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하나도 안 변했어.
“가다가 들킬 것 같냐? 자신 없으면 말해라. 내가 좀 도와주게.”
미행을 계속하면서 우철이에게 말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이놈 성취가 모자란 편은 아니다. 원래도 제법 셌던 데다가 요 몇 년간은 내가 따로 가르친 것도 있으니까.
하지만 산업 스파이 놈들이 어느 정도 하는지도 모르니까 물어본 건데,
“아닙니다.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도 제 기준이지요. 저런 놈들한테 들킬 정도는 아닙니다.”
웬일로 호기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자식이 평소에도 이러고 다닐 것이지.
딱 삼십 분 더 걸렸다.
사마군 애들 들쳐멘 산업 스파이들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쫓아가다 보니까 어디 버려진 해안가 같은 곳에 도착했다.
외국으로 빼돌릴 심산이었는지 바다 쪽에 배까지 한 척 둥둥 띄워져 있었다.
저기 안에도 한 패가 여러 명 있으려나?
“사부님,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럴래?”
“네.”
내 기억에 이놈이 나한테 저 대사 친 다음에 그대로 이뤄진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은데.
워낙 눈이 똘망똘망해 보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철이는 다짐을 지켜냈다. 인질 풀어내고 여러 명 동시에 상대한다고 코에서 쌍코피가 나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팔짱만 끼고 기다렸고 끙끙대면서도 정리를 끝마친 우철이가 다시 돌아왔다.
“수고했다.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나중에 요약정리해 줄 테니까 앉아서 쉬고 있어.”
그리고 취조를 시작했는데······, 아까 했던 말을 번복해야 했다.
“우철아! 우철아!”
“네? 왜 그러십니까!”
“빨리 와봐. 빨리!”
벌떡 일어난 우철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
“이게 진짜 무슨 일이냐······.”
“오빠 왜? 뭐가 잘 안 풀렸어?”
집에 돌아와서 씻고 방에 들어오면서 나도 모르게 한 말을 애 엄마가 들었나 보다.
침대로 퍽 엎어지면서 말했다.
“나 전생에 무협소설 한 편 길게 썼다고 말했었지?”
“응. 그랬지? 그게 왜?”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한 문장으로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런 느낌인가?
“알고 보니까 무협이 아니라 퓨전 판타지였더라구.”
정말로 까맣게 몰랐다.
서역에 마법 가문 같은 게 정말로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뜬소문인 줄만 알았지.
“지현이 부하들이 가지고 온 거랑 많이 겹치나 보더라구? 그것 때문에 캐고 다녔다나봐.”
“그러면 저번에 오빠가 말한 건? 그렇게 바로 접촉할 수가 없다고 한 거 있잖아.”
나도 그 점이 의문이긴 했지.
일단 이름이랑 간단한 신상명세를 파악할 수 있다면 사마군 애들까지 손이 닿는 것 정도는 자금이랑 인력이 투입되면 어찌어찌 가능할 터였다.
정보기관이니 어쩌니 하는 사람들은 밥 먹고 하는 일이 다 그걸 텐데 거기까지 알고도 감을 못 잡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하지만 아예 제로베이스에서 우리 쪽에 안 들키고 그 정보를 얻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했다.
천유화가 느낀 기시감을 피해망상이라고 단정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였지.
답은 하나였다.
어디선가 정보가 새어나간 거다.
업무상으로 기밀이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애 엄마한테 말해줄 수가 없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함부로 말하기도 싫었고.
“그쪽도 죽기살기로 했나봐. 알아보고는 있는데, 당신은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응.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무 무리만 하지 마.”
“매일 오후 세 시도 안 돼서 집에 오는데?”
“다니기 싫으면 확 관둬도 돼.”
“······그럴까?”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자면 애 엄마랑 같이 보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고 싶었다.
불안하니까.
애 엄마가 내 코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지현이가 아빠 실직했다고 싫어할 것 같아. 우리 타협점을 한 번 찾아보자. 지금보다 퇴근 한 시간만 일찍 하는 건 어때?”
