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입만 열면 다 거짓말이야.
산업 스파이가 진짜로 왔다고?
아니, 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는 건 아니지만······.
일단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으, 우리 마법사님? 너 있잖아. 혹시 요새 많이 힘드냐?”
“뭐?”
“물론 내가 너를 좀 많이 구속하긴 했어. 그건 인정하지. 인정하는데, 너도 내 입장이었봐라. 아마 나랑 비슷하게 했을걸?”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천유화의 표정이 구깃구깃해진다.
안쓰러운 마음이 더욱 커졌다.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빨리 자유를 찾게 해줘야 하나?
“이걸 뭐라고 해야 되냐. 편집증? 피해망상? 네가 알지 모르겠는데 그런 단어가 있어요. 왜, 지나가는 사람이 갑자기 칼 들고 나를 찌를 것 같다거나 누구한테 감시당하는 느낌이 든다거나-”
“지금 누굴 정신병자로 보는 거야!”
그제서야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천유화가 버럭 화를 냈다.
“애초에 당신이 말한 거잖아?”
“그거야 그렇긴 한데, 너한테 이렇게 다이렉트로 접근할 수가 없거든. 구조상 그렇게 될 수가 없어요.”
먼젓번에 천유화에게 일렀던 것은 그냥 예방 차원일 뿐이었다.
산업 스파이 같은 불온한 움직임이 있으려면 김유진 선에서 먼저 감지가 됐어야 하니까.
“그럼 구체적으로 누가 접근했는데? 식탁 밑에서 갑자기 양복 입은 남자가 나왔다, 이런 소리 하면 너 혼 좀 날 줄 알아라.”
“몰라. 아직 직접적으로 온 건 아니고 그런 느낌이 든 정도니까. 가끔 산책하러 나가거나 장 보러 나갈 때 누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고······.”
“피해망상 맞네.”
“아니라니까!? 어쨌든 나는 지금 힘도 제대로 못 쓰고 누가 납치해가면 꼼짝없이 잡혀가야 돼. 나중에 괜히 내 탓으로 돌리지 말고, 힘을 회복시켜주든가 대비를 해주든가 둘 중에 하나 선택해.”
이걸로 할 말은 다 끝냈다는 듯이 천유화가 구석 쪽 쇼파로 척척 걸어갔다.
팔짱을 끼고, 다리까지 꼰 채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당연히 전자가 좋지만.”
“그건 안 되고.”
이걸 어떻게 한다?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정신이 헤까닥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던 김유진이 쭈뼛쭈뼛 손을 들었다.
“저어, 이건 어떤가요?”
“그렇게 눈치 안 봐도 됩니다.”
일단 직책상으로는 당신이 내 상사잖아.
그리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과연 직책값을 했다.
물개박수를 치며 말했다.
“좋네요, 좋아. 김유진을 국회로.”
“아뇨오. 아직은 아니에요. 나중에라도 공천 받고 싶으면 스펙 열심히 쌓으라고 아버지가······.”
손사래를 치면서 그렇게 말하는데,
결국 받긴 받는다는 소리잖아.
“아무튼 그러면 불러봅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낮은 목소리가 살짝 떨리면서 내 귀에 울렸다.
<······여보세요? 왜, 전화했어?>
“어어, 우리 치 사장님.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지금? 한 시간 정도면 괜찮은데. 오래 걸리는 일이야?>
“아니. 그런 거는 아니구. 그냥, 발렌타인데이 선물 받은 거 답례 좀 하려고. 우리 사무실 알지? 잠깐 와줄 수 있냐?”
<······금방 갈게.>
말한 그대로 이수민은 금방 왔다.
정말로 헐레벌떡 달려온 건지, 아직 겨울이 안 끝났는데도 이마에 땀이 맺힌 게 보였다.
이 정도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우선 내가 준비한 답례 선물을 내밀었다.
“자, 미리 주는 화이트데이 선물.”
“······뭐?”
“내가 왜 선물이야!”
멍하니 되묻는 이수민보다 노발대발하는 천유화의 목소리가 더 컸다.
천유화가 손가락으로 이수민을 가리켰다.
“그리고 왜 이 인간인데!?”
“거두절미하고 천군아. 너 잠깐만 얘 좀 데리고 살아야겠다.”
“선물이라는 게······, 이거였어?”
실망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이수민이 말했다.
거 되게 미안해지네······.
“낚시해서 미안한데, 진짜 너 말고 믿고 맡길 사람이 없어서 그래. 부탁 좀 하자.”
김유진이 말한 계획이라는 게 이랬다.
