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75화 (75/130)

75. 부부는 일심동체잖아.

성화가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건 아까 공터에서 처음 보자마자 바로 알았다.

존재 그 자체가 위험해 보인다는 건 아니었지만 뭐랄까.

조금만 일이 틀어져도 온갖 난리가 날 법한 초특급 사고뭉치의 포텐셜을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저만하면 오빠가 고생했을 만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 차수희는 유수현에게 말했다.

‘오빠. 이제 나 없어도 되겠지?’

‘그렇긴 한데 왜?’

‘나 잠깐 갔다 올게.’

‘성화?’

‘응.’

그리고 사라진 성화를 찾으러 나섰다.

물론 자리를 비우는 목적이 그것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곧 벌어질 광경을 유수현은 그다지 보여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이쪽에서 알아서 피해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그녀 스스로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만큼이나 유수현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했다.

사실 차수희 입장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지만,

‘내가 신경 안 쓴다고 쳐도 오빠는 아닐 수 있으니까.’

그게 유수현이 원하는 바라면 그렇게 해주는 게 맞았다.

이런 게 다 부부 사이의 배려 아니겠냐며, 스스로의 행동에 다소 뿌듯함까지 느끼면서 차수희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갔다.

그리고 목숨보다 소중한 딸 주위로 새파란 불꽃이 얼쩡거리고 있는 위험천만한 광경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성화를 낚아챈 차수희는 오직 한 가지만을 떠올렸다.

‘지현이는 절대 안 돼!’

양손으로 감싸고 있던 성화가 크기를 키웠다.

성냥개비만 하던 것이 손바닥만 하게 커졌다.

푸른 불꽃 속에서 자그마한 소녀의 잔상 같은 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마치 차수희 본인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불꽃이 일렁였다.

언니는 나를 버리지 않을 거야? 라고.

차수희는 생각했다.

‘안 버려! 안 버릴 테니까 지현이 말고 나로 해!’

그러자 푸른 불꽃이 손 안으로 빨려들어오듯이 사라졌다.

곧 가슴 속에서 따뜻한 기운 같은 게 느껴졌다.

처음 유지현과 조우하고 여기까지 고작 수십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차수희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해 나갔다.

‘제일 큰 건은 해결됐어.’

망할 불덩어리는 이제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었으니까.

어떻게 처리를 하든 자유였다.

갑자기 가슴 속에서 성화가 꿈틀거렸다.

차수희는 으름장을 놓았다.

‘히이익거리지 말고 조용히 있어!’

불길이 다시 잠잠해졌다.

차수희는 생각을 이어나갔다.

그러면 다음은.

“언니 누구예요? 방금 그거요! 어떻게 했어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질문을 쏟아내는 유지현.

사랑하는 딸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현재 당면한 문제였다.

우선 시간부터 벌어야 했다.

차수희는 차가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런 거 물어보려면 본인부터 자기소개 해야 되는 거 아니니?”

“어, 어어?”

“너는 누군데? 너부터 먼저 말해. 그러면 나도 말해줄 수도 있지.”

“그게 그러니까요.”

유지현이 우물쭈물거렸다.

그러더니 말했다.

“제 이름은 유수희라고 하는데요.”

차수희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고 말았다.

충격과 공포 속에서 생각했다.

‘지현이가 나한테 거짓말을 했어.’

심지어 가명 센스조차 절망적이었다.

본인 성에다 당장 생각나는 이름을 하나 갖다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차수희 본인의 이름을.

차수희는 어렵사리 답했다.

“그래? 아무튼 너는 여기 왜 왔니? 아니지. 어떻게 왔어?”

“방금 이름 말해줬잖아요. 이제 언니도 말해줘요.”

표정을 살짝 찌푸린 유지현이 볼멘소리로 답했다.

차수희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지현이가 나한테 말대답까지 했어······.’

투정을 부리는 것 정도야 당연히 들어본 적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화가 난 듯이, 부루퉁하게 불만 섞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수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침착해. 나한테 한 게 아냐.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잖아.’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안쪽 공터에 있는 사람들과 딸을 마주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행히 유지현은 거기까지 가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구슬려서 밖으로 데려나가는 게 가장 좋았다.

‘오빠는 아마 기다릴 거야.’

공터에서 빠져나오고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니다.

그녀가 아는 유수현이라면 너무 늦어지지 않는 이상은 차수희가 돌아오길 기다릴 터였다.

유수현과 관련한 그녀의 예상은 백발백중에 가까웠다.

