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73화 (73/130)

73. 너로 정했다.

조금 전까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초롱초롱한 눈빛이었다.

방에 아무도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지만, 누가 염탐이라도 하듯이 유지현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흐읍!”

숨을 멈추고, 첩보영화의 한 장면처럼 방문을 열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갔다.

‘이상해. 뭔가 있어······.’

아까 얼핏 잠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다만 정말로 깊이 잠들지는 않았다.

비몽사몽하는 차에 이수민이 안아서 침대에 뉘어주길래 그게 좋아서 그냥 계속 잠든 척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리한 청각을 가진 유지현은 듣고 말았다.

방문 틈으로 어렴풋하게 새어들어온 목소리.

‘어떻게 됐어? 설마 벌써 죽인 건-’

‘나를 왜?’

‘지현이 아까 잠들었는데.’

집이 워낙 넓은데다 이수민의 목소리가 무척 나직했기 때문에 정확히 들은 건 아니다.

하지만 대화 내용이 극히 흉흉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처음에는 소설이나 영화 내용 같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지만, 수혈까지 짚은 걸 보니 확실하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 자신은 그 나이대에 걸맞지 않은 사고능력과 추리력을 가지고 있었다, 라고 유지현은 생각했다. 사태의 본질을 한눈에 꿰뚫어보는 혜안이라고 해야 할까.

얼마 전에 만났던 천유화가 ‘할 일이 있다’라고 말했던 것과 지금 상황이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유화 언니랑 사부님이 이미 만난 걸지도 몰라.’

두 사람이 함께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천유화가 자신의 얘기를 이수민에게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진행 중인 일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연막을 친 것일 뿐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또 하나 미심쩍은 것이 있었다.

천유화가 했던 말.

‘언니는 우리 운혜랑 앞으로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돼. 싸울 사람이라고는······, 우리 운혜 못 살게 구는 비열한 정파놈들 말고는 없지.’

들을 당시에는 그냥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라고 여겼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느낌이 확 달랐다.

어쩌면 이 세상에도 비열한 정파 놈들이 암약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걸 알아챈 이수민과 천유화가 몰래 싸우고 있는 거다.

자연스럽게 그런 결론이 도출되었다.

‘쫓아가 봐야겠어.’

정말로 정파 놈들이 적이라면 신교의 천마로서 마땅히 자리를 지켜야 한다.

지금은 이수민보다 오히려 자신이 훨씬 강하니까.

틀림없이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설령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나 모르게 숨기는 거 이제 지긋지긋해.’

이따금 느꼈던 꺼림칙한 감각.

유지현 본인이 모르는 사이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가 본인도 모르게 해결된 듯한 느낌.

이제는 모든 진상을 밝혀낼 때가 온 것이다.

굳게 결심한 유지현은 옷을 챙겨입고 창문을 나섰다.

공중에 뜬 채로 이리저리 살폈다.

“······찾았다.”

거칠게 달리고 있는 이수민의 새빨간 스포츠카를 발견했다.

유지현이 그 뒤를 쫓았다.

***

“뭐라고?”

“그러니까, 너 방부터 빼라신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되묻는 이수민에게 다시 말해줬다.

팔짱을 끼고 노려보던 마법사 계집애가 설명했다.

“저번에 했던 계승의식 기억하지? 그때 제대로 연결이 안 된 거야. 현판에다 ‘진가놈의 집’이라고 이름 써둬서 다른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데, 그렇다고 네가 들어가 살지도 못하는 거지.”

“······말버릇 제대로 안 해?”

“흥. 이제와서 그런 걸 따진다고? 네에, 비열한 정파 놈들의 부역자가 돼버리신 전대 교주님. 당신의 보잘것없는 자질 덕분에 저희가 다행스럽게도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심을 다해 감읍드립니다.”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마법사 계집애가 정말로 몸을 구십도로 숙였다. 아예 큰 절까지 올릴 기세였다.

조롱 아닌 조롱을 당한 이수민이 분해서 부들부들 떨길래 적당히 달래줬다.

“야야, 참아라. 쟤네 벌써 많이 맞았어.”

“······그래. 일 끝나면 그때 보자. 기대해도 좋아.”

이수민이 경고하듯이 말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마법사 계집애가 이번에는 아예 대놓고 비웃어댔다.

“기대는 무슨 기대? 네 주인이랑 이야기 다 끝났어. 성화만 넘겨주면 손끝 하나 대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못 들었나봐? 충견 노릇해도 보람이 없네.”

“계속 수다나 떨 생각이면 나랑 하는 게 어때요?”

“······사양할게.”