우선 핵심 중의 핵심인 천유화는 이수민의 통제하에 둔다.
정말로 산업 스파이가 있다는 가정하에, 천유화의 행적을 놓치고 나면 꿩 대신 닭이라고, 사마군의 나머지 셋한테 접근하려고 하겠지.
그러면 미리 경계를 강화해 둔 우리 국정원 헌터들이라든가, 우철이나 내가 추적해서 꼬리를 잡는다. 걔네도 요 몇 년간 한솥밥 먹었는데 단순히 미끼로 쓰는 건 너무 미안하고, 신경 좀 써줘야지.
종합하면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가능한, 실로 완벽한 계책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내 설명을 듣는 이수민의 표정이 끝없이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성큼성큼 다가가서 손을 덥석 잡았다.
“천군아, 진짜 부탁한다. 너밖에 없어. 응?”
“······다시 말해봐.”
“뭘?”
“바, 방금 한 말.”
“천군아.”
“그 다음.”
“진짜 부탁한다.”
“그리고.”
“너밖에 없다.”
“후우······. 이 무능한 인간들.”
이수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했다.
“자, 우리 무능이들. 수고해주실 이수민 씨에게 다 같이 힘찬 박수 시작!”
사정을 아는 김유진과 우철이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아까부터 날뛰고 있던 천유화는 제압해서 쇼파에 던져놓은 상태였고.
“아오, 하지 마. 박수 치지 마, 좀! 알겠어. 며칠만 있으면 돼?”
“그거는 아직 미정이긴 한데.”
“······그럼 언제부터인지만 알려줘.”
“지금 당장?”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계획했으면 바로 실행해버리는 게 좋았다. 괜히 어정거리다가 진짜로 큰일 생기면 안 되니까.
돈 많고 시간 많고 차도 타고 온 이수민이 바로 싣고 가버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입으로는 안 된다, 안 된다 하면서도 몸은 잘 따라주던 이수민이, 이것만은 난색을 표했다.
“아까 말했잖아. 한 시간만 시간 된다고.”
“왜? 약속 있냐?”
“응. 지현이랑.”
“으읍! 읍읍!”
귀는 열려 있던 천유화가 ‘지현이’ 소리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나도 같이 가게 해달라는 뜻인 게 분명했다.
천유화 쪽으로 눈짓을 하면서 말했다.
“쟤 저러는데, 그냥 오늘 하루만 같이 데리고 가주면 안 되냐?”
“안 돼. 절대 안 돼.”
“뭐어. 그래, 그거는 이해한다. 좀 무리한 부탁이긴 했지. 괜히 억지 부려서 미안하다.”
쟤 입장에서는 지현이랑 약속 있는데 불청객 끼는 게 많이 싫긴 하겠지.
그게 천유화라면 더더욱.
하지만 이수민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는지, 우물쭈물 말을 주워섬겼다.
“오늘은 지현이랑 둘이 만나는 거 아니라서 그래.”
“누구랑 같이 만나는데?”
“지현이 친구. 나한테 소개해 주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다른 사람 데리고 가기가 좀 그래서. 그냥 싫다는 게 아니라······.”
친구라고 하니 바로 짚이는 바가 있었다.
“혹시 그 친구라는 애 이름이 타샤냐? 나탈리야?”
“어? 응. 외국 애라고 듣긴 했는데.”
“아, 그러면 맞을 거야. 며칠 전에 우리 앞집에 이사 왔거든. 어디 가는데?”
“백화점. 입학 얼마 안 남아서 가방이랑 옷도 좀 사주고 하려구.”
“가용예산은?”
“그런 걸 왜 정해놔.”
돈 많은 백수의 패기가 느껴지는 대사였다.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면서 말했다.
“애 버릇 나빠지니까 너무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지는 말고. 그러면 밤에 쟤 데리고 가줄 수 있냐?”
“밤? 그때까지 퇴근 안 하려고?”
“아니, 나는 퇴근해야지.”
“아······.”
왜 아쉬워하고 그래. 나 야근 안 하는 게 그렇게 싫냐?
부탁하는 처지에 그런 것까지 지적하기도 좀 그렇고, 우철이와 김유진에게 눈길을 건네면서 말을 이었다.
“저분들은 어차피 하루 내내 같이 붙어 있으니까 퇴근을 하나 안 하나 별 차이 없을 거야. 안 그러냐, 우철아?”
“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사부님.”
“······.”
흐음. 김유진 표정은 그게 아닌 것 같다야.
보아하니 바가지 좀 긁힐 테지만,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이수민에게 말했다.
