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저번에 말했던 거 있잖아.
***
침대에 나란히 기대서 책을 보다가 문득 애 엄마가 말했다.
“되게 예쁘더라?”
“누가?”
“아까 걔. 지현이 새로 사귄 친구.”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해놓고 지현이에 이어서 나까지 안 들어오니까 애 엄마도 대문 열고 나와봤다.
결국 우리 가족 세 명 모두 다 새로 이사 온 애랑 인사를 나눴다.
타샤라고 했던가?
확실히 애 엄마가 말한 것처럼 예쁘긴 했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했는데.
애 엄마가 내 얼굴로 슬쩍 시선을 주더니 농담조로 말했다.
“꼭 ‘차수희’ 어릴 때 보는 거 같던데?”
“에이. 그거보다는 좀 못하지.”
“조금만?”
콰앙! 하는 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밟았다, 지뢰.
서둘러 고개를 흔들며 부인했다.
“내가 말을 잘못했네. 당신 어릴 때 진짜 어마어마했잖아.”
“뭐야? 지금은 아니구?”
“아니, 당연히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
뭔데. 지뢰 왜 또 터졌는데.
아첨이 아니라 진심이었다고.
애 엄마는 하루 자고 일어날 때마다 더 이뻐지는 것 같다.
식은땀이 나기 직전에서야 애 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농담.”
정말인가?
하긴 열일곱 살짜리 애인데.
아냐, 아니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방심은 금물인 법이니까.
애 엄마가 흥얼거리듯 말했다.
“뭐, 다섯 살만 많았어도 레벨 4······, 아니지, 저 정도면 5까지 쳐줘야 하려나?”
한 번씩 나오는 저 레벨이라는 거.
무슨 뜻인지 궁금한데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나이랑 레벨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많이 궁금하긴 한데······, 또 알면 좋을 일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근거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예감이 든다.
아무튼 타샤라는 애.
외모도 외모였지만 내가 받은 감상은 좀 달랐다.
뭐랄까.
‘얘 대체 뭐지?’ 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지금도 지현이랑 같이 나가면 나이 차이 꽤 나는 오빠 소리 듣곤 하지만 사실은 내가 엄청나게 오래 살았다.
전생과 현생을 합치면 백 년 가까이······, 아니지. 백 년이 넘었던가?
아무튼 오래 산 것만은 확실하다.
별로 순탄한 인생은 아니어서 평지풍파도 많았고, 사람도 많이 겪어봤다.
전생에 젊은 시절에는 여기저기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녔고, 맹주 해먹으면서도 난다긴다 하는 놈들 질릴 정도로 상대해 봤으니까.
현생에서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잘난 줄 알고 살아온 친구들 많이도 봤지.
그런 만큼 어지간해서는 누굴 봐도 놀라는 일이 드문데 아까 걔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어릴 때부터 봐온 애 엄마를 논외로 친다면 이만한 임팩트는 살면서 딱 한 명 있었다.
천마 백운상.
걔 처음 봤을 때랑 느낌이 비슷했다.
“그리고 애가 되게 어른스러워 보였어.”
“그건 그렇더라.”
특히나 우리 딸이랑 같이 서 있으니까 더 그래보였지. 나이대도 비슷할 텐데 그 현격한 차이는 대체······.
걔 앞에서 기 안 죽고 하던 대로 행동하는 우리 딸도 보통 인물이 아니긴 하다만.
애 엄마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지현이가 엄청 아쉬워하더라구. 아침에 학교 같이 갈 수 있는 건 좋은데 같은 반은 못 될 것 같아서 아쉽다나?”
지현이 말에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긴 했다.
애 입학시험 성적이 굉장히 좋았는데 성적 좋은 애들은 아예 특별반으로 따로 모은다고 들었다.
우리 애야 이론은 완전 잼병이었지만 실기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종합 점수로는 차석.
내 생각에는 그 정도면 충분히 잘한 건데 막상 지현이 본인은 꽤 아쉬웠나 보다.
결과 확인한 뒤로 며칠이나 나를 붙잡고 정신승리를 해댔다.
‘솔직히 이론도 마음만 먹으면 잘할 수 있다? 그냥 하기가 싫어서 그래. 그냥 하면 되는데 이론이 무슨 소용이야. 실전이 중요하지.’
‘실습만 쳤으면 내가 수석으로 들어갔을걸? 그러니까 실질적인 일등이라고 보면 돼.’
