 집에 나눠줄 거야.”
“······뭐가요.”
“걔 말이야. 나탈리야.”
“뭐가 수상하다는 말이야······요. 사실은 스파이의 스파이였던 거다, 뭐 이런 소리야? ······요?”
“그럴 수도 있지.”
“얼씨구.”
비웃음과 함께 천유화는 들고 있던 종이뭉치를 아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죽거리며 말했다.
“전대 교주님. 호랑이 없는 곳에서 힘세고 성질 더러운 여우 노릇 톡톡히 했던 우리 진천군 교주님?”
“너 안 되겠어. 오늘 예절교육을 다시 받아야-”
“부러우면 그냥 부럽다고 하시는 게 어때요?”
날카로운 공격에 이수민은 들었던 주먹을 내려놓을 생각도 못하고 더듬거렸다.
“부, 부러워? 내가 고등학생을 왜 부러워해. 너 지금 미쳤어?”
“안 미쳤는데? 왜요, 옆 산 살았던 호랑이 좋아하는 여우의 마음을 들켜서 부끄러우신가?”
“······!”
천유화가 마지막 일격을 꽂아넣었다.
“부끄러울 게 뭐 있어. 어차피 당사자인 호랑이 빼고는 다 아는걸.”
듣고 그냥 넘길 수가 없는 말이었다.
이수민이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다 안다고······?”
“흥, 그걸 누가 모르겠어. 괜히 사단날까봐 말을 안 하는 거지. 나야 도저히 이해는 안 되지만, 호랑이께서 누누이 말하는 거 있잖아. 기왕 여기서 살게 된 거 열심히 살아보자고. 그런 면에서 보면 아주 이상한 것도 아니긴
해. 열심히 한 번 해보세요.”
“······별로 그럴 생각 없어.”
“하긴 어차피 안 될 거 굳이 힘뺄 필요도 없긴 하네. 아무튼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요. 자기는 기껏해야 일 떠맡을 때만 얼굴 보는 게 다인데, 나탈리야? 걔는 툭하면 만난다잖아. 그거 때문에 그러는 거 아냐?”
“꼭 그런 것 때문은 아냐.”
“와, 있긴 있다는 거네? 걔랑 나이 차이가 얼만데 지금-”
퍽! 퍼억!
효과적인 몇 번의 주먹질로 옛 부하의 밉살스러운 입을 침묵시킨 이수민이 말했다.
“대머리 좋아하는 너보다는 낫잖아.”
“대, 대머리가 뭐가 어때서······.”
천유화의 반론 같은 건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었다.
이수민은 다소간의 확신을 담아 말했다.
“아무튼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고, 내 감이 말하고 있어.”
그러면서 나탈리야라는 소녀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봤다.
예쁘고, 붙임성 좋고, 똑똑하고, 살면서 정 붙일 사람 없다가 여기 와서 어른들 일에 얽히게 됐다는 사연까지 갖췄다.
이게 소설이라면 완벽한 히로인감이라고 해도 좋았지만······.
“이상하단 말이야. 분명히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보이는 그대로도 아니야. 뭔가 있는 게 확실해.”
“하무린이 직접 이상한 점 없다고 말했는데? 사랑하는 여자의 감이란 거야?”
“몰라. 아무튼 조만간 한 번 알아볼까 생각은 하고 있어.”
“괜히 들쑤시다가 또 일 망쳐서 미움 사는 건 아닌가 몰라.”
다시 천유화가 있는 곳까지 가기 귀찮았던 이수민은 근처에 있던 방석을 집어던졌다.
천유화가 황급히 종이뭉치를 들어 방어했다.
공격에 대신 얻어맞은 종이뭉치들이 팔랑거리며 허공에 휘날리는 걸 보면서 이수민이 물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보고 있는 게 그거야?”
“네에. 하가놈이 시킨 거.”
“······차원이동이라고 했던가? 그런 걸 왜 연구하라는 거야.”
“내 말이 그 말이야!”
몸을 벌떡 일으킨 천유화가 온갖 울분을 담아서 하소연을 시작했다.
“말이 차원이동이지, 이게 되겠냐고요. 제대로 실험도 못하는데 이론을 어떻게 만들란 말이야?”
“너랑 나머지 애들 넘어올 때는?”
“그때야 성화가 있었잖아, 성화가. 흔적도 있었고, 힘도 어마어마하게 끌어다 쓸 수 있으니까 간신히 한 거지. 거창한 이론이 있어서 한 게 아니라고. 그것도 잘못하면 넷 다 차원미아 같은 거 됐을걸? 지금 생각해도 기적
이었지.”
“근데 넘어오긴 왜 넘어왔어.”
천유화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거기 있어봤자 우리가 뭘 더 해? 아무런 할 일도 없이 떵떵거리고 살 바에야 운혜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온 거지. 성화 터지기 직전에 운혜 표정이 어땠는지 모르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는데 그걸 어떻게 그냥 둬요.”
“······.”
“아무튼 차원이동이 가능하면 시간이동도 될걸? 계통은 아마 비슷할 테니까.”
“정말이야?”
몇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법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이수민이 놀라서 물었다.
아무리 무공이니 마법이니 고도로 발달하면 신의 영역까지 간다지만 타임머신처럼 시간이동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다.
천유화가 답했다.
“물론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훠얼씬 어렵긴 하겠죠. 그냥 가는 길은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이런 말이지. 당장 하가놈이 독촉하는 거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그건 너무 먼 얘기고.”
“근데 말이야.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너네가 넘어올 때는 성화 힘으로 왔다면서.”
“맞는데요?”
“그리고 지금은 이론 만들기도 힘들다면서.”
“뭐야. 본론을 말해요.”
이수민은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러면 지금은 왜 굳이 이론이 필요하지? 어차피 만들어봐야 쓸 사람이라고는 하무린, 아니, 지현이 아빠 말고는 없잖아.”
“······네?”
“보편적인 이론 같은 거 말고 그냥 맞춤식으로 해. 동력이라고 하나? 그런 건 그 사람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하면 너네 넘어올 때처럼 어떻게 되지 않으려나? 엄청 세니까.”
천유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괜히 머쓱해진 이수민이 재차 물었다.
“아냐? 나야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되는대로 말해 본 거긴 한데.”
“······머리가 나쁘면 몸이 편할 수도 있구나······.”
이수민은 천유화가 정확히 무슨 의도로 말한 건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알아들은 것에만 대응하기로 했다.
퍽, 퍼억!
타격음이 거실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