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문제가 좀 생겼어.
***
하늘거리는 흰옷을 입은 여인이 나무 아래 그늘에 걸터앉았다. 햇빛이 들지 않는 곳이라 시원했다. 여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기대감과 즐거움을 담은 콧노래 소리.
‘오늘이라고 했지?’
아마도 오늘, 늦으면 내일이나 모레.
지난번에 듣기로는 그랬다.
심지어 두 명이기까지 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는 희망을 담아 바랐다.
‘둘 다 오면 좋을 텐데.’
관리원에게 물었을 때는 애매한 답만 들었다.
한 명은 거의 확실한데 나머지 한 명은 갈수록 아닌 것 같다는 둥.
최악의 경우에는 둘 다 아닐 수도 있다는 둥.
‘또 뭐라고 했더라? 한 명은 너무 꼴통이라서 오면 기강부터 세게 좀 잡고 시작해야 될 거라고 했던가?’
“아아, 기대된다.”
웃으며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혼잣말.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던 새들이 그 소리에 놀라 멀리로 날아갔다.
그녀는 다시금 생각했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산전수전 다 겪은 관리원이 혀를 내두르는지 몹시 기대가 되었다.
그만큼이나 궁금하면 내려다보고 구경을 해 볼 법도 했지만······, 왠지 그러기는 싫었다.
제일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단 한 번 얼굴만 확인했을 뿐 그 후로는 살피지 않은 것이다.
대신 안내역을 자청했다. 선배로서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 김에 한 자리에 앉혀두고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볼 의도였으니까.
사실 이야기를 듣는 게 진짜 목적이기도 했고, 그러려면 한 명보다는 두 명이 다 오는 게 훨씬 좋았다.
‘점이라도 쳐 볼까?’
앉은 자리 주변을 둘러보니 긴 줄기를 따라 양쪽으로 잎이 나 있는 풀이 눈에 띄었다.
풀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랜만에 깨어났는데 잔소리 듣기는 싫으니까.’
허공에 대고 손을 한 바퀴 휘저었다.
빛이 미약하게 일어난 후 그녀의 손에는 방금 본 것과 비슷하게 생긴 풀이 쥐어져 있었다.
잎사귀를 하나씩 뜯어내며 속으로 되뇌었다.
‘두 명 온다, 한 명 온다, 두 명, 한 명.’
“······한 명.”
잎사귀를 네 개 남기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
더 할 것도 없이 모두 뜯어내면 한 명이다.
볼을 부풀리고 얼굴을 한 번 찡그린 그녀는 다시 멀쩡한 풀을 하나 만들어내어 손에 쥐었다.
다시 한 번 같은 일을 반복했다.
“두 명.”
남은 잎사귀는 다섯 개.
“이게 뭐야.”
볼멘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풀을 휙 던졌다. 땅으로 천천히 내려오던 풀이 입자가 되어 사라져갔다.
심통이 난 그녀는 다시 나무에 기대어 누웠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한 번만 더 해볼까?’
신입 두 명과 자신을 합치면 세 명이니까.
세 번 정도는 하는 게 이치에 맞는 것 같았다.
과연 옳은 선택이라며 자찬한 그녀가 다시 한 번 손을 휘저으려 할 때.
저 멀리 구름 어귀로 푸른빛이 번쩍였다.
‘왔나봐.’
그녀는 몸을 일으켜 푸른빛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확인을 해 보니.
‘한 명이네······.’
그녀와 비슷한 옷차림.
흰옷을 입은 여인이 등을 보인 채 구름 아래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가가면서 말을 걸었다.
“얘.”
“······.”
“얘, 거기선 안 보여.”
‘대답을 안 하네?’
조금 약이 올랐다.
분명히 꼴통 소리 들은 건 사내아이 쪽인 걸로 알고 있는데, 지금 보기에는 이 여아도 만만찮은 것 같았다.
그녀는 발걸음을 옮겨 여인의 앞에 섰다.
손바닥을 뻗어서 얼굴 근처로 대고 흔들었다.
“안 보인대도?”
“죽기 싫으면 저리 치워.”
싸늘한 음성.
하지만 실상은 잔뜩 풀이 죽어 있다는 걸 그녀는 알았다.
