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80화 (80/130)

80. 얘 좀 봐라?

나탈리야가 오늘 이 자리에 온 목적은 이수민과 친분을 가지기 위해서였다. 유지현도, 이수민도 그렇게 알고 있다.

물론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나탈리야의 진정한 목적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긴 했지만.

헌터 이수민의 팬이어서 만나고 싶었던 건 당연히 아니다. 나탈리야는 이수민이 S랭크 던전을 몇 개를 클리어했건, 얼마나 유명하건 그런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저 몇 년 전의 굵직한 사건들과 이수민 사이의 연결고리를 알아내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한데 만나보니, 이수민도 유지현과 마찬가지로 꽤나 귀여운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서른이라는데. 흐음······.’

역시 나이와 귀여움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고 나탈리야는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오늘 이수민이 보여준 모습들이 그 강력한 증거였다.

처음 대면했을 때 이수민은 분명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 호기심이 견제로 바뀌는 데는 채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로 느낀 포인트였고, 견제 섞인 눈빛을 보낸 이유가 두 번째 포인트였다.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데, 나탈리야와 유지현이 나누는 대화 주제가 며칠 후에 입학할 고등학교나 십대 소녀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다 보니 도저히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한 것이다.

이수민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소심하게 닫는 장면을 나탈리야는 몇 번이나 목격했다.

‘귀엽긴 한데······, 좀 이상하기도 하네.’

유지현과 나이 차이가 열 살도 넘게 나는데, 암만 봐도 이수민이 유지현을 대하는 태도는 보호자로서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아예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뭐랄까. 강박관념이라고 해야 하나?

자기가 품고 있는 애정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쏟아붓고 싶다는 의욕이 생생하게 느껴진 것이다.

나탈리야가 보기에는 그중 십 퍼센트도 유지현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애초에 사람 대하는 게 너무 서툴러.’

본인의 능력 자체가 뛰어난 데다가 부도 명예도 넘칠 만큼 있어서 평소에는 티가 잘 안 나겠지만 지금처럼 상정 외의 상황을 만나면 맥을 못 추는 타입.

애정을 가진 상대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지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다.

‘그래도 친해지면 정보는 확실히 캐낼 수 있겠어.’

적당히 구슬리면 오히려 유지현보다도 더 쉬운 상대일 것으로 판단됐다.

이렇게 노는 것도 생각한 것 이상으로 즐거운 일이긴 했지만, 나탈리야는 자신이 이 땅에 온 본분을 망각하지는 않았다. 노는 것은 노는 것이고 그와는 별개로 늙은이들에게 씹을거리 정도는 던져줘야 했다.

‘노인들 치아 건강이 걱정되니까. 적당히, 재촉 안 당할 정도만.’

마법이라는 신비를 다시금 자신들 손에 거두어 독점하려는 욕망을 가진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탈리야의 가문은 물론이거니와 각국의 마법 가문들이 나탈리야가 모르는 곳에서도 눈에 불을 키고 진상을 쫓고 있을 것이다.

피팅룸에서 나온 유지현과, 그 옆에 찰싹 붙어서 아첨 아닌 아첨을 하는 이수민을 바라보면서, 나탈리야는 며칠 전에 건네준 정보를 떠올렸다.

유지현과의 대화에 종종 나왔던 ‘유화 언니’라는 이름.

누군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수민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인 걸로 보였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만 일러줬었는데······.

‘조사한 후에 보고하겠다고 했었지?’

나탈리야는 잠시 상념을 이어가다가, 이내 머릿속 한 켠으로 밀어두었다.

그런 거야 이 즐거운 시간 이후에 생각해도 충분하다.

구입할 옷을 모두 고른 후, 계산대 앞에서만은 당당한 모습을 되찾은 이수민이 호기롭게 말했다.

“일시불로 해주세요.”

“언니, 어, 근데 있잖아. 이거 다 사면 너무 비싸지 않아?”

“으응. 언니 달마다 월세 들어오는 거만 해도 그거 다 쓰지도 못해. 지현이는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써도 돼. 알겠지?”

“조물주 위에 건물주······!”

“정말 감사합니다. 잘 입을게요!”

나탈리야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시선을 둘 데를 찾지 못한 이수민은 괜히 목 어림께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옷 골라줬는데 답례를 해야 하니까.”

