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당신 누구야?
차수희는 타인의 호의나 적의를 예민하게 느끼는 편이었다. 그야말로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눈치가 빠르기도 했고, 만약 상대가 보내는 것이 호의라면 그런 건 살아오면서 넘칠 만큼 받아봤기 때문에 잘 알았다.
그리고 만약 적의라면······, 그다지 받아본 적이 없기에 오히려 바로 알 수 있다.
해서 지금 나탈리야의 말에 돋힌 가시를, 듣는 당사자인 차수희 본인만큼은 눈치챘다.
미묘한 단어 선택.
호흡을 두면서 말에 행간을 넣는 방식.
사소한 몸짓과 표정들.
그 하나하나가 차수희에게 말했다. 당신이랑 거기서 밥 먹는 건 무조건 싫어, 라고.
조금 더 확대해석하면 심지어 이렇게까지 들렸다. ‘다 좋은데 당신만 없으면 좋겠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나간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차수희는 지난 며칠간을 되돌아봤다.
몇 가지 장면들.
나누었던 대화와 각각의 상황들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펼쳐졌다.
‘내가 얘한테 실수한 게 있나?’
하지만 짚이는 게 전혀 없었다.
애당초 실수를 하니 안 하니 논할 정도로 대화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상하네······?’
뭔가 석연찮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차수희는 이 타샤라는 여자애가 싫지 않았다. 도리어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딸인 유지현과 잘 어울리는 게 보기 좋기도 했고,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친근감 같은 것까지 느껴진 덕분에.
“그러니? 그럼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심심할 때 놀러오면 맛있는 거 해줄게.”
“정말요? 감사합니다!”
“반찬 같은 거도 사먹는 건 건강에도 별로 안 좋으니까 필요하면 말하구. 응?”
“으음, 그건 너무-”
“폐 끼치는 거 아니구, 신경 안 써도 돼. 지현이랑 앞으로도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뇌물 주는 거니까. 알겠지?”
거절할 구석을 미리 차단해 버린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차수희는 나탈리야와 함께 걸었다.
“지현이 동생 생기면 이런 기분이려나?”
집에 돌아온 후,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있다가 꺼낸 말이었다.
곁에 누워서 팔베개를 해주고 있던 유수현이 물었다.
“타샤? 동생 말고 언니여야 하는 거 아냐?”
“왜애. 생일도 지현이보다 약간 느리잖아.”
나탈리야라는 이름부터가 그랬다.
러시아에서는 주로 12월에 태어난 여자아이에게 붙이는 이름이라고 하니까.
유수현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건 그런데 솔직히 어른스럽기로 따지면 바뀌는 게 맞지 않나?”
“왜? 우리 지현이가 뭐 어때서? 이제 편식도 잘 안 하고, 이불도 잘 개고. 양말도 벗을 때 안 뒤집어 놓는데?”
차수희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말했다.
“어른스럽다는 근거가 그게 다야······?”
“응.”
유수현이 조금 망설이다가 털어놓듯이 말했다.
“그으, 있잖아. 혹시라도 지현이한테 직접 칭찬할 일 있으면 좀 더 거창한 이유 생각해놓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원래 작은 것부터 칭찬해야 애가 더 잘하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오빠 질풍노도의 시기일 때 비하면은······, 우리 지현이 철 안 든 거는 귀엽지.”
“그것은 제가 지금도 죄송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며, 인정하고 또 인정하는 바입니다······.”
면목이 없다는 얼굴.
차수희는 행복감이 마음을 감싸는 걸 느꼈다.
“응. 알면 됐어.”
웃으면서 차수희는 유수현의 가슴 쪽으로 몸을 더 기댔다.
그리고 말했다.
“언니동생 하니까 생각나는데에.”
“······뭐가요?”
벌써부터 낌새를 눈치 챈 유수현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자기도 좋으면서.’
속으로 생각하며 차수희는 이어 말했다.
