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학교가 이 근처라서요.
분위기 좋은 중국요리 전문점.
산해진미가 즐비하게 놓여 있는 방에 나를 포함해 일곱 사람이 모였다.
가장 상석에 앉은 채 한 사람씩 여섯 명의 면면들을 훓어봤다.
우철이, 이수민.
그리고 사마군 넷.
술잔을 높이 들고 엄숙히 선언했다.
“그러면 우리 거국적으로다가 다같이 한 잔 하자. 다들 잔 들어.”
여섯 명 중에 우철이 한 명만 잔을 들었다.
너는 또 왜 손을 덜덜 떨고 그러냐.
목소리 톤을 좀 더 높여서 으름장을 놓았다.
“빨리 잔 들라니까?”
“······.”
아무도 반응이 없었다.
예의라고는 밥 말아먹은 놈들 같으니라고······.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선창하면 너네가 후창하는 거다. 알겠냐?”
“그걸 진짜로 해야 돼?”
이수민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나도 사양할게.”
천유화가 지원사격을 했다.
꼭 똥이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너네 사실 사이 좋은 거 아니냐?
“다들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허공섭물이라도 쓰지 않는 이상은 내 말에 따라줄 사람이 없어보인다.
그렇다고 그런 식으로 강제로 시키는 건 내 취향이 아니고, 그냥 좀 더 구체적으로 협상을 하기로 했다.
“잔 안 드는 놈은 밥 다 먹을 때까지 대가리만 박게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라.”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났다.
잔 일곱 개가 높이 치솟은 걸 흡족하게 바라보며 외쳤다.
“그러면 선창한다. 정마!”
“하, 합작!”
술을 입 안에 털어넣고 잔을 거꾸로 들어서 머리 위에서 흔들었다.
이후 십여 초 동안 힘찬 박수의 시간이 이어졌다.
고기를 한 점 집어먹으며 말했다.
“이거 동파육 옛날에 먹던 그 맛이다야.”
“정말이군요, 사부님.”
“난 먹어본 적 없어서 몰라.”
“······우리 때 맛이랑은 달라.”
동의한 사람은 우철이.
먹어본 적 없다는 건 이수민.
맛이 다르다는 건 천유화. 나머지 놈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이래서 마교놈들이 문제란 말이야.
무슨 말만 하면 일단 토달 생각부터 하는 천하의 반동분자 같은 놈들.
혹시 물리적으로 치료가 필요할까 싶어 주먹을 살랑살랑 흔드니 그제서야 잠자코 먹는다.
이수민은 따로 주문한 접시 끼고 앉아서 깨작거리고 있는 중이었고.
분위기가 좀 무르익은 것 같길래 내가 말했다.
“크게 보면 이제는 우리가 다 한 배를 탄 거야. 모두 동의하냐?”
“한 배를 탔는데 금제는 왜 안 풀어주는 건데?”
천유화의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 검지손가락을 뻗었다.
사마군을 한 명씩 가리키며 말했다.
“너네는 배에 탄 죄수.”
이번에는 우철이와 이수민을 가리켰다.
“얘네는 선원.”
마지막으로 말했다.
“나는 선장. 알아듣겠냐?”
“왜 하무린이라고 하면 치를 떨었는지 이제는 알겠어······.”
“알면 잘해라. 산업 스파이 찾아오면 바로 말하고.”
“그런 적 없다니까 몇 번을 말해.”
“앞으로 혹시 모르잖냐.”
마법 지식 틀어쥐고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방귀 좀 뀐 지가 벌써 이 년이다.
그 원천이 천유화라는 건 나를 비롯한 극소수밖에는 모르기는 한데, 사실 아직도 정보가 안 새어나간 게 더 신기하지.
각국 첩보기관이 일을 제대로 안 하는지 우리 쪽 사람들이 유능한지 모를 노릇이다.
“미국이나 어디서 망명하게 해준다고 해봐야 씨알도 안 먹히는 거 알지?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간다.”
“알고 있어.”
말은 이렇게 했지만 조금 더 지켜보고 경과가 괜찮으면 적당히 느슨하게 해 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첫 만남이 워낙 안 좋긴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관계 정립도 됐고, 서로 오해한 것도 거의 다 풀렸으니까.
이제와서 복수하겠다고 덤빌 만큼 멍청한 놈들은 아니지.
식사를 마치고, 결제는 풀떼기만 먹은 이수민 카드로 한 후에 다 함께 거리로 나왔다.
우철이가 배꼽인사를 하며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관리하겠습니다.”
“어, 그래. 그러면 부탁 좀 하자. 그리고 우리 마법사님은 내가 부탁한 거 안 까먹고 잘 하고 있지?”