‘저러니까 더 난처하게 만들고 싶네?’

재밌는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나탈리야가 걷는 방향을 살짝 대각선으로 해 이수민에게 다가갔고,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왼쪽 팔에다 팔짱을 꼈다.

예상한 그대로, 이수민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어······?”

“그래도 밥은 제가 사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죠?”

“응? 아, 응.”

허둥거리는 이수민과 친근하게 구는 나탈리야.

그 모습을 본 유지현이 장난 섞인 어조로 말했다.

“뭐야아? 소개시켜준 사람은 나잖아. 왜 둘이 더 친해 보이는데?”

“어, 어? 지현아. 그게 아니라-”

“나도 끼워줘!”

비어 있는 오른쪽 팔로 유지현이 달려들었다.

누가 봤다면 영락없이 사이좋은 세 사람이라고 할 만한 모습으로 세 사람이 밥 먹을 곳을 찾아 걸었다.

“진짜 걔 누굴지 엄청 궁금하다니까?”

비빔냉면에서 고명으로 올라간 고기를 골라낸 이수민이 되물었다.

“지현아. 누구?”

“걔, 나 말고 일등했다는 애. 누구지?”

젓가락으로 오이를 골라내는 작업을 끝내고, 볼멘소리처럼 나온 유지현의 대답.

나탈리야는 자기도 모르게 웃을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체 수석은 자신이었다.

‘그야 나는 그 학교 커리큘럼으로 배울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걸.’

대한민국에서 흘러나온 마법에 관한 지식은 나탈리야의 가문을 비롯한 유럽에서 비의로 전승되던 것과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었지만, 크게는 궤를 같이했다. 겨우 고등학교 입학시험 따위, 나탈리야의 수준에서는 틀린 답을 써내는 게 오히려 불가능에 가까웠다.

“걔는 아마 나랑 같은 반일 거니까, 두고 봐. 내가 마법은 실전이라는 거를 걔한테 알게 해줄 거야.”

“그러엄. 우리 지현이가 졸업할 때는 일등으로 졸업할 거야. 언니가 똑똑히 봤어.”

‘보긴 뭘 봤다는 거야?’

“푸흣.”

참지 못한 나탈리야는 살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푼수 두 명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둘러댔다.

“겨자를 너무 많이 뿌려서······.”

“어? 국물 좀 더 달라고 할까?”

“아냐. 괜찮아. 이제 적응했어. 괜찮아.”

“그래? 으음······. 맞다! 언니. 오늘 있잖아. 혹시 언니 집에서 자고 가도 돼? 나랑 타샤랑. 미리 물어봤는데 엄마는 괜찮다고 했어.”

그 순간.

이수민의 얼굴로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다가 결국 체념의 빛으로 바뀌는 것을 나탈리야는 분명히 목격했다.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현아, 미안해. 언니가 오늘은 일이 조금 있어서 힘들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유지현의 눈치를 살핀다.

물론 유지현은 대수롭잖게 답했다.

“그러면 내일이나 모레는 괜찮아? 개학하면 언니 집에서 자는 거도 마음대로 못하니까. 그 전에 한 번 자고 가고 싶은데.”

이수민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 그게 당분간은······.”

“히잉. 아쉽다.”

“미안해······.”

‘보는 내가 다 안쓰럽네.’

나탈리야가 이 대화를 다시 한 번 떠올린 것은 그날 밤.

보고를 받으면서였다.

“종적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래요?”

“빠르게 눈치를 챈 것 같다더군요.”

‘꽤 대응이 빠르네?’

머릿속으로 잠시 계획을 굴려보고, 나탈리야가 명령했다.

“그럼 일단은 가만히 있어봐요.”

“추적하지 않습니까?”

마주 선 상대가 의아하게 물었지만 나탈리야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네. 그냥 어떻게 되나 지켜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다음에는 내가 연락할게요. 다들 휴가왔다고 생각하고 푹 쉬고 있으라고 전해줘요.”

상대가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나탈리야는 생각했다.

‘이수민 그 사람이 당분간은 집에 찾아오는 건 안 된다고 했지?’

그리고 추적 중이던 ‘유화 언니’와 이수민은 서로 아는 사이다.

