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가 보면 알겠죠.
겨우 위로처럼 한 마디를 건넸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어떻게 그래······.”
부스럭 소리와 함께 탁자에 얼굴을 대고 있던 애 엄마가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 벌겋게 자국이 나 있었다.
운 건 아니지만, ‘지금 나를 놀리면 울 수도 있으니 취급에 주의하세요’ 정도는 될 것 같다.
“지현이가 나 째려봤단 말야. 눈을 막 이-렇게 뜨면서.”
애 엄마는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 일러바치는 건가? 지현이가 아까 저랬다고.
평소에는 들을 일 없는 원망 섞인 어조로 애 엄마가 푸념을 이어나갔다.
“나보고 사기꾼이라 그러구. 얼마나 마음 아팠는데.”
“그래······?”
내가 볼 때 그 정도면 상당히 양호한 결말인데.
아무래도 애 엄마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하기야 우리 둘의 기준이 같을 수는 없겠지.
나로 말하자면 지난 여덟 달 동안 평생 칠 사기란 사기는 몰아서 다 친 사람이다.
가히 사기의 프로페셔널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터.
반면에 애 엄마는 이제 겨우 시작 단계니까.
앞으로 내가 잘 인도해줘야지.
“놀랐어?”
“애가 인상 쓰니까 확 다르더라구.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그런가.”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원래는 이렇게 될 일이 아니었다.
내가 지현이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애 엄마가 지현이를 구슬려서 훨씬 원만하게 끝이 났겠지.
“오빠가 왜 미안해. 이수민 씨가 가자고 했다면서.”
애 엄마가 이해한다는 듯이 말하길래 나도 있는 힘껏 동조했다.
“맞아. 이수민이 졸랐어. 전부 걔 탓이야.”
“응.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제법이더라······?”
애 엄마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호흡을 정돈하고, 차분하게 되돌린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무튼 그 이야기는 이쯤하구. 정확히 어떻게 된 거야?”
“별로 특별할 건 없는데.”
지현이한테는 적당히 현대 판타지스러운 이야기를 지어내서 성화를 노린 모종의 흑막, 애 엄마를 말한다, 과 싸우고 있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한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애 엄마가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그러면 그 사람들 다친 건?”
어차피 다 알고 하는 질문이다.
숨겨봐야 의미가 없어서 솔직히 털어놓았다.
“맞아. 당신이 몽땅 다 덮어썼어.”
“나, 나 억울해.”
애 엄마의 꽉 쥔 두 주먹이 탁자 위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그놈들은 상처 치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가둬놨어. 김유진 씨라고, 당신한테도 말한 적 있지? 그 사람이 이런 거 처리 잘해주거든.”
사마군 놈들은 안전바를 넉넉히 마련해 둔 다음 지현이와 얼굴 맞대게 해줄 거다.
그놈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딸이 납득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특히나 마법사 계집애만큼은.
이번엔 내가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된 거야? 지현이한테 듣기로는-”
“이거?”
애 엄마가 한 손을 들어올렸다.
곧 손바닥 위로 푸른빛 불꽃이 자그맣게 모습을 드러내더니 둥둥 떠다녔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되더라구. 신기하지?”
“위험한 거 아냐?”
“으응. 엄청 말 잘 듣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
“지금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되묻자 애 엄마가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오빠. 여름에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지난 여름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애 엄마가 말한 적 있다.
일 년 후에는 자신이 차수희 본인인지 빙의해서 차수희 행세를 하는 다른 누군가인지 알아낼 수 있다고.
“그거 좀 늦춰야 할 것 같아.”
“성화 때문에?”
“응. 내가 가지고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최소한 믿고 넘길 수 있는 사람 찾기 전에는.”
애 엄마가 손을 조물거렸다.
손바닥 위에 있던 불꽃이 마치 피하려는 듯이 이리저리 일렁였다.
“정말 미안한데······, 그렇게 해도 될까?”
