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82화 (82/130)

82. 그 인간들 다 낚인 거야.

***

“왜 말 안 해줬어?”

억눌러서 참는 듯한 목소리.

나탈리야는 유지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느새 입은 꾹 다물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볼이 빵빵한 걸 보면 심통이 난 것처럼도 보였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유지현의 표정이 이리저리 변하다가, 그대로 손을 뻗어왔다.

양손으로 나탈리야의 어깨를 잡고 흔들면서 격렬하게 소리쳤다.

“왜? 대체 왜?”

“그러니까, 그게 있잖아-”

“타샤 네가 1등인 거 왜 말 안 했냐구!”

“아, 잠깐만. 밀면 넘어진다니까?”

“이 사기꾼! 으아아!”

요상한 외침과 함께 유지현이 나탈리야의 몸을 확 끌어안았다.

나탈리야는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과 함께 도보 한복판에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진짜아, 나 창피해 죽겠어. 괜히 2등했다고 자랑이나 하구. 막 험담하구. 타샤, 솔직히 말해봐.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

“무슨 생각?”

“‘와아, 쟤 되게 웃긴다. 실기만 쳤으면 자기가 1등이래.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람? 오홍홍.’ 막 이런 거!”

여전히 울상인 얼굴로, 나탈리야의 차분하고 기품 있는 말투를 흉내내며 유지현이 말했다.

‘내가 평소에 저렇게 말하나? 그리고 손으로 입은 왜 두드려?’

나탈리야는 고민하던 것도 잠시 잊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짓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유지현이 비명처럼 외쳤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나봐! 그거는, 그으. 그릇이 옹졸하다 못해 간장종지보다도 작은 내가 시기질투에 빠져서 음해한 거야! 그거 전부 다- 거짓말인 거 알지? 허풍이었어, 허풍! 미안해애······.”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부여잡고 쩔쩔매는 유지현을, 이번에는 나탈리야가 끌어 안아줬다.

그리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런 생각 안 했어.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진짜? 그래도 미안한데.”

“정 그러면 나 소원 하나만 들어줄래?”

“무슨 소원?”

유지현의 궁금증은 집에 도착해서야 풀렸다.

셋이서 함께 앉은 식탁에서 나탈리야가 말했다.

“저번에 보니까 오이를 안 먹더라?”

“오이?”

“응. 이제부터 편식하지 않기. 내 소원은 그거.”

“소원?”

차수희가 물었다.

나탈리야는 웃는 낯을 만들었다.

예의 바르고 상냥한 모습. 그 외에 다른 어떠한 해석의 여지도 주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리고 답했다.

“지현이가 저한테 미안하다고, 소원 하나 들어준다고 했거든요. 그래서요.”

“저기, 타샤. 오이는 있잖아. 오해할 수도 있는데, 나는 절대로 오이가 싫어서 안 먹는 게 아니다? 정말로 못 먹는 거야. 왜냐하면 오이를 못 먹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데, 그게 보통 사람보다 좀 더 발달된 미각을 가졌다는

증거라서······, 알았어. 먹으면 되잖아.”

유지현이 떨리는 젓가락질로 오이채를 딱 한 가닥만 집었다.

입에 넣은 그대로 물을 들이켜 씹지도 않고 삼켰다.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래서 친구 잘 사귀라는 말이 있나봐. 나랑 오빠가 몇 년을 못 고치던 걸.”

“여기 우리 집인데 왜 내 편은 아무도 없어······?”

유지현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나탈리야는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 편이라는 말은 옳지 않았다.

그저 이 자리에 뻔뻔스러운 도둑이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식사를 끝낸 후 나탈리야는 부탁을 하나 했다.

어릴 적 사진 같은 게 있으면 보고 싶다고.

유지현은 흔쾌히 몇 권이나 되는 앨범을 방으로 가져와서 좌르륵 펼쳤다.

“봐, 이게 어릴 때 나. 그리구 우리 엄마랑 아빠. 지금이랑 완전 똑같지? 그리구 이거는 아빠랑 엄마 어릴 때. 둘이 갓난아기 때부터 제일 친했대.”

유지현이 자랑처럼 말했다.

