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74화 (74/130)

74. 이게 되네?

이수민은 피식 웃으며 달려나가려다 잠깐 발을 멈칫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유수현에게 말했다.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뭔데?”

이수민이 다시 사마군을 한 명씩 바라봤다.

머리부터 땅에 메다꽂혀서 아직 의식이 없는 진태호.

겁에 질려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곡비령.

아무 말 없이 자세를 잡고 있는 혁련휘.

그리고······, 이를 악물고 이수민 자신을 노려보는 천유화.

이수민은 천유화를 마주 응시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명백하게 비웃음의 곡선을 그리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년한테 집중하고 싶거든. 나머지 놈들 못 끼어들게 막아줄 수 있어?”

“왜? 다 상대하기는 힘들 거 같냐? 쟤들 지금 비실비실해. 막상 해보면 별로 안 어려울걸?”

유수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힘들겠냐고?

그럴 리가.

단순한 힘의 총량으로 보면 전성기 시절보다도 지금이 더 강하다.

실전감각이 많이 떨어지긴 했어도 넘쳐흐르는 내공으로 보강하면 그만이다.

이미 한 차례 전투를 거치며 적잖이 소모가 있는 사마군 정도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하물며 계승의식의 영향인지 서 있기도 버거워 보이는 천유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천유화를 죽도록 패버리고 싶을 뿐이다.

“쟤한테 분풀이 좀 제대로 하고 싶어서.”

“알겠다.”

“고마워.”

이수민은 천유화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뒤에서 기합성과 타격음이 들려 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유수현이 알겠다고 했으면 그 말대로 될 테니까.

오로지 저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계집애를 상대하는 것에만 전력을 쏟을 수 있었다.

이수민이 인사처럼 말했다.

“눈 안 깔아?”

“······.”

“눈 깔라고 한 거 안 들렸어?”

두 번째 인사는, 천유화의 바로 귓전에서 건넸다.

입신경 기본공능 이형환위.

안 그래도 힘이 달려서 헥헥거리고 있는 저년한테는 굳이 편재까지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이어서 천유화가 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것보다 빨리,

이수민이 천유화의 머리통을 잡았다.

“내가-”

그대로 온힘을 다해 땅바닥에 찍어버렸다.

“눈 깔라고 했지!”

콰아앙!

단단한 돌바닥이 마치 유리라도 된 것처럼 형편없이 깨져버렸다.

이수민의 뺨으로 핏자국이 살짝 튀었다.

한 손으로 닦아내면서 이수민이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일어나.”

천유화의 머리채를 쥐고 바닥에서 빼내었다.

얼굴 근육을 푸들거리던 천유화가 갑자기 두 눈을 부릅떴다.

이수민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파破 !”

천유화가 혼신의 힘을 다해 구사한 무영창 공격마법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시전자를 모든 타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강대한 호신강기.

급박한 싸움 와중에 사용하기는 은근히 까다롭지만 이런 정지 상태에서 방어 용도로 쓰기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이수민은 천유화가 다른 수작질을 부릴 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왼손으로 천유화의 머리채를 쥐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었다.

퍽, 퍼억.

퍼어억!

피와 치아조각이 함께 튀어나왔다.

왼손에는 머리칼이 한 움큼도 넘게 뽑혀 있었다.

이수민은 천유화의 단전에 손을 얹고 내력을 발출했다.

파앙!

천유화의 몸이 동굴 벽 쪽으로 쏜살같이 날았다.

이수민이 정확히 같은 속도로 따라 달렸다.

그리고 천유화가 동굴벽에 부딪치는 타이밍을 가늠하고, 다시 한 번 손바닥으로 얼굴을 쥐었다.

콰아앙!

그대로 동굴 벽에 쑤셔박았다.

이어진 네 번의 공격.

왼팔 팔꿈치.

오른팔 팔꿈치

오른발 무릎과 왼발 무릎.

정확히 관절을 노려 뼈를 부러뜨렸다.

천유화가 시체처럼 바닥에 허물어졌다.

“······자.”

“뭐라는 거야.”

뒤통수를 보이고 엎어진 천유화가 다시 한 번, 실낱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신자······.”

이수민은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예 죽여버리든 죽는 것보다 못한 신세로 만들든 이제 사마군과 골치 아프게 엮일 일은 더 이상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이 모두 옳은 줄 아는 이 시건방진 년에게 적어도 한 마디 정도는 해 두고 싶었다.

천유화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들어 올렸다.

눈을 마주치고 으르렁거리듯이,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너, 성화가 뭐하는 물건인 줄은 아냐?”