“당연하지. 당신 생각대로 해.”
“고마워, 오빠.”
불길을 거둔 애 엄마가 내 손을 쥐었다.
나도 마주 잡아줬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애 엄마가 계획대로 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뭘 하려는 건지 나한테 정확히 알려주지도 않은 데다가, 되게 불안해 보였으니까.
어떻게 해서든 훼방을 놓을 작정이었다.
자기도 나한테 제대로 안 알려줬는데 피장파장이지.
“오빠 무슨 생각해?”
“응?”
“미안해. 뻔뻔한 말 꺼내서······.”
뭘 지레짐작한 건지 애 엄마가 표정을 흐렸다.
의자에서 일어나서 애 엄마 등 뒤로 다가갔다.
꼭 안아주면서 말했다.
“아냐. 그냥, 내가 잘 해야겠다는 생각했어.”
“오빠가?”
“응, 내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나는 어느 것 하나라도 놓치기 싫었다.
버리고, 단념하고, 잊는 것.
지난 생에서는 그게 내 일이었다.
그렇게 몇십 년을 살아냈다.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 내게 남은 건,
내 손으로 심장에 박아넣은 낡은 검 한 자루.
그게 전부였다.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 엄마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가 맑았다.
눈가가 수줍게 미끄러지고, 얼굴이 다가왔다.
입이 맞닿았다가, 다시 떼어졌다.
물기에 살짝 젖은 입술.
달빛을 받은 얼굴이 참 예뻐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애 엄마도 마주 웃었다.
그리고 말한다.
“근데 누구야?”
“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자동으로 존댓말이 나왔다.
동물적인 직감이었다.
“아아니, 그냥. 좀 궁금해서.”
“그······, 정확히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왜애? 오빠도 알면서.”
애 엄마가 예쁘게 웃었다.
“대체 누구길래, 옛날에 오빠랑 얼마나 깊은 인연이 있었길래 부부라고 의심까지 받는지. 갑자기 그게 좀 궁금하네?”
하늘을 올려다보려고 했는데.
집 안이라서 천장이 막혀 있었다.
운상아. 보고 있냐?
보고 있으면 해명 좀 해줘라······.
***
감격적인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주인공은 사마군과 우리 딸이었고, 입회자 겸 감시자가 둘이었다.
한 명은 이수민.
나머지 한 명은 스미스 교관. 그러니까 나.
“흐윽, 흑. 운혜야······.”
“이제 괜찮아? 히잉. 왜 맞고 다니고 그래.”
양심에 찔리는 바가 없지 않아 있었다.
많이는 아니고 참새 눈물만큼만.
지현이가 걱정스레 묻는데도 이놈들 대답을 제대로 못한다.
멀대 둘은 입에 주먹 넣고 끅끅거리고 있고, 대머리는 항상 그랬듯이 말이 없었다.
마법사 계집애가 대표로 설명했다.
“응. 몸도 회복하고 있고, 밥 잘 먹고 잘 쉬고 있어. 우리 괜찮아.”
이건 전부 사실이다.
감금시켜놨어도 밥은 잘 줬다.
내 돈 쓴 건 아니고 김유진한테서 나간 돈이긴 하지만.
지현이가 물었다.
“그러면······, 이제 자주 볼 수 있어?”
지현이 뒤에 서 있던 내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허튼 소리 지껄일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거야 금제 걸고 협박하면서 벌써 이야기 다 끝냈고, 아예 티도 내지 말란 뜻이었다.
내 의중을 알아들었는지 마법사 계집애가 의연하게 답했다.
“당분간은 좀 힘들어.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아.”
“얼마나 걸리는데? 일주일? 아니면 열흘?”
칭얼대듯이 물으면서도 지현이 표정이 썩 밝지가 않았다.
꽤 오랫동안 못 볼 거라는 건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으니까.
“전부 끝나고 나면 언니가 말해줄게. 그때까지 기다려줄래?”