나탈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리고 다시금 확신했다.

자신이 차수희가 맞는다는 것을.

여러 장의 사진들과 가지고 있는 기억이 정확히 일치했다.

기실 확인할 것까지도 없었다.

오늘 새벽에 꿨던 몇 가지 꿈들.

저마다 시기는 달랐던 것 같지만 자신과 유수현이 언제나 함께 나왔다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중 마지막 꿈을 간신히 잊지 않고 잠에서 깨어나니, 불현듯 잊고 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언제나 함께했고, 어째서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사랑하는 사람. 유수현.

이제 나탈리야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로지 ‘차수희’로만 받아들인다.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한 러시아 명문가의 직계 후손.

마법사로서 지닌 강대한 힘.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유수현 곁에 있을 때만이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공허함을 채울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한 명이 더 있었다.

“타샤, 왜 그래?”

“으응. 아냐. 지현이 어릴 때 엄청 귀여웠네, 싶어서.”

“나? 그런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내 딸이야, 라고 되뇌이면서 나탈리야는 유지현을 바라봤다.

차수희로서 가지고 있는 마지막 기억.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유수현과 처음으로 밤을 보낸 그날.

유지현의 생일을 역산해 보면 그때 생긴 아이가 맞을 것이다.

나탈리야에게 있어 유지현은 갑자기 나타난 딸이 아니었다.

이 사랑스러운 아이는, 자신이 차수희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 그 여자는 대체 뭘까······.’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있는 여자.

지금으로서는 그 정체를 가늠할 수가 없다.

혹시 그 여자가 진짜이고, 자신은 복제품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당장이라도 찢어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럽기는 하나 나탈리야는 결코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하지는 않았다.

이 상황에서 분노에 눈이 멀어버리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

‘가능성은 모두 열어놔야 돼.’

그리고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유지현을 가진 날.

자신이 원래의 몸에서 쫓겨난 그날.

이 지구상에 괴수가 출몰하기 시작한 날이기도 했다.

‘틀림없이 뭔가 연관이 있을 거야.’

그 연결고리를 알아내야 한다.

진실을 낱낱이 파헤쳐서, 확신을 얻을 것이다.

자신만이 차수희라는 확신을.

그리고 그 후라면, 해야 할 일이라고는 단 하나뿐이다.

‘내 몸을 되찾을 거야. 내가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돌아갈 거야.’

지금 당장 저 여자를 죽이지 않는 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집에 돌아온 나탈리야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응. 나예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책임자로서 명령이에요. 다들 당장 짐 챙겨서 본가로 돌아가세요. 할아버지한테는 내가 따로 연락할게요.”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당황한 듯이 무어라고 말을 했지만 나탈리야는 완강하게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요. 찾아올 필요도 없어요. 혹시 흔적 남긴 게 있다면 모두 없애고, 가능하면 오늘. 늦어도 사흘 안에는 돌아가세요.”

전화를 끊은 후 다시 본가의 사람들에게도 연락을 했다.

미리 준비한 논리를 토대로 늙은이들을 납득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럴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 하지 않았을 뿐이지, 원한다면 나탈리야는 언제라도 가문의 실권을 한 손에 쥘 수 있었다.

마법사로서의 역량도, 은연중에 사고 있는 경외심도 가문 내에서 나탈리야의 발끝이라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전화 몇 통으로 거추장스러운 짐을 모두 덜어낸 나탈리야는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지금부터 밟아나갈 계획에는 자신만 있으면 그걸로 족했다.

유수현의 옆에 있을 사람이 오직 자신인 것과 같은 이치였다.

‘일단은 좀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겠어.’

나탈리야는 문득 웃고 말았다.

옛날 생각이 난 것이다.

‘그때 기준으로 치면······, 레벨 3 정도 되겠네.’

그리운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띤 나탈리야의 얼굴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

지금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의문은 단 한가지였다.

곱씹다가 답이 안 나와서 옆 좌석에 앉은 우철이에게 말을 걸었다.

“우철아.”

“네, 사부님.”

“왜 일은 해도 해도 싫고, 노는 건 해도 해도 좋은 거냐?”