그러니 시간적으로는 여유가 있다.

방법이 문제일 뿐이었다.

뭔가 수상한 점을 눈치채고 여기까지 쫓아온 게 분명한데, 난생 처음 본 사람이 나가란다고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정파니 마교니 성화가 어쩌니 같은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다.

유지현이 어디까지 아는지를 모르는데 괜한 단서만 더해줄 위험성이 있었다.

“빨리 언니도 말해줘요. 언니 누구예요? 그리구 방금 파란불 언니가 가져갔어요? 어떻게 했어요?”

차수희는 할 말이 궁해서 침묵하고 말았다.

이 또한 극히 드문 일.

상대가 유지현이 아니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였다.

잠깐 대답을 기다리던 유지현이 가자미눈을 뜨고 말했다.

“언니 나한테 거짓말했네요?”

“뭐?”

“말해준다고 했잖아요. 나 여기 볼 일 있어서 온 거란 말야. 나 어엄청 바쁜 사람이에요. 빨리 말해줘요.”

“그게 있잖아.”

물론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으음, 하고 작게 불만을 흘린 유지현이 다시 입을 뗐다.

“저기 언니. 우리 엄마가 그랬거든요.”

‘엄마? 나?’

당황한 차수희의 얼굴을 흘겨보면서 유지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얼굴 예쁜 언니들은 다 사기꾼이니까 절대 믿지 말라고 했는데, 언니는 그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지현이가 나한테 사기꾼이라고 욕했어!’

심지어 돌려서 비꼬기까지 했다.

‘아, 안 돼.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더 듣고 있다간 정신이 버티지 못한다.

차수희는 작전상 후퇴를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유지현이 더 이상 추궁하지 못하게 공터로 돌아가는 것이다.

‘가서 작전회의부터 해야겠어.’

차수희는 몸을 돌렸다.

유지현이 놀라서 외쳤다.

“이 사기꾼! 어디 가요!”

입술을 짓씹으며 차수희는 벽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마주쳤다.

방금 벽을 통해 넘어온 여섯 사람.

유수현과 이수민.

기절해서 축 늘어져 있는 사마군까지.

가장 먼저 유수현과 눈이 마주쳤다.

차수희는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오빠······, 왜?’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의문이었다.

***

흐음. 대충 처치를 끝내놓긴 했는데.

“이걸로 되려나 모르겠네.”

혼잣말처럼 흘린 걸 들었는지 이수민이 다가와서 물었다.

“왜? 뭐가 잘 안 됐어?”

“그런 건 아닌데.”

대부분 잘 되긴 했다.

사마군 전원한테 심령금제도 걸어놨고 대머리와 멀대 둘은 단전 부수고 팔다리 적당히 분질러뒀다.

하지만 마법사 계집애는 이걸로 충분한지 확신이 안 선단 말이야.

내가 말했다.

“얘는 아예 기혈이란 기혈은 전부 다 두들겨둬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렇게 하면 되잖아.”

이수민이 뭘 그런 걸 고민하냐는 듯이 반문했다.

내가 답했다.

“잘못하다가 여기서 송장 치울 것 같아서 그러지.”

일급 위험인물인 만큼 조용한 장소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공을 들이고 싶었다.

이수민이 물었다.

“일단 당장은 별 위험 없는 거지?”

“그렇긴 하지.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러는 거야.”

“그럼 나중에 처리하고, 빨리 돌아가자.”

이수민이 살짝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왜? 나간 사람 올 때까지 좀 기다려봐.”

“언제 올지 모르잖아. 빨리 가야 돼.”

“금방 올 텐데? 조금만 더-”

<지현이한테 잠깐 나간다고 쪽지만 적어두고 나왔단 말이야. 혹시라도 깨면 큰일나. 빨리 가야 돼.>

이수민이 보낸 전음의 내용이었다.

이미 사마군 놈들은 다 의식을 잃고 널브러진 상태였는데도 어지간히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허공섭물로 사마군 놈들을 들어올리고 공터를 빠져나왔다.

올 때는 길이 복잡했는데 나가는 길은 일직선이었다.

다시 말해서 일직선으로 마주쳤다는 뜻이다.

애 엄마.

그리고 지현이와.

애 엄마가 내게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오빠······, 왜?’

나는 이수민을 향해 살짝 고갯짓했다.

‘얘가 빨리 나가자고 졸랐어.’

‘그랬구나······.’

왠지는 모르겠지만 애 엄마는 퍽 안도한 듯했다.