두 가지 사실을 연결 시킬 개연성이 충분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주도적으로 대응했을 것 같지는 않고, 머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나 보네.’

만약에 그렇다면 굳이 지금부터 꼬리를 내보일 필요는 없다.

굳이 이쪽에서 움직이지 않아도 기회가 알아서 찾아올 것이다.

던져준 정보를 받아먹고 눈이 벌게진 자들이 잔뜩 들쑤시고 있는 모양이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나탈리야도 다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달갑지 않은 사람과 마주쳤다.

***

이수민의 집 현관.

신발을 구겨 신으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으름장을 놓았다.

“너네 진짜 나랑 약속하는 거다? 절대 안 싸우기로.”

천유화 데리고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안심이 안 돼서 한 번 와 본 건데.

아니나 다를까 넓은 집에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일단 말리고, 진정시키고 둘 다 적당히 구슬려놓긴 했는데······,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된다.

“포악한 전대 교주님이 먼저 시비 걸지만 않으면 나는 조용히 있을 거야. 어차피 때리면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지만.”

“숨소리 안 내고 방에서만 안 나오면 내가 굳이 건드릴 이유도 없잖아?”

결국 둘 다 자기가 잘못할 일은 없고 상대방 보고 알아서 잘하라는 말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둘다 똑같은 놈들인데.

“······그래. 둘이 알아서 타협점을 한 번 찾아봐라.”

이제 정말로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천유화가 뒤에서 불렀다.

“근데 여기 있으면 그거는 어떻게 해?”

“뭐.”

“옆에 사람 있는데 해도 되냐구.”

“안 될 건 또 뭐 있어. 그냥 최대한 빨리 해, 최대한.”

어차피 이수민도 대충 알고는 있으니까.

이수민뿐만이 아니다. 내가 천유화 쥐어짜내서 뭔가 거창한 거 연구하라고 들들 볶는 건 김유진이나 우철이도 아는 사실이지.

정확히 뭘하려고 하는지, 그러니까 내 목적이 뭔지는 아는 사람이 없지만 어차피 거기까지는 가르쳐줄 생각도 없다.

아마 들으면 다들 웃을지도 모르겠네.

애 엄마가 나한테 미안해서 가출하면 그거 붙잡아오려고 방법 생각한다는 게 차원이동이라니.

그래도 나로서는 이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스무 살 이전. 그러니까 빙의가 있기 전의 차수희와 지금의 애 엄마가 정말로 별개의 존재인지.

지금으로서는 나도 애 엄마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나와 지현이와 함께 살아온 애 엄마를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차수희는 살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새로 이사온 이웃. 나탈리야가 마주 인사를 했다.

차수희가 물었다.

“지현이는 아까 집에 왔던데 어디 갔다 오는 길이니?”

“네. 이 근처 길도 익힐 겸해서 잠시 산책하고 오는 중이에요.”

사교적이면서도 당당한 목소리.

차수희 역시도 따뜻한 눈길로 나탈리야를 바라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레벨 5를 주는 게 맞겠다고.

‘다섯 살······, 아니, 세 살만 더 많았으면.’

물론 그조차도 체계상 그렇다는 것일 뿐이었다.

딸의 친구인 데다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유수현과 그런 식으로 엮일 여지는 전혀 없다고 봐도 좋았으니까.

차수희는 판단을 끝마친 뒤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혹시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저녁 먹고 갈래? 아, 잠시만? 전화가 와서.”

전화를 건 사람은 유수현이었다.

잠깐 업무 일로 나갔다 온다고 했는데, 금방 끝난 모양이었다.

휴대전화를 귀에 대고, 차수희가 애정을 듬뿍 담아 말했다.

“응. 오빠. 언제 와? 삼십 분? 알겠어. 딱 올 때쯤에 다 될 것 같아. 응. 조심해서 와?”

차수희가 다시 한 번 나탈리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현이랑 놀면서 삼십 분 정도만 기다리면 될 것 같은데, 괜찮니?”

친절한 제안.

나탈리야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뇨, 가족끼리 식사하시는 데 제가 끼면 죄송하잖아요.”

예의 바른 대답.

하지만 차수희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내가 거길 왜 가, 라고.

‘얘 좀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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