······지금 보니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불과했던 것 같지만.
“걔도 특별반일 수도 있잖아?”
어쩌면 지현이가 그렇게 경쟁의식을 불태웠던 수석일 수도 있고.
애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좋겠네. 지현이는 엄청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던데. 나중에 저녁은 그 집에서 먹는다고 우리는 둘이서 오붓하게 외식하고 오래. 발렌타인 데이라고.”
“······당신이 부추겼지?”
“응? 무슨 말이야?”
애 엄마가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
나탈리야.
타샤라는 애칭을 가진 소녀는 생각했다.
이 나라의 관용어로 표현하자면, 우선 첫 단추는 성공적으로 꿰었다고.
나탈리야의 가문을 비롯해서, 마법이라는 오래된 비의를 신봉하는 자들은 혈족 중에 각성자가 나온다고 해도 헌터 일을 시키려 하지 않았다.
천한 칼잡이라 경멸하는 것이 그네들의 풍조였으니까.
S랭크 헌터조차 아득히 상회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던 나탈리야는 아예 각성자 신고도 하지 않았다.
가문의 뜻에 동조한 것은 아니다.
기실 나탈리야는 그런 오만함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단순히 귀찮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나탈리야도 유지현이라는 이름은 얼핏 들은 적이 있다.
몇 년 전, 역대 최고 수준의 잠재력을 가진 각성자라고 화제가 됐으니까.
그 후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헌터라는 직업이 사실상 무용해지는 바람에 빛이 바랜 감이 있었지만······, 나탈리야는 오히려 그 점에 주목했다.
미리 조사해 본 바로는 삼 년 전쯤 이 땅에서 최상급 던전과 게이트 발생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다가 초대형 게이트의 발생 이후 뚝 멈췄다. 그 뒤로 마나를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일련의 사건들에 유지현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핵심적인 인물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쓸 만한 증언 정도는 확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같은 학교 다닐 예정이었으니 친해지기만 하면 정보를 얻어내기에 이보다 좋은 상대는 없었다.
게다가 유지현은 마찬가지로 중요 인물이라고 추정되는 헌터 이수민과도 상당히 가까운 사이니까 그쪽으로 접근하기도 용이할 테고.
이렇듯, 나탈리야가 유지현의 집 앞으로 이사 온 데는 논리적인 몇 가지 이유들이 존재했지만······.
막상 만나보니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좋은 점이 하나 더 있었다.
‘되게 귀엽던데.’
나탈리야는 해맑은 유지현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나이도 같은 데다가 오히려 태어난 날짜를 따지면 자신이 한 달 가까이 늦지만······, 그런 건 귀엽다는 감상과는 별다른 상관이 없다.
‘그 애 부모님들도 꽤 인상에 남았고.’
인상에 남는다.
나탈리야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데에 이 이상의 극찬은 없었다.
사실 이것도 꽤나 얌전한 표현이었다.
엄마라는 사람도 제법이라고 느꼈지만, 그 남자에 이르러서는······.
이미 자세히 조사를 했기 때문에 유지현의 아버지의 이름이나 생김새는 알고 있었다.
한데도 실제로 마주하는 순간 나탈리야는 정말로 숨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 감정의 동요는, 단순히 인상에 남았다는 말로 설명해낼 수가 없었다.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채워진 적 없던 가슴속의 공백이, 유수현과 시선을 마주치던 순간만큼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뭐였을까. 대체 왜······?’
깊게 이어지던 상념이 연달아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끊기고 말았다.
나탈리야는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여덟 시.
유지현이 방문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에 즐거움을 담고 나탈리야는 문을 열었다.
손에 상자를 든 유지현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서 있었다.
“이거 내가 초콜릿 만든 건데 선물이야!”
“아, 고마워.”
거실에 으리으리하게 차려진 접시들을 보고 유지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와! 이걸 다 직접 만든 거야?”
“으응. 배달시킨 거.”
“적응 되게 빠르다······.”
유지현이 진심으로 감탄한 듯이 말했다.
그리고 즐거운 식사시간이 이어졌다,
주로 유지현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탈리야는 듣기만 했지만 분위기 자체는 굉장히 화기애애했다.
“그래서 있잖아, 수민 언니라고 나랑 엄청 친한 언니가 있거든?”
‘빨리도 기회가 왔네.’