“그딴 게······, 뭐가 중요-”

“저 빌어먹을 불덩이 때문에 운혜한테 몇 번이나 큰일이 생긴 줄 알아?”

“······!”

“나랑 저기 저 인간이 그거 막으려고 죽을둥살둥 발버둥친 건 알아?”

천유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파의 환생자들과 손을 잡은 것.

설운혜를 속였던 것.

자신들을 속이고 설운혜 행세를 한 것.

그 모든 진실과 오해와 다툼을 압도하는 진심을 이수민의 말에서 느낀 것이다.

애써 부정하고 싶었지만 단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지금 이수민의 말에서 느껴지는 설운혜를 위하는 마음이, 자신이 품었던 것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것.

이글거리는 그 감정이 천유화의 머릿속으로 떠오른 모든 논리를 간단하게 격파했다.

이수민이 나직이 말했다.

“운혜랑 이미 만났지?”

“그 애는-”

“운혜는 살려달라느니 그딴 개소리 지껄이면 바로 목 날아갈 줄 알아. 네년한테 그런 말 듣는 것 자체가 모욕이니까.”

“······.”

천유화가 마침내 고개를 푹 떨궜다.

그때쯤 유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정리 다 됐다! 천군이 너도 몇 대 쥐어패고 싶을 것 같아서 안 죽였는데, 아직 멀었냐?”

“여기도 끝났어.”

그리고 이수민이 전음을 보냈다.

<그냥은 못 죽여.>

<왜?>

<이놈들 지현이랑 이미 만났어.>

<일이 또 그렇게 되냐······.>

<일단 무공부터 폐하고 어디 가둬둔 다음에 생각해 보자.>

<그래. 지현이한테 인사만 시키고 이놈들 왔던 곳으로 쫓아버릴 수 있으면 그렇게 하든가, 안 되면 그때 가서 죽이든가 하면 되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수현이 손가락을 세 번 튕겼다.

허공에 생겨난 강기들이 각각 혁련휘와 진태호, 곡비령의 단전으로 들어갔다.

투웅,

묵직한 소리가 들렸고, 사마군의 세 사람이 나란히 비명을 질렀다.

유수현이 말했다.

“단전은 방금 나갔고, 팔다리 근맥은 미리 망가뜨려놨다. 일상생활 정도는 얼추 되겠지. 그러면 남은 문제는 저 계집애인데······.”

유수현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여 천유화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천군이 너 잠깐 앉아서 쉬고 있어.”

“왜?”

“얘는 그냥 단전만 터뜨려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좀 살펴봐야겠다.”

“알겠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이수민은 문득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유수현에게 물었다.

“근데 같이 있던 분은?”

“아, 가출한 불덩어리 찾으러 가셨다.”

유수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다.

***

유지현은 눈을 떴다.

어느 인적 드문 산까지 이수민을 쫓아오는 건 순조로웠다.

하지만 그 뒤부터가 문제였다.

이수민이 산 중턱의 동굴처럼 뚫린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까지도 확인했다.

잠시 기다려서 시간차를 두고 뒤를 밟았건만······, 거기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뭐야? 왜 막혀 있어!”

이곳으로 이수민이 들어온 건 확실한데 따라와보니 막다른 길이었다.

동굴 벽을 두드려도 보고 밀어도 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들키더라도 벽을 아예 뚫어내야 하나, 아니면 여기서 가만히 기다려야 하나 고민을 하는 차에 무언가 푸른빛이 번쩍이는 광경과 함께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어?”

새파란 불꽃이 자신의 주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유지현은 그 불꽃의 정체를 알았다.

“······성화?”

화르륵!

불꽃이 크기를 키웠다.

타오르기만 할 뿐 불꽃이 말을 할 수는 없는데도, 유지현은 왠지 모르게 알았다.

마치 알아봐줘서 기쁘다는 표현인 것만 같았다.

성화가 유지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전생에서는 익숙했던 따뜻한 기운.

하지만 유지현이 난처한 듯이 말했다.

“아, 안 돼.”

화륵, 화르륵.

불꽃이 요동쳤다.

이번에는 토라진 듯한 모습.

하지만 유지현이 다시 한 번 거부했다.

“안 된다니까?”

거부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지난 여름에 겪었던 일.

자신을 희생하고 사라진 스미스 아저씨가 생각났던 것이다.

‘아저씨가 아무 이유 없이 연결을 끊었을 리는 없어.’