“······.”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나만 이래?”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서 제가 쉬고 계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러냐.”

오늘이 산업 스파이 잡아내기로 한 날이었다.

천유화를 이수민 집에 꽁꽁 숨겨두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정말로 정체 모를 놈들이 사마군의 나머지 세 명 주위로 얼쩡거리는 것 같다는 보고가 들어온 것이다.

김유진에게 보고를 들었을 때 속으로 천유화에게 사과 한 마디를 건넸다.

그냥 피해망상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아무튼 일단 보고가 들어온 마당에 우철이한테만 맡겨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에는 일 안 하고 월급 꼬박꼬박 받아가는데 이런 때라도 힘 좀 써야지.

“그래도 하기 싫은 건 하기 싫네. 뭐, 이거는 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 대기한 지 몇 시간 지났지?”

“세 시간 정도 됐습니다.”

일부러 사마군 놈들 지내는 집에 방비를 좀 옅게 해두고, 납치해서 도망가면 그걸 뒤쫓는다는 계획인데······. 이놈들이 어찌나 신중을 기하는지 몇 시간째 염탐만 하고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지루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신화경 찍으면 재택근무만 할 수 있을까······?”

집에서 침대에 누워가지고 어? 천안통으로 다 내려다보고.

막 공간을 여의해서 필요할 때만 움직이고.

“끝내주겠는데?”

“사부님, 혹시 실마리를 잡으셨습니까?”

우철이가 놀라서 물었다.

“나도 잘 몰라.”

마법 배우면서 무공에 대한 이해도 좀 깊어진 건 사실이다.

뭔가 잡힐 듯 말 듯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보인다고 무턱대고 갈 수는 없잖아.

“간 보려다가 진짜로 황천길 건너면 어쩌나 싶어서 그냥 대충 놔두고 있다.”

“하기야 신화경에 들었다고 알려진 자들은 거의 예외없이 등선했다고 하지요.”

“거의도 아니고 전부 다일걸?”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만 달마대사랑 육조 혜능, 장삼봉 그 양반이랑, 또 난다긴다했다는 몇 명.

우리 영감탱이도 나 하산시키고 나서는 아마 올라갔을 것 같고.

마교 쪽에서는 초대 천마 그 사람이 신화경 들었는데 억지로 붙잡고 있다가 십만대산에 애새끼들 좀 살 만해지니까 올라갔다고 했던가?

그 다음대 천마들이 등선했다는 건 내가 봤을 때는 약 파는 소리였던 것 같긴 한데······, 일단 직접 본 사람이 한 명 있긴 하지. 백운상이.

아무튼 당장은 경지를 높일 생각 같은 건 없다.

지금은 죽기도 싫고, 등선하는 것도 죽기만큼 싫으니까.

신화경에 이른 힘이 필요할 때가 생기면 또 모르는 일이지만.

“내가 볼 때는 그 인간들 다 낚인 거야. 어떻게 단 한 명도 ‘등선 좋다’라고 후기 쓰는 인간이 없냐 이 말이지.”

“등선을 하면 뭔가 직책을 맡는다거나, 인세에 개입을 못한다거나 그런 클리셰 있지 않습니까?”

“거 단어 선택이 좀······.”

“네?”

“아니다. 됐다.”

등선이랑 클리셰가 같이 쓰일 만한 단어인지는 모르겠는데······, 우철이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나는 안 할 건데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쓰잘데기 없는 잡담을 나누면서도 기감은 최대한으로 열어놓고 있었다.

한 시간이 더 지나고, 컵라면 용기가 하나씩 더 쌓였을 때쯤······.

“우철아, 느껴지냐?”

“네?”

“너 아직 3성에서 그대로지?”

“네, 제가 아둔해서······.”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기감으로만 판단해야 하니 우철이는 감지를 못한 것 같지만, 방금 사마군 놈들 사는 거처로 몇 명이 침입했다.

곧이어 제각기 어깨에 사람을 하나씩 들쳐멘 놈들이 거처를 나섰다.

우철이에게 말했다.

“일할 때 됐다. 나가자.”

차 문을 열고 나와서 은밀히 뒤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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