“재촉하지 마. 나름대로 하고 있으니까.”
가능하면 빨리 되는 게 좋긴 한데.
그래도 말마따나 재촉해서 될 일은 아니다.
차원이동.
이름만 들어도 벌써 거창하잖아.
“아무튼 다음번에도 다들 웃는 낯으로 보고, 오늘은 이만 해산하자.”
손을 흔들어주고는 지하철 역으로 걷는데, 왠지 누가 따라오는 기척 같은 게 느껴졌다.
타이밍을 가늠하고 몸을 홱 돌려서 누군지 확인했다.
예상했던 대로 이수민이었다.
흠칫하면서 뒤로 물러서는 바람에 뒤로 묶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뭐야. 왜 따라오냐.”
“지하철 타고 가려고? ······태워줄게.”
“웬일로?”
“그, 그래서 안 탈 거야?”
“에이. 누구 안 탄댔냐.”
우리 그 정도로 살가운 사이는 아니잖아, 라는 말은 마음속에만 담아뒀다.
호의를 베풀어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지.
이수민의 차에 타고, 고급 승용차의 안락함을 만끽하며 말을 건넸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거의 반년만에 보는 거 아니냐?”
“반년은 아니야. 넉 달 전에 봤으니까.”
“이야, 너 기억력 좋다?”
“······별로 안 좋은데.”
“아무튼 요즘 뭐하고 지내냐. 근황 얘기 좀 해봐.”
“돈 많은 백수로 잘 지내고 있어. ······그건 왜 묻는데?”
“그냥, 요즘 우리 딸이 집에서 너 얘기 안하길래 궁금해서 한 번 물어봤다.”
사실 요즘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벌써 이 년 넘었지. 사마군 애들이랑 엮인 일 끝날 때쯤부터니까.
그 일 있고 나서부터는 애가 내 앞에서 이수민 얘기를 잘 안 한다. 물어보는 것도 싫어하고.
가끔 방에서 전화 소리 들리는 거 보면 둘이 싸운 건 아닌 것 같은데.
근데 얘는 왜 또 얼굴을 죽상을 하고 그러냐.
“그래. 그렇겠지······.”
“뭐야, 뭔데 그래. 나도 좀 알자.”
“몰라도 돼. 알려고 하지 마.”
“지현이도 그 얘기하더만. 심각한 건 아니지?”
그렇게 묻자 이수민이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떤다.
내 질문의 어떤 부분이 우리 나약한 치코리타의 정신을 타격했는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가는데······.
이수민이 나직이 답했다.
“맞아. 그냥, 별 거 아니야.”
“그러면 됐다.”
그리고는 별다른 대화 없이 우리 집 근처까지 쭉 갔다.
우리 집 있는 동네 어귀가 보일 때쯤 이수민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내려.”
“집 앞까지 가면 안 되냐?”
“그냥 여기서 내려. 들어가기 귀찮아.”
“뭐야. 이까지 오는 건 안 귀찮았고?”
“······.”
갑자기 입을 꾹 다무는데, 차 주인이 내리라면 내려야지.
차에서 내리고 문에다 손을 얹고 말했다.
“잘 타고 왔다.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보자.”
“······.”
“야, 천군아. 치코치코? 나 간다니까? 그래도 인사는 좀 해주면 안 되냐?”
이수민은 대꾸도 안 하고 자기 가방만 뒤적거렸다.
대체 뭘 하나 싶어서 다시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는데,
“이거 가져가.”
불쑥 나한테 뭘 내민다.
뭔지 확인하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 봤다.
오늘이 2월 13일.
그러니까 발렌타인 데이 하루 전날.
“이거 혹시 나한테 초콜릿 주는 거냐?”
“그래.”
“발렌타인 데이라고?”
“그래.”
“그으. 뭐냐. 일단 선물해 주는 마음은 고마운데······.”
좀 난감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받아든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가 났다.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abc 초콜릿 딸랑 하나 주는 거는, 이게 주는 입장에서도 받는 입장에서도 모양새가 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냐?”
“······마음을 담아서 주는 게 중요한 거 아냐?”
이수민이 항변하듯 말했다.
이것도 정론이라서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건 그렇지. 그래, 잘 먹을게.”
“지현이한테는 내가 줬다고 말하지 마.”
“오늘 너랑 나랑 같이 있던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말하냐. 가는 동안 먹으면서 증거인멸까지 시킬 테니까 안심해라.”
“알겠어. ······잘 가.”
“그래. 조심히 들어가라.”
대답도 없이 이수민이 차를 거칠게 몰았다.
부아앙 소리를 내며 차가 금세 멀어졌다.