눈빛 교환을 통해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내가 먼저 말했다.

‘이거 그냥 수습은 못하겠지?’

‘그런 것 같아.’

‘어떻게 하지?’

‘오빠, 나한테 생각이 있는데.’

‘뭔데?’

‘설명할 시간은 없구, 내가 하는대로 따라줘.’

뭘 할 건지 대강 짐작이 갔다.

애 엄마에게 물었다.

‘괜찮겠어?’

‘상황상 내가 하는 게 맞을 것 같아.’

‘고마워.’

‘왜 고마워. 부부는 일심동체 아냐?’

‘당신 말이 맞아.’

애 엄마가 웃었다.

그리고 애 엄마가 보낸 마나의 움직임 같은 게 내게로 다가왔다.

강기를 운용해 막아냈다.

콰아앙!

폭음이 터졌다.

지현이를 흘끗 보니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되는 것 같다.

그럴 만도 하지.

피투성이인 사마군 애들이 허공에 둥둥 떠 있고,

이수민이는 대응이 느려서 입만 떡 벌리고 있고,

죽은 줄 알았던 스미스 아저씨랑 모르는 여자가 싸우려고 하는 상황이니까.

한 차례 공격을 막아내자 애 엄마가 다시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사악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후후, 성화는 이미 내가 가졌다.”

나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억지로.

“뭐라고!?”

애 엄마가 손가락으로 지현이를 척, 하고 가리켰다.

“이 멍청한 계집애 근처에 있길래 바로 흡수해버렸지.”

“······.”

방금 애 엄마 얼굴에서 자괴감 같은 걸 본 것 같다.

모른 척해주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가 말했다.

“그걸로 뭘하려는 거지? 목적이 뭐야!”

애 엄마가 흑막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알려줄 수는 없지. 하지만 기대해도 좋아. 으하하핫!”

그 말만 남기고 애 엄마가 바깥으로 줄행랑을 쳤다.

지현이가 다급히 외쳤다.

“어디 가!”

내가 달려가서 지현이 어깨를 붙잡았다.

“안 돼! 기다려!”

지현이가 놀라서 나를 돌아봤다.

내가 말했다.

“이미 늦었어. 쫓아가봐야 헛수고야.”

“아, 아저씨. 돌아가신 거, 근데 방금 저 언니······.”

나는 주위를 돌아봤다.

사마군 놈들은 계속 기절해 있고, 이수민은 이제야 정신이 돌아오는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얼굴이었다.

표정을 찌푸려서 ‘너는 입 다물고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래. 설명을 해줘야겠네.”

무거운 어조로 내가 지현이에게 말했다.

***

“나 왔어.”

인기척도 없이 집이 조용했다.

고개를 돌려봤다.

역시······.

파자마를 입은 애 엄마는 처연한 얼굴로 환하게 비치는 달빛만 쳐다보고 있었다.

안 마시고 관상용으로 두던 가장 좋은 술을 꺼냈다.

잔까지 두 개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조용히 술잔을 탁자에 두고, 술을 따랐다.

애 엄마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고생했어.”

애 엄마가 술잔을 받아들었다.

한 번에 들이키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술잔을 내민다.

나도 말하지 않고 술을 따라줬다.

한 번 더 술잔을 비운 후에 애 엄마가 물었다.

“잘 해결됐어?”

“응. 수습 다 했어. 네 명은 가둬뒀고 지현이는 이수민이랑 같이 그 집 갔어.”

“다행이네······.”

애 엄마가 술병을 쥐었다.

자기 앞에 놓인 잔에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따른다.

이거 그렇게 먹는 거 아닌데······.

하지만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애 엄마가 혼자 마시려고 하길래 서둘러 내 잔까지 들고 건배를 했다.

나는 반만 마셨고 애 엄마는 또 다 마셨다.

문득 애 엄마가 말했다.

“오빠, 나 하나 물어볼 거 있는데.”

“뭔데?”

“약속해. 솔직하게 답해주기로.”

“알겠어.”

“휴우.”

애 엄마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있잖아. 지현이가, 그러니까 우리 딸이 있잖아······.”

“응.”

“혹시 내 욕, 많이 했어?”

솔직히 말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했다.

애 엄마가 슬픈 예감을 담은 목소리로, 확신처럼 물었다.

“했구나?”

“······.”

침묵을 지키는 나를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애 엄마가 마침내 고개를 묻었다.

손을 뻗어 애 엄마의 등을 쓸어주고,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술 맛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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