“김유진 그 사람 안 그래도 나한테 들어가는 월급 아까워하는 것 같던데.”
사회 지도층이라서 그런가? 자기 돈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쩨쩨하게시리.
“아무튼 머리 아픈 이야기는 그만. 당신은 신경 쓰지 마. 우리 지현이는 고등학교 재밌게 다니구, 당신은 집에서 글 쓰고, 나는 일해도 돈 벌어오고. 그렇게 우리 계속 행복하게 살자.”
“응? 누구는 안 그러고 싶다는 것처럼 말하네?”
애 엄마가 웃는다.
팔을 뻗어서 확 끌어안았다.
“뭐야? 유수현 씨 오늘은 평소보다 너무 갑작스럽게 터프한데요?”
“그냥, 좋아서.”
지금 나 자신이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강박관념. 트라우마. 집착. 소유욕. 뭐 기타 등등.
하지만 별로 자제하고 싶지도 않다.
뭔가를 잃어버리는 건, 잃어버려야만 하는 건 이제 치가 떨렸다.
그러니까.
지금 내 삶을 지켜내려면 확인을 해 봐야 했다.
산업 스파이한테서 캐낸 굵직한 마법 가문의 이름들.
우연의 일치는 아닐 거다. 그중에는 분명······.
***
나탈리야는 진하게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괜히 꼬리를 밟힐까 가문에서 차출해 온 사람들은 흔적도 지우고 다 돌려보냈지만, 현재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 알아낼 루트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나탈리야의 계산대로라면 오늘이나 내일 접촉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커피잔에 입을 대던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속담 하나를 떠올리면서 나탈리야는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현관을 나서서 대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깥에 서 있던 상대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유수현이 살짝 난처한 얼굴로 말해 왔다.
“갑자기 미안하다. 잠깐 시간 괜찮니?”
“아, 네. 들어오시겠어요?”
두 사람이 나란히 집 안으로 향했다.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팔짱을 낀 것도 아니다. 함께 걸었을 뿐이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나탈리야는 행복감에 몸이 두둥실 뜨는 것만 같았다.
“방금 커피 내려둔 게 있는데 괜찮으시면-”
“응. 한 잔만 줄래?”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탈리야와 유수현이 얼굴을 마주했다.
나탈리야는 웃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지현이랑 아까도 연락했는데 집에 있다고 하던걸요.”
“아니. 지현이 문제는 아니고. 그 일 때문에.”
‘그 일’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나탈리야는 표정을 어둡게 했다.
자연스럽게 얼굴에 묻어 나온 감정을 파악했는지 유수현이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타샤 네가 드러난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뇨, 제 문제는 괜찮아요. 혹시 더 폐를 끼쳐드린 게 아닌가 싶어서······.”
“아냐. 오히려 네 덕분에 잘 풀리고 있으니 너무 마음 안 써도 된다.”
“그런가요?”
나탈리야는 고개를 숙였다.
서양식으로 하자면 트로이의 목마.
동양식으로는······.
‘사자 뱃속의 벌레?’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 나탈리야의 목적에 어느 정도 걸맞는 말이었다.
자신이 차수희라는 것을 자각한 후 나탈리야가 목표로 했던 첫 번째 지점.
우선은 유수현의 아군이 되어야 했다.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던 자들이 덜미를 잡혔다는 소식을 들은 나탈리야는 본격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부리던 사람들은 벌써 흔적을 지워 돌려보냈고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뿐.
책임자가 자신이었다는 것은 밝혀낼 수 없다.
다른 가문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상황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유화 언니’라는 정보가 자신으로부터 새어나갔다는 건 유추가 가능할 터.
나탈리야가 찾아낸 돌파구는 역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아무것도 모르는 장기말이었던 ‘척’하는 것.
‘저는 정말로 몰랐어요······.’
유수현과 대면한 그날이 가장 힘들었다.