“······응.”
겨우 지현이가 한 발 물러섰다.
내가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랑 이수민 씨가 이 친구들 잘 데리고 있을 테니까.”
방금 어디서 뿌드득 이 갈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아님 말고.
“응. 아저씨도 조심해요.”
짧은 상봉을 끝낸 후 지현이는 이수민과 함께 갔다.
대머리와 멀대 둘은 국정원 헌터 같은 사람들이 와서 데려갔고.
개수작 부리려는 시도만 안 하면 배부르고 등 따숩게 지낼 수는 있을 거다.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면 좀 더 완화해줄까 생각도 하는데······.
뭐, 아직은 먼 얘기다.
그리고 나는 마법사 계집애를 맡았다.
미리 마련해 둔 집에 처박아두고, 문을 나서기 전에 다시 한 번 일렀다.
“잘 찍어놔라.”
“말로만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
이미 다 합의가 된 건데도 마법사 계집애가 항변했다.
“어허. 나 때는 말이야, 어? 인강으로 공무원 합격하고 대학 들어가고 다 했어. 대한민국 교육열이 우스워 보이냐?”
“인······강?”
몇 달 만에 한국말로 의사소통 다 될 정도로 똑똑한 계집애긴 해도 아직 실전 어휘는 좀 부족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굳이 가르쳐줄 필요성도 못 느껴서 그냥 할 말만 했다.
“알 거 없고, 아무튼 기초부터 찍어놔라. 내가 먼저 실습해 보고 이상 없으면 다른 애들도 가르쳐줄 거야.”
“하나만 물어볼게.”
“뭔데.”
“대체 마법이 왜 필요하지? 필요도 없잖아?”
필요가 없기는 왜 없냐.
아마 성화가 다시 이쪽으로 넘어온 게 원인인 것 같은데, 현재 전세계적으로 신규 각성자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오랜 세월이 지난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살던 전생 때처럼.
그에 반해 던전이나 게이트가 열리는 빈도는 갈수록 급락해서 헌터들은 거의 다 실직자 신세로 전락했다.
나도 우리 부처를 축소하니 업무를 바꾸니 하는 상황이었고.
이놈들한테서 마법지식 뽑아먹으면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잖이 이바지할 수 있겠지.
쌈박질밖에 할 줄 모르는 헌터보다야 실생활에서도 압도적으로 유용해 보이니까.
내 설명이 끝나자 마법사 계집애가 비꼬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 걸 신경 쓸 줄은 몰랐는데.”
“맘대로 생각하든가. 시킨 거나 제대로 해.”
손을 휘적휘적 흔들면서 걸어나왔다.
건방진 년이 정곡을 찌르고 난리야.
그 말이 맞긴 했다.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지.
굳이 의미부여를 한다면 김유진한테 신세진 거나 좀 갚는 것 정도?
이 문제로 골치깨나 썩는 모양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건 다 표면적인 이유다.
나 스스로도 마법을 배우고, 연구도 시켜보려는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다.
혹시 애 엄마가 확 사라져버리거나.
우리 지현이한테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 이유밖에는 없었다.
***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서른네 살, 겨울.
“딸.”
“응?”
“요즘 통 이수민 씨 이야기를 안 하네. 화해한 거 아니었어?”
“······.”
“혹시 또 싸웠나?”
“······아빠가 언니 소식이 왜 궁금하지?”
“어?”
“잘 지내구 있어. 걱정 안 해도 돼.”
“그래? 그러면 다행인데······.”
-서른다섯 살, 봄.
<정부는 마력관리부를 신설하고 각성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실시······.>
“네, 김유진 씨 바쁘실 텐데 전화는 왜 했어요. 뉴스요? 저도 지금 보고 있는데. 에이, 고맙긴 뭐가 고맙습니까. 우리 사이에 그런 말하면 오히려 섭섭한 거 몰라요? 기브 앤 테이크 아닙니까, 기브 앤 테이크.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합니다. ······어? 왜 말이 없습니까? 뭐 불만 있어요?”