나탈리야는 타이밍을 가늠하다가 물었다.
“······이수민? 혹시 헌터 이수민 말하는 거야?”
“수민 언니 알아?”
유지현이 놀라서 반문했다.
나탈리야는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러시아에서도 꽤 유명해. 나 그 사람 팬인데.”
“진짜? 그러면 내가 소개 시켜줄까? 나랑 진짜 엄청 엄청 친하거든.”
순수한 호의에서 우러나온 친절한 제안.
얼굴에 기쁜 빛을 가득 담고 나탈리야가 답했다.
“정말로 그래줄 수 있어?”
“응.”
“고마워!”
나탈리아는 즐거워서 웃었다.
***
오후 열두 시.
점심 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김유진에게 통보했다.
“나 퇴근합니다.”
“지금요?”
“네, 지금 당장.”
김유진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오전까지만 하고 가시지······.”
“네, 정확히 오전 끝났습니다.”
“아······.”
“뭐 더 있어봐야 할 것도 없잖아요. 안 그러냐?”
뒤엣말은 김유진에게 한 건 아니었다.
바로 옆 책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우철이가 비몽사몽한 얼굴로 말했다.
“사부님 퇴근하시게요?”
“응. 여기 있으나 집에 있으나 월급 도둑질하는 건 똑같은데 그냥 집에 가서 쉬려고.”
사무실 문을 나서기 직전에 김유진에게 일렀다.
“이거 반차 쓴 거 아닙니다. 아시죠?”
“네······.”
김유진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솔직히 내가 자리 지키고 있는 게 더 방해잖아.
자기도 우철이랑 둘이 있으면 좋으면서 뭘 그래.
반차도 안 쓰고 일찍 하는 퇴근의 맛이 몹시도 짜릿했다.
마력관리부 생기고 김유진에게 부탁해서 여기로 부서 옮긴 지 이제 일년이 다 되어가지만 휴가를 아직 한 번도 안 썼다.
그러면서도 퇴근은 내 마음대로 하고 할 일도 없는 진정한 신의 직장.
이 맛에 권력자 옆에 있는 거 아니겠어?
아무튼 시간도 많이 남았고 애 엄마한테 밖에서 영화나 보자고 할까 싶었다.
휘적휘적 걸으면서 휴대전화를 뒤적거리려는데······.
십 미터쯤 앞에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한달음에 달려가서 어깨를 짚었다.
“야!”
“뭐, 뭐야!”
천유화가 놀라서 휙 고개를 돌렸다.
내가 추궁하듯이 물었다.
“너 어딜 돌아다니냐. 뭔 짓을 꾸미려고 그래.”
“무슨 소리야. 이 정도 돌아다니는 건 괜찮다고 했잖아.”
천유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하긴 이제는 거진 자유의 몸이긴 하지.
“그건 맞긴 한데······, 아무튼 뭐야. 장 보러 가냐?”
“그런 거 아냐. 당신 만나려고 가는 길이었는데 마침 잘됐네.”
“나를 왜? 차원이동 이론 완성했냐?”
그런 거면 얼마든지 시간을 내줄 수가 있지.
하지만 천유화가 표정을 팍 일그러트렸다.
“내가 더 기다리라고 말했잖아. 그거 말고 다른 거야.”
“다른 거 뭐.”
“지난번에 당신이 말했던 거 있잖아.”
“너네는 배에 탄 죄수라는 거?”
“그거 말고! 아무튼 여기서 할 이야기 아냐. 사무실 들어가서 말해.”
“······나 퇴근했는데.”
궁시렁거리면서도 앞장서 다시 사무실로 향했다.
건물 앞에서 천유화에게 일렀다.
“가만히 있어.”
기막으로 천유화와 나를 감싼 채로, 은신술의 묘리를 이용해 조심스럽게 우리 사무실 문 앞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대응할 틈을 주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예상한 그대로, 우철이와 김유진이 열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잘들 한다, 잘들 해.”
“사, 사부님. 갑자기 왜······.”
후다닥 김유진과 거리를 벌린 우철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얘가 일 있대서 다시 왔어.”
“이제 말해도 돼?”
“응. 해봐라.”
그제서야 천유화가 본론을 꺼냈다.
“저번에 말했던 거. 죄수 말고.”
“그럼 뭐.”
“산업 스파이. 혹시 얼쩡거리면 말하라며. 그거 말해주려고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