저절로 측은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여엉차.”
그녀는 여인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이게 해 줄까?”
“뭐?”
그제서야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흑단 같은 머리칼이 걷히고 눈이 마주쳤다.
‘와아.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쁘네?’
그녀는 으스대는 어조로, 상냥한 말을 건넸다.
“그으. 실은 내가 힘이 좀 되거든. 인사 못 나눈 게 있으면 잠깐 시간 만들어줄 수 있는데, 어때?”
“······정말인가?”
“응. 인사도 나눌 수 있고, 너무 아쉬우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꼬드겨봐도 되구.”
‘들키면 혼이 좀 크게 나겠지만.’
사실 혼이 나는 걸로 그치면 다행이라 여겨야 할 정도였지만, 이 여아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신입 한 명 더 데려오면 결과적으로는 좋은 거잖아?’
하지만 더없이 좋은 제안에도 여인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녀는 여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봤고, 곧 이유를 알았다.
‘얘······. 혹시 무서워서 이러나? 한 번 더 거절 당할까봐? 그건, 너무 안쓰러운데······.’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고.
“얍!”
기합소리를 내며 양손을 내뻗었다.
구름이 확 걷히고, 보이지 않던 아래가 환히 내려다보였다.
“이제 보고 말 걸면 돼.”
여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무어라고 입을 떼려고 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구, 나 옆에서 구경만 좀 할게.”
“······구경?”
“응. 그리고 앞으로 반말 쓰면 혼난다? 선배님이라고 불러. 선배님. 아,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아.”
여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후 구름 아래의 세상을 애타게 응시했다.
‘힘내!’
속으로 응원을 건넨 그녀도 마찬가지로 구름 아래로 시선을 두었다.
그리고.
차수희는 꿈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침대였다.
새벽녘. 해도 아직은 어스름하게 떠서 밖이 어둑했다.
바로 곁에는 사랑하는 남편 유수현이 자고 있었다.
차수희는 얼굴을 손으로 짚으며 방금 꿨던 꿈을 떠올렸다.
‘······뭐였을까?’
깨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희미해졌다.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어떤 여성과 대화를 했다는 사실과, 처음 얼굴을 대면했을 때 느낀 호의와 측은함. 그 정도였다.
곱씹어보려고 해도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제대로 잡히지가 않았다.
‘내 기억······, 과거 같은 건가?’
차수희는 유수현이 잠에서 깨지 않게 조심스레 침대에서 나왔다.
이왕 일찍 일어났으니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공을 들여서 아침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가볍게 몸단장을 내고, 부엌으로 가서 우선 커피를 한 잔 내렸다.
헤이즐넛 향이 집 안에 그윽해지는 걸 느끼며 차수희는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너는 아는 게 있어?’
성화가 불안하게 요동쳤다.
침묵이지만 침묵이 아니었다. 마치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고 대답하는 것 같달까.
차수희는 피식 웃고 말았다. 꼭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서.
사실 물어보면서도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이런저런 풍파를 일으킨 말썽쟁이긴 해도, 성화 그 자체에 악의는 없다는 걸 삼 년 가까이 같이 지낸 지금은 안다. 복잡한 사정 같은 것도 잘 모를 거고.
지금에 와서는 꼭 귀여운 어린 여자애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나 같은 악당이랑 같이 지내게 해서 미안해?’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죄가 쌓여가는 것일지도 몰라.
차수희는 자조 섞인 생각을 했다.
문득 고동이 느껴졌다.
우웅, 우우웅.
“뭐야? 혹시 나 위로하니?”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는 그때, 안방 문이 열렸다.
눈을 비비며 유수현이 걸어나왔다.
차수희는 살갑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빠 잘 잤어?”
“응. 아흐음. 당신은 왜 일찍부터······?”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하품을 하며 유수현이 물었다.
“그냥 좀 일찍 깼어. 오늘 할 일도 하나 있어서 그런가?”
“아, 타샤랑?”
“응.”
차수희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기대도 하고, 준비도 해 왔던 일이었다.
‘타샤 걔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지만······, 이야기는 한 번 해봐야지.’
이미 들은 바가 있다.
나탈리야도 유수현이 지금 처리하고 있는 업무에 어느 정도 얽히게 됐다고.