“그러면 어여 가봐. 그 타샤라는 애. 예의도 바르고 괜찮은 애니까 잘 좀 챙겨주고.”
“알겠어. ······다음에 봐.”
이수민이 사무실 밖으로 사라지고 나도 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이제 나 진짜 퇴근합니다? 한 시간 초과근무 수당 잊지 말고 챙겨주십쇼.”
“네······.”
김유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
백화점 내의 의류매장 한 구석에 몸을 기댄 이수민은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두 시간 전쯤 유수현이 했던 말.
‘타샤라는 애. 예의도 바르고 괜찮은 애니까.’
그 말을 되뇌이면서, 울분을 담아 조용히 읊조렸다.
“입만 벌리면 전부 다 구라인 새끼······.”
“수민 언니 방금 뭐라구 했어?”
오 미터쯤 떨어진 곳.
신상 봄옷을 화사하게 차려입고는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던 유지현이 물었다.
이수민은 소리높여 말했다.
“아, 우리 지현이 옷 잘 어울린다고, 그 말했어!”
“진짜? 타샤, 들었지? 언니도 잘 어울린대. 골라줘서 고마워?”
“내가 뭘. 옷걸이가 좋아서 그렇지.”
이국적인 생김새의 소녀가 차분하게 답하고는 이수민 쪽을 바라봤다.
고개를 살짝 숙이길래 엉겁결에 마주 사교적인 웃음을 짓고 말았다. 대단히 굴욕적이었다.
‘뭐야. 자기들끼리만 신나서는! 나는 그냥 지갑이야?’
타샤라는 소녀.
첫인상은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좋았다기보다는 놀란 것에 가까웠다.
외모나 분위기, 한국 말을 능숙하게 하는 점, 차분한 어조에서 느껴지는 기품.
어느 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물론 거기까지였다면 ‘이런 애도 있구나’ 하고 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살면서 저런 사람을 못 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전생의 스승이었던 오대 천마 백운상은 정말로 세상에 이런 사람이 다시 있을까 싶을 만큼 완벽했다.
현생에서도 유지현의 엄마에게 처참하게 압도당한 경험이 있었고.
하지만 백운상은 언제나 사부로서 자신을 아껴줬고, 유지현의 엄마는 말 그대로 유지현의 엄마였다.
밀린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근데 쟤는 아니잖아? 만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됐다면서 왜 나보다 더 친해보이는 건데!?’
이번엔 명백히 이수민 자신이 박힌 돌 포지션이었다.
겨우 일주일짜리 굴러온 돌한테 밀려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눈 앞에 펼쳐진 현실 앞에서 그런 말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지만.
양손에 옷을 한 벌씩 쥔 유지현이 이수민 쪽으로 다가왔다.
“언니, 언니! 이거 두 개 중에 어느 게 더 잘 어울려?”
“으응?”
하나는 가슴께에 리본이 달린 원피스였고 나머지 하나는 좀 더 어른스러워 보이는 블라우스였다.
이수민의 안목으로 볼 때, 귀여운 원피스 쪽이 유지현의 매력을 더욱 잘 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으. 내가 보기에는-”
“타샤는 이거 셔츠가 더 이쁘다는데 나는 잘 못 고르겠어서.”
“그, 그래?”
이수민은 격렬하게 고민했다.
소신발언을 할 것인지 대세에 순응할 것인지에 대해서.
‘내가 원피스가 더 이쁘다고 하면······, 지현이가 따라줄까?’
그걸 확인하는 일이 겁이 났다.
결국 이수민의 떨리는 손가락은 블라우스 쪽을 가리키고 말았다.
“나도 이게 더 이쁜 것 같아······.”
“정말? 그러면 이거 입어보고 올게!”
유지현이 신이 나서 피팅룸 안으로 향했다.
이수민은 자괴감에 얼굴을 떨구고 말았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어때요?”
고개를 들어보니 타샤라는 여자애가 옷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맵시 좋은 정장.
아무리 봐도 유지현한테 어울릴 것 같진 않았고, 굳이 따지자면 이수민의 취향인 옷이었다.
나중에 저거 비슷한 걸 사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수민이 말했다.
“그거는 지현이가 입기는 조금······.”
“아뇨. 수민 언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제가 한 번 골라본 건데. 아,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
상냥한 미소 앞에, 이수민의 몸이 굳었다.
***
방금 골라준 옷을 몸에 댄 채로, 거울 앞에 선 이수민이 쭈뼛쭈뼛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탈리야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또 왜 이렇게 귀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