“저 새끼 사춘기 왔나?”
서른이 다 된 나이에 안타깝게도······.
초콜릿을 녹여 먹으며 휘적휘적 집을 향해 걸었다.
***
다음날은 휴일이라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는데,
방에서 나와보니 온 집안이 초콜릿 향으로 가득했다.
부엌에 있던 지현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딸 초콜릿 만들어?”
“응. 발렌타인 데이 선물!”
그러면서 검고 뭉툭한 물체를 내게 내밀었다.
대화의 맥락으로 판단하건대 일단은 초콜릿인 게 분명했다.
입에 넣어서 맛을 봤다.
······abc 초콜릿이 그리워지는 맛이었다.
“어때? 아빠 초콜릿 쓴 거 좋아해서 좀 쓰게 만들었는데.”
“응. 쓴맛 나게 잘 만들었네······.”
“히히, 다행이다.”
“엄마한테도 주지 그래?”
“엄마가 오늘은 자기가 먹는 날 아니라는데? 아빠 먹은 다음에 남는 거 있으면 조금만 먹는대.”
거실 쇼파에서 책을 읽고 있던 애 엄마가 말했다.
“응. 오빠 배부를 때까지 먹고 나면 맛만 볼게.”
시선을 돌려 애 엄마와 눈을 마주했다.
‘당신 진짜 이럴 거야?’
‘왜애? 내가 뭘?’
‘반만 먹어줘.’
휙, 하고 애 엄마가 다시 소설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한 번에 다 먹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현이의 신경을 다른 데로 돌려야 했다.
“그러고 보니까 딸, 밖에 좀 시끄럽지 않아?”
“응. 보니까 우리 맞은편에 비어 있던 집 있잖아. 거기 누가 이사오는 거 같던데? 아, 혹시 인사 오면 이거 좀 나눠줄까?”
“아냐. 우리 딸이 직접 만들어준 건데 아빠가 다 먹을게.”
초면부터 그런 실례를 저지를 순 없지.
우리 집 초인종이 울린 건 내가 초콜릿을 거의 다 해치우고, 기어이 애 엄마의 입에까지 한 조각 물려준 뒤였다.
인터폰으로 누군지 확인을 한 지현이가 반색을 했다.
“와, 진짜 인사 왔나봐. 내가 나가볼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현이가 쪼르르 달려나갔다.
***
문을 연 직후, 유지현이 느낀 첫 감상은 이랬다.
‘엄청 예쁘다!’
나이는 또래 정도 되어 보였지만 뭐랄까.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품 같은 게 느껴졌다.
‘근데 외국 사람······, 맞지?’
머리칼이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지만 누가 봐도 한국 사람은 아니었다.
‘동유럽 그런 덴가? 한국말 모를 것 같은데······.’
고민하던 유지현은 자신이 아는 유일한 서양말로 인사를 건네기로 했다.
“헤, 헬로우?”
이국적인 생김새를 한 소녀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유지현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소녀가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나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진짜요? 아, 진짜네.”
생각해 보니 지금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유지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있잖아요. 외국 사람, 맞죠?”
“네. 러시아에서 왔어요.”
‘마, 마더 러시아······!’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유지현은 스스로의 외모에 상당히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이 정도면 반도의 열일곱 살 중에서는 능히 최상위권이라고 자부했건만······, 드넓은 유라시아 대륙의 기상 앞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엄마랑 나이가 비슷하고 처음 본 사이였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의 충격.
“이웃인데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나 이름은 나탈리야인데, 괜찮으면 타샤라고 불러줘요.”
소녀, 나탈리야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유지현도 마주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유지현이에요. 올해 열일곱 살!”
“한국 나이로요?”
“응! 며칠 있으면 고등학생이에요.”
“그래요? 나도 여기 고등학교 다니려고 온 건데.”
‘고등학교? 유학생?’
머릿속으로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혹시 각성자예요?”
“네. 마법 배우려고 유학 왔어요. 학교가 이 근처라서요.”
이 동네 근처라면 딱 한 군데밖에 없다.
유지현은 반가운 마음에 나탈리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도 3월부터 거기 다니는데!”
“정말요?”
“응. 우리 친구해요, 친구!”
입학하기도 전에 새 친구가 생긴 유지현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웃었다.
그때 등 뒤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 뭐하고 있어?”
“아빠. 나 벌써 학교 친구 생겼다?”
뒤를 돌아보며 유지현이 자랑하듯이 말했다.
“친구?”
“응! 유학 왔대. 아빠도 인사해. 우리 아빠예요.”
“······안녕하세요?”
“아, 반가워요.”
유지현을 사이에 두고, 나탈리야와 유수현이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