“우리 지현이 동생 생기면 애가 책임감도 더 생기고,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
“그, 그런가?”
“응.”
그리고 손가락을 탁, 튕겼다.
“방음 끝!”
하지만.
본심을 말하자면, 정말로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말로는 둘째 계획은 좀 더 미루자고 합의하긴 했지만, 사실 특별히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십수 년째 감감무소식.
유지현이 태어났을 때는 처음 단 한 번 만에 이루어졌던 일이 그 후로는······.
차수희는 그것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유지현이 태어난 것에, 무엇인지 모를 어떠한 목적성이 부여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게 아니면, 남의 몸 뺏은 벌이려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차수희는 남몰래 결심을 굳혀나갔다.
자신에게 깃들어 있는 성화.
이것만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어떠한 위험요소도 없이 일이 안정적으로 마무리되고 나면 바로 계획을 실행해야겠다고.
빙의가 있기 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사실은 없다.
하늘까지 높게 치솟은 웅장한 신전.
갇혀 있던 자신은 하릴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것 자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것만은 이해했지만, 무료하다는 생각 역시도 언제나 했다.
그러던 어느날 하늘로 공간이 열린 것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나가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고, 차수희라는 인간의 기억과 육신을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십수 년을 차수희로 살았다.
이것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가정.
자신은 차수희의 자리를 도둑질한 죄인이라는 결론.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스무 살 이전과 지금의 자신은 동일한 존재일 수도 있다. 그저 특별한 힘과 약간의 기억이 더해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는 그것이 편의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차수희는 안다.
‘그러니까 확인해 봐야 돼.’
일이 잘 풀려서 자신이 차수희 본인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어쩌면 그걸 확인하고 난 다음에는 둘째도 생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 불과했다면······, 그때는 이 몸을 돌려주고 싶다. 마땅히 그래야 하니까.
‘지현이나 오빠랑 떨어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은 모든 것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야만 했다.
뭔가를 한다면 그 이후에.
‘내 남편이랑 우리 딸 무작정 뺏기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 마음만은 결코 거짓이 아니니까.
차수희는 그렇게 생각했다.
***
꿈을 꿨다.
하나의 꿈만을 꾼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꿈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이해했고, 다음 꿈으로 넘어가면서 이전에 꿨던 꿈들을 기억해낼 수 없다는 것 역시도 받아들였다.
명확했던 영상들이 이미지와 소리로 나뉘었다가, 마침내 스러지는 과정을 관조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만은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꾼 꿈들에는 언제나 한 명의 남자가 등장했다.
저마다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펼쳐진 꿈이었지만 언제나 그 남자가 함께 했다.
다음 꿈.
아마도 마지막 꿈.
이것만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해가 질 무렵이었다.
‘오빠! 오빠, 집에 있어?’
그녀는 빈 집의 문을 두드렸다.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품에 한 아름이나 되는 문제집을 안고 날이 깜깜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밤공기가 차가워서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그녀는 계속 기다렸다.
문득,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뭐해?’
그녀는 바로 알았다.
지금껏 줄곧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부루퉁한 목소리.
뭔지 모를 불만이 가득한 얼굴.
요 몇 달간은 계속 이랬다.
숨을 약간 몰아쉬는 걸 티를 내고 싶지 않은지 상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그렇게 급하게 뛰어올 거였으면 고민하지 말고 그냥 바로 왔으면 됐을 텐데.
그녀는 그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
‘학교 마친지가 언젠데 뭐하다가 늦게 왔어. 십 분이나 기다렸잖아.’
‘······콧물은 좀 닦고 말해.’
건네온 말에 미안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순수한 기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원망 같은 건 애초에 하지도 않았으니까.
장난스럽게 말했다.
‘콧물? 나는 그런 거 안 흘리는데?’
‘어휴······.’
상대가 뒤로 맨 가방을 앞으로 돌리더니 휴지를 주섬주섬 꺼냈다.
몇 장을 뽑아들고 그녀의 얼굴에다 댔다.