애 엄마가 한 마디 하니까 그제서야 꼬리를 내린다.

그 모습을 보고 이수민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저 사람은 누구야?>

<너는 몰라도 되는 사람.>

<혹시······.>

<몰라도 되는 사람이라니까. 알려고도 하지 마라.>

지켜보고만 있던 대머리가 나섰다.

“정리를 해 보지. 우리는 너희에게 성화를 넘겨준다. 그 조건으로, 우리가 먼저 너희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면 너희 둘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한다. 맞나?”

“그래. 심령금제도 걸어둘 테니까 안심해.”

“잠깐만. 둘이라고? 오라버니. 진천군은요?”

마법사 계집애가 조잘대는 게 몹시 짜증났다.

“야. 확실히 해두자.”

“뭘?”

“지금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거야. 알아듣겠냐? 일단 너네부터 죽여버리고 그 다음에 생각해도 되는데, 그러면 일이 좀 귀찮아지니까 살려두고 써먹는 거라고.”

애 엄마가 듣고 있는 앞에서 험한 말 쓰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런 건 제대로 못을 박아둬야 한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저 마법사 계집애는 잔대가리 굴리는 게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르니까.

사실 살려두는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하다.

비전문가들끼리 갖고 놀다가 성화가 펑 터지거나 사단이 나서 또 게이트 열리고 던전 나타나고 이러면 안 되니까.

물론 그런 것까지 친절하게 말해줄 필요는 없으니 생략하고 마저 으름장을 놓았다.

“천군이 얘는 지금 큰일 해야 하는데 너네를 어떻게 믿고 얘한테까지 금제를 걸어? 자꾸 수틀리게 하면 좀 귀찮아도 확실한 방법으로 갈 거야. 알았냐? 그러니까 그만 입 닥치고 안내나 해.”

“······따라와.”

사마군과 나, 애 엄마와 이수민까지 일곱 사람이 다 함께 동굴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방금까지 나눈 대화에 숨겨진 맹점에 대해서.

마법사 계집애가 아는지는 모르겠다.

머리는 잘 돌아가는 것 같으니 아마 눈치챘겠지.

그건 내 나름대로의 기준이었다.

이놈들을 정말로 죽여버릴지, 아니면 목숨만은 살려주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기준.

그러니까 심사숙고해서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

천유화 역시도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선 진천군을 데려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도 난관이 줄지어 남아 있었다.

‘우리가 무사히 살아나갈 길은 딱 하나뿐이야.’

심령금제?

그런 건 도저히 믿을 게 못 된다.

당장이야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다음엔?

시간이 흐르고, 금제를 푼 후에 자신들을 추적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방법이 없다.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 만들어가야 해. 앞으로도 우리를 지켜줄 수단을.’

당연히 그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진가놈이 될 것이다.

마침내 성화를 숨겨둔 공터로 들어섰다.

정체 모를 남녀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말을 흘렸다.

“저게······.”

“잘못 건드리면 큰일날 것처럼 보이긴 하네.”

‘뭘 보고 저러는 거지?’

천유화는 의문스럽게 생각했다.

성화를 보자마자 년놈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일변했다.

조금 전까지도 무시무시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것과도 또 달랐다.

‘전성기 때의 진천군과 대등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

신교를 다스리던 시절의 진천군은 그야말로 무공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자였다.

아니, 사실은 사람 같지도 않았다.

당시의 진천군은 말수가 극히 적었으며 모든 게 하찮다는 시선으로 주변을 관조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지금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형편없이 영락해 버린 저 팔푼이를 차마 진천군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을 만큼.

천마 진천군.

인간 됨됨이가 개차반인 것은 분명했으나, 위대한 무인이었으며 신교의 주인으로서 능히 천하를 감당해낼 자였다.

한데 그런 진천군조차도 저 두 년놈에 비하면 손색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이게 정말로 잘 될까······?’

불안감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쓰며 천유화는 마음을 다잡았다.

‘오히려 잘 됐어. 경지가 높은 만큼 성화에 대해서도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 거겠지. 그러면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것도 알 테고, 더더욱 우리한테는 손을 못 댈 거야.’

“자, 그러면 이제 시작할게.”

진천군이 천유화의 옆으로 다가섰다.

사마군의 셋과 두 년놈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천유화가 말했다.

“내 손 잡아.”

손이 맞닿았고 천유화와 진천군 두 사람이 동시에 진저리를 쳤다.

천유화가 설명했다.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르면 돼. 성화와 연결을 해제할 수 있게.”

‘물론 거짓말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천유화는 진천군과 성화의 연결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줄 계획이었다.