-서른다섯 살, 가을.
“오빠, 아까 지현이 고등학교 진학 때문에 학교에서 전화 왔는데.”
“왜? 일 년 넘게 남았잖아.”
“무슨 특별 고등학교 생긴다고, 중학생 각성자들은 다 그쪽으로 몰릴 건데 의향이 있으면 미리 준비해두는 게 좋다고 하네? 일단 애랑 상의해본다고 했어.”
“지현이한테 물어봤어?”
“수학학원 이제 안 가도 되냐고 좋아하더라구.”
“아이고······.”
-서른여섯 살, 여름.
“이제 자주 올 필요 없어.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는 걸로 충분해.”
“내가 물어보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마법이란 게 원래 이렇게 빨리 기초 뗄 수 있는 거냐?”
“당연히 아니지. 다른 멍청이들은 당신 반의 반도 못 따라오는 거 보면 몰라?”
“그치?”
“진짜 이해가 안 되네······.”
“뭐가.”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 모르겠어서. 어차피 알려줄 생각도 없겠지만.”
“알면 됐다. 아, 조만간 자리 한 번 만들어줄게. 대머리도 네 얘기 많이 하더라만.”
“······진짜?”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왜 해.”
“그러면 혹시 그 애도 부를 수 있어?”
“그건 생각해 보고.”
“사실 깜빡하고 안 가르쳐준 요령이 몇 개 있는데-”
퍼억!
-서른여섯 살, 겨울.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와 마법 특별교육 교류에 관한 협약을 체결한 국가의 수는······.>
“딸. 그러면 딸이 내년에 가는 학교. 외국 사람들도 같이 수업받고 그래?”
“글쎄? 외국 애들 많다고는 듣긴 했어.”
“아무튼 근처라서 다행이다. 기숙사 들어갔으면 우리 딸 보고 싶어서 큰일 날뻔했지.”
“아빠.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거 하나 있거든.”
“뭔데?”
“진짜 집에서는 괜찮단 말야? 근데 나 내년이면 이제 고등학생인데 밖에서는 너무 좀······.”
“······아빠가 아는 척하는 게 싫어? 이제 마중 나가지 말까?”
“아아니, 그게 아니라아. 아무튼 나 분명히 말했다? 나도 큰맘 먹고 말한 거니까 까먹으면 안 돼?”
“아빠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어디 가!”
“나 약속 있어!”
“당신도 방금 들었지? 십육 년을 먹여주고 입혀줬는데 저 배은망덕한 기지배가······.”
“애가 싫다잖아. 집에서만 해, 집에서만.”
***
넓디넓은 대저택에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울렸다.
“타샤. 듣고 있니?”
“듣고 있어요.”
검은색 눈동자에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조용히 답했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 머나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길을 하고 소녀가 말을 이었다.
“두 번 듣지 않아도 알아요. 길게 할 이야기도 아니고요. 가 보면 알게 되겠죠.”
“그렇게 가볍게 여길 일이-”
“걱정 마세요. 그곳 사람들이 마법을 어떻게 아는지, 어째서 비밀스럽게 다루지 않는지, 마나를 느끼는 이들이 왜 다시 늘고 있는지. 가능하면 다 알아올게요. 그걸 알면 옛날에 힘을 잃어버렸던 이유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그제서야 맞은편의 노인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생각했다.
환상같은 옛 영광에 아직도 취해 있는 멍청이들에게 이건 제법 중대한 문제인 모양이라고.
부탁을 들어주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까.
다만 다시금 생각했다.
이 모든 게 그저 시시할 뿐이라고.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무언가가, 자신에게는 분명히 존재했다고.
지금도 그 빈자리를 또렷하게 느낀다고.
머나먼 과거, 강호무림이 서역이라 일컬었던 곳에서 이루어진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