‘킁해, 킁.’
‘싫은데?’
그녀는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빨리 열어줘. 그리고 나 배고픈데 밥도 줘. 과외비 대신으로.’
‘너는 중학교 일학년이 이학년한테 과외비 받으려고 하냐?’
‘지금 그게 중요해? 오빠 시험지에 비 안 내리는 게 중요하지.’
‘있잖아······. 그냥 밥만 먹고 가면 안 되냐? 치킨 시켜줄게. 다리날개 세트로.’
앞으로 펼쳐질 고문 같은 시간을 예상했는지, 상대는 벌써부터 질린 얼굴이었다.
그녀는 짖궂게 말했다.
‘저얼대로 안 돼.’
‘······딱 한 시간만 할 거야.’
‘오빠. 과외는 원래 기본이 두 시간이야.’
‘그래, 그러면 딱 두 시간만-’
‘근데 나는 세 시간.’
웃음기가 담긴 대화를 이어나가며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 그랬다.
서로를 알고부터 언제나 함께였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거기서 꿈이 끝났다.
그리고 나탈리야는 눈을 떴다.
침대에 누운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나탈리야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곱게 개여놓은 교복을 입었다.
거울을 보며 몸단장을 하고, 커피를 한 잔 내려마셨다.
눈물이 자꾸 흘러서 계속 닦아내야 했다.
오전 여덟 시.
약속한 시간이었다.
나탈리야는 차마 나설 자신이 없어서 마냥 기다렸다.
십 분이 지난 후. 집 밖에서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타샤! 늦어서 미안! 아직 안 갔지? 집에 있어?”
유지현의 목소리.
오늘은 유지현과 나탈리야가 다니는 고등학교의 입학식 날이었다.
함께 학교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탈리야는 받지 않았다.
한 번 더 눈물을 닦아내고, 집을 나섰다.
“아, 나왔다. 진짜 미안. 그게 있잖아······. 쪼오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나탈리야는 웃으며 답했다.
“아냐, 괜찮아. 나도 방금 준비 끝났는걸.”
“아, 그래?”
퍽 안심한 듯한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유지현이 몸을 돌리고, 반대편을 향해 크게 외쳤다.
“엄마! 아빠! 나 갔다올게!”
나탈리야는 눈을 질끈 감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아냈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한없이 다정해 보이는 남자와 여자 한 쌍이 걸어나왔다.
남자가 말한다.
“내일부터는 늦잠 자면 이불 뺏을 거야. 아, 타샤. 미안하다. 애가 늦잠을 자서.”
나탈리야는 답했다.
“아뇨, 괜찮아요. 입학식 아홉 시까지인데요.”
남자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여자가 말했다.
“딸, 오늘은 일찍 끝나지?”
“응. 입학식 하고 바로 끝. 타샤, 나중에 끝나고 우리 집에서 밥 먹자.”
유지현의 호의 어린 제안.
나탈리야는 답했다.
“알겠어.”
그 대답을 듣고, 여자가 반색을 했다.
“타샤도 온다구? 그러면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야겠네. 딸, 입학식 끝나면 엄마한테 연락해?”
“응. 나중에 말해줄게.”
“감사합니다!”
나탈리야는 웃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말했다.
“우리도 이제 들어가서 밥 좀 먹자.”
“응, 그러자. 그러면 딸, 잘 갔다와?”
“네! 타샤, 이제 가자.”
나탈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세 사람을 한 명씩 바라봤다.
남자, 유수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
나탈리야와 나란히 서 있는 유지현.
아마도 그녀의 딸이었을 소녀.
마지막으로, 차수희.
유수현의 아내이자 유지현의 어머니.
그리고 나탈리야에게는······.
자신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뺏어간 정체 모를 강탈자.
‘당신은, 대체 누구지?’
나탈리야.
애칭은 타샤.
그리고.
일찍이 차수희였던 소녀.
그녀는 조용히 그런 의문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