‘나는 걔 진심인 것 같기는 하던데. 당신이 한 번 알아보는 건 어때?’
유수현은 그렇게 말했다.
‘나도? 지현이 엄마로? 아니면 힘을 숨긴 어쩌구 그런 걸로?’
‘일단은 전자. 어디다 말하고 다닐 애는 아니겠지만 굳이 당신 이야기까지 할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면······, 오빠한테 살짝 들은 게 있다 정도로만 해서 한 번 이야기 나눠볼까?’
‘응. 그게 좋겠어. 시간 약속은 내가 잡아서 날짜 정해지면 당신한테 말해줄게.’
그 약속이라는 게 바로 오늘이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여유가 생긴 이 시점.
“지현이는 오늘 따로 약속 있다고 했으니까, 학교 끝나고 타샤만 따로 만나서 데리고 올게.”
“맛있는 것 좀 해놓는 게 좋으려나?”
차수희는 순간적으로 나탈리야가 좋아하는 걸로 보였던 몇 가지 메뉴를 떠올렸다.
유수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렸다.
“걔 그 이야기 나오면 엄청 미안해하거든. 아마 제대로 먹지도 못할 것 같은데······.”
“아니면 디저트 같은 거라도. 케이크 좀 구워볼게.”
“그건 내가 찬성.”
“그리고 오빠, 우리 집 말고 타샤 집에서 보는 게 더 좋겠어. 자기 집이면 더 안심도 될 거구. 음식이야 바로 앞이니까 내가 들고 가면 되잖아?”
그 말을 들은 유수현이 지긋이 웃었다.
“알겠어. 당신 말대로 하자. 그러면 이제 나 씻고 나온다?”
“아, 잠깐만.”
차수희는 유수현에게로 다가갔다.
눈가로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입술이 살짝 맞닿았다.
“아침밥 하기 전에 연료 좀 공급했어. 이제 가도 돼.”
“이 요오망한······.”
“응?”
“아냐. 씻고 나올게.”
곧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조금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차수희는 생각했다.
남편은 단지 타샤라는 아이에 대해 확신을 얻고 싶은 것뿐이겠지만 자신에게는 또다른 목적이 있었다.
성화를 넘겨줄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사실 후보를 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로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했고, 마나에 뛰어난 재능을 가져야 했다.
그러니 아직은 시기상조이지만,
나탈리야에게 맡겨도 된다는 확신이 선다면······.
그 후에는 곧바로 원래 계획하고 있던 걸 실행해야만 했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해야 돼.’
너무 행복해서 이대로 안주해버리기 전에.
그런 생각도 들었다.
오늘 꿨던 꿈.
아마 자신의 기억일 것인 그 꿈의 정체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후에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
유수현과 유지현이 집을 나선 후, 차수희는 정성껏 집안을 청소했다.
빨래를 하고 바깥에 널어놓는 것까지 끝나고 나니 벌써 오후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잠깐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온 차수희는 정성들여서 음식을 준비했다.
‘지현이한테는 편식하지 말라고 했으면서 정작 자기도 고기 좋아하는 것 같았지?’
음식 취향이 비슷한 것도 어쩐지 친근감이 들었다.
유수현이나 유지현은 말할 것도 없고, 차수희 본인도 사실은 고기 반찬을 더 좋아했으니까.
‘갈비찜이랑, 불고기랑······, 러시아에서는 보통 뭘 먹지?’
그런 와중에 달콤한 케이크도 한 판 구워냈다.
모든 준비가 끝나니 오후 네 시 삼십 분.
다섯 시 삼십 분이 약속시간이었으니 이제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차수희는 유수현의 휴대전화로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나 집에 있는데 올 때 연락해줘.>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곧 연락이 있겠지, 하며 차수희는 계속 기다렸다.
‘······늦네?’
벌써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타샤의 집 근처로는 인기척도 없었다.
일곱 시쯤 되면 유지현도 집에 도착할 테니 그 전에 찾아보기라도 해야 하나 싶어 차수희가 자리에서 일어섰을 무렵.
유수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응, 오빠. 좀 늦어졌네? 오고 있어?”
수화기 너머로 곤란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가고 있긴 한데······, 문제가 좀 생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