유지현은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너도 나 따라다니면 귀찮을 거 아냐. 안 돼. 돌아가. 아니, 돌아가는 건 아니구······. 어?”

그제서야 퍼뜩 생각이 들었다.

‘성화가 왜 여기 있어?’

그런 의문과 함께 더욱 확증을 굳혔다.

‘여기서 사부님이 뭘 하고 계시나봐.’

유지현이 물었다.

“혹시 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

불꽃이 일렁였다.

그리고 꼬리를 흔들며 앞으로 향했다.

“따라오라고?”

화르륵.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와, 와아.”

가로막힌 벽이나 갈림길에서도 성화가 들어간 곳을 따라가니 거짓말처럼 다음 통로가 나타났다.

그렇게 서너 번쯤 지났을까.

성화가 갑자기 멈춰섰다.

유지현이 물었다.

“왜 그래?”

성화가 유지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유지현은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생각했다.

‘얘······, 지금 나랑 협상하자는 거야?’

여기까지는 서비스였다.

이 다음 길부터는 신녀가 되면 알려주겠다.

그런 의도인 게 틀림없었다.

“안 돼. 안 되는데······.”

유지현은 깊이 고심했다.

‘어떻게 하지? 그냥 계속 안내해달라고 할까?’

유지현은 저도 모르게 한 손을 올렸다.

성화가 춤을 추듯이 손 주위로 다가왔다.

그 휘황찬란한 움직임에 현혹되던 유지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냐!’

앞으로 가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또 여름 같은 사단을 겪고 싶지도 않다.

성화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손 치더라도 직감이라는 게 엄연히 존재하니까.

‘얘랑 다시 엮이면 별로 안 좋을 거 같아. 그냥 느낌이 그래!’

기다리다 지쳤는지 성화가 급기야 유지현 쪽으로 달려들려고 했다.

화들짝 놀란 유지현이 손바닥을 내밀며 있는 힘껏 외쳤다.

“싫어!”

피싯.

사람 머리만하던 불꽃이 갑자기 성냥불처럼 크기를 줄였다.

그리고 비틀비틀 일렁였다.

괜시리 죄책감을 느낀 유지현이 우물쭈물 말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으, 싫다는 게 아니구······.”

묵묵히 자리 잡고 있던 동굴 벽에서 처음 보는 여자가 모습을 드러낸 건 그때였다.

여자와 유지현의 눈이 마주쳤다.

유지현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진짜 예쁘다!’

햇수로 십사 년을 살면서 이래저래 예쁜 언니를 많이 봤다.

개중에는 이 언니는 왜 티비 안 나오고 맨날 나한테 맛있는 거 사주지? 라는 의문이 들 만큼 예쁜 사람들도 있었다.

한데도 지금 마주친 예쁜 언니는 그런 사람들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이런 사람은 지금껏 딱 한 명 봤다.

‘엄마랑 비슷······, 아냐. 엄마보다 쪼오금 덜 예뻐.’

유지현은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여자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뚫어져라 유지현을 쳐다봤다.

일 초의 짧은 침묵.

그리고 여자의 시선이 유지현의 손 주변, 여전히 힘없이 일렁이는 성화로 가닿았다.

그 순간,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으갸아앗!”

여자가 유지현 쪽으로 달려왔다.

양손을 뻗었다.

유지현은 놀라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여자의 의도는 공격이 아니었다.

어느새 양손에 성냥불만한 성화를 나꿔챈 여자가 유지현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어? 그, 어? 그거······.”

여자는 손에 든 성화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성화가 크기를 키웠다.

화륵, 화르륵!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처럼 애달픈 소리와 함께 타올랐다.

그 모습이 유지현에게는 이렇게 해석됐다.

‘이래도 돼?’

유지현은 망설였다.

전생에 신녀로 지냈던 수년간의 시간.

남들이 들으면 웃을까 말하지는 않았지만, 유지현에게는 성화가 마치 친자매처럼 느껴졌다.

가슴속의 온기를 느끼며 이런저런 말을 할 때면 성화가 따뜻하게 응답해줬다.

그래.

그랬지만······.

‘지, 지금은 좀······.’

찰나의 망설임.

화아악.

성화가 요동쳤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푸른 불꽃이 여자의 손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어? 언니 뭐예요. 지금, 어?”

경악한 유지현이 검지손가락으로 여자를 척하고 가리켰다.

***

한편.

스무 살 이후 두 번째로,

심지어 먼젓번보다 조금 웃긴 비명을 지르고 만 차수희는 애써 호흡을 정돈하며 생각했다.

‘······이게 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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