우선 유수현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었고,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듣지는 못했던 유수현이 뿜어낸 압도적인 기세에 놀랐다.
무엇보다 유수현이 자신을 노려보며 낮은 어조로 추궁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한테는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어. 기회를 줄 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좋을 거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다행히 나탈리야의 연기는 성공적으로 먹혔다.
겁먹은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준 모습이라면 단순히 겁을 먹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러니까.
나탈리야는 미안한 티를 냈다.
오래된 마법 가문 따위에는 염증을 내는 자신이, 가문에 어떠한 애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신이, 그들의 문제에 얽혀 의도치 않게 유지현과 유수현에게 위험이 될 수도 있는 일을 만들었다는 사실.
그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실상은 유수현이 받아들인 것과는 조금 궤를 달리하겠지만 어쨌든 거짓은 아니었으니까.
가장 위험했던 첫 순간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 후에 나탈리야는 빠져 있던 조각 하나도 자연스럽게 메웠다.
‘한국에 나타났다는 스미스라는 헌터는 오빠였겠구나······.’
본래 알고 있던 헌터 스미스에 대한 정보.
유수현이 보여줬던 강대한 기세.
출처를 감추고 정보를 슬쩍 흘릴 때마다 늦어지는 퇴근.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적인 이유 하나.
‘지현이도 그 정도로 뛰어난 각성자고, 우리 오빠가 보통 사람일 리는 없잖아?’
논리적인 판단과는 상관이 없는 다소 팔불출적인 감이었지만 확실히 들어맞기는 했다.
이후로 오늘까지 열흘.
날이 갈수록 유수현이 보여주는 경계심이 옅어져 나갔다.
조금씩, 하지만 착실하게.
‘아직 완전히 믿는 건 아닌 것 같지만 말야······.’
그래도 나탈리야는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이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그녀가 유수현이라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았다.
‘내가 아는 오빠라면 나를 이용하겠다는 생각만 하지는 않아. 이중 스파이가 아니라는 확신이 든 후에는 자기 울타리 안에서 지켜주려고 하겠지.’
확신을 들게 할 방법 역시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까지 가면 첫 번째 목표는 거의 완벽하게 달성할 수 있다.
나탈리야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목 아래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견뎌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와서 너무 좋았어요······. 지현이도, 아저씨도, ‘지현이 어머니’도 다들······.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유수현이 달래듯이 말했다.
“걱정 안 해도 된다. 타샤 너는 지현이 친구고, 앞으로도 우리 지현이랑 친하게 잘 지내주면 돼.”
“······저한테,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나탈리야는 얼굴을 덮었던 손을 떼어냈다.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유수현의 표정으로 난감하다는 기색이 스쳤다.
나탈리야는 잠시 고민했다.
‘······할까?’
계획에 없던 요소는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그랬다.
하지만 갈등이 되는 것도 사실.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했잖아. 이번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탈리야는 그런 논리로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리고, 곧바로 펑펑 울었다.
유수현이 말릴 틈도 없이 끅끅거리며 오열하는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힘이 다 빠진 것처럼 나탈리야가 탁자 위에 엎어졌다.
몇 초의 시간이 흐르고,
어깨로 손이 닿는 것을 느꼈다. 나탈리야는 생각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거, 너무 울지 말고. 내일 눈 퉁퉁 부으면 지현이가 놀릴라.”
“마법 쓰면 돼요······.”
억지로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유수현이 마주 웃어줬다.
‘역시 오빠는 하나도 안 변했어.’
자신이 알던 사랑하는 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절대로 모를 것이다.
지금 곁에 있는 그 여자가 가짜라는 것 따위 유수현이 알 리가 없다.
알고도 내버려둔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나탈리야는 희망처럼 확신했다.
‘내가 잘해야 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 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유수현과 유지현 두 사람의 평온한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에 정히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단 한 명.
단 한 명에게만 말할 것이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면······.
‘내 몸 돌려줘! 이 도둑고양이 같은 년! ······뭐, 이런 대사려나?’
나탈리야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