워낙 자질이 일천한지라 완전히 신녀로 만들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강하게.

그래봐야 제대로 활용도 못할 거고, 그렇게 되면 진천군의 역량으로는 연결을 해제하는 일은 더욱 요원해진다.

천유화의 안전은 그걸로 확보된다.

하지만 부족하다.

혼자 구차하게 목숨을 건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큰 오라버니, 미덥지 못한 진태호와 곡비령까지 모두 다 함께 살 거다.

‘진천군. 네가 인질이 돼줘야겠어.’

계승의식을 치르면서 성화를 아주 약간만 불안정하게 만든다.

진천군은 또 정신을 잃을 거고, 년놈들이 거동하지 못하는 틈에 진천군까지 데리고 다섯이서 도망친다.

사마군 전원이 살아나갈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천유화는 생각했다.

“몸에 힘빼. 시작한다.”

천유화는 맞잡은 진천군의 손을 통해 성화를 인도해 나갔다.

진천군에게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겨넣는 것이다.

새파란 불꽃이 격렬하게 타올랐다.

진천군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타악.

뒤편에서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들렸다.

두 년놈이 이상을 눈치채고 다가오는 소리였다.

‘지금!’

천유화는 정교하게 유지하고 있던 제어력을 약간만 흐트러트렸다.

불꽃이 숫제 폭발하듯이 커졌고, 빛이 번쩍였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와중에도 천유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일이 잘 풀렸다.

폭발하는 힘에 년놈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진천군과 성화의 연결이 강해졌으니 이제 남은 건 갈무리해서, 갈무리해서······.

‘어······?’

갈 곳을 잃고 일렁이던 푸른 불꽃이 쏜살같이 날았다.

공터 바깥을 향해서.

그리고.

눈부신 빛과 함께 폭풍 같은 바람이 폭발하듯 터져나갔다.

***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이수민은 눈을 떴다.

하무린······. 아니, 유수현이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다.

‘······뭐야?’

“좋아. 방금 뭔 짓거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실하네. 너희는 그냥 여기서 죽어야겠어.”

‘죽여? 누구를?’

천유화가 악을 쓴다.

“너희는 지금 우리한테 손 못 대는-”

“그거 아닌 거 너도 알지?”

“······!”

“금제 내용 알잖아. 성화 제대로 넘겨주려고 했냐? 아니잖아.”

이수민 자신을 등 뒤에 두고, 천유화를 포함한 사마군 넷이 한 데 모여서 주춤주춤 물러선다.

유수현이 말했다.

“대충 천군이 챙겨서 도망치려고 했던 거잖아. 연결 해제해 줄 생각도 없었지? 아까 보니까 오히려 반대인 것 같던데?”

“그게 아니라-”

“유언치고는 너무 구차하지 않냐? 아, 됐다. 말 섞기 싫어.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여기서 죽는 거야.”

이어지는 대화를 들으며 이수민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몸 상태를 점검해봤다.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진태호와 눈이 마주쳤다.

이수민은 망설임없이 일어섰고, 다음 순간에는 진태호를 땅에다 메다꽂고 있었다.

무공으로 신을 엿보는 경지에 이른 자가 행할 수 있는 이적.

편재의 공능이었다.

콰아앙!

짙푸른 강기를 두른 이수민의 손이 이번에는 천유화를 노렸다.

당황한 천유화는 대응하지 못했다.

카앙!

막아낸 것은 혁련휘였다. 그러나······.

“크윽!”

일순간이었을 뿐 혁련휘 역시 이겨내지 못하고 튕겨져나갔다.

그 사이에 간신히 거리를 벌린 천유화와 곡비령은 경악해서는 이수민을 쳐다봤다.

등 뒤에서 유수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천군이의 영압이······, 돌아왔어?”

“쉰소리 그만해.”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수민의 마음은 환희에 차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성화를 이어받던 도중에 무언가 문제가 생기고, 그게 호재로 작용한 것만은 분명했다.

성화의 본질이랄까, 언제나 제어하기 버거웠던 그건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안 보이고, 오히려 그 힘의 일부가 자신의 것이 된 것 같았다.

부산물에 불과한 아주 일부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막대한 힘이었다.

두 주먹만으로 온 천하가 두렵지 않았던 전성기 자신의 힘조차도 뛰어넘는 거력.

이수민이 조용히 말했다.

“나서지 마. 저 새끼들 내가 다 족칠 거야.”

이수민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손가락을 뻗어서, 사마군을 한 명씩 가리켰다.

“허위사실 유포, 명예훼손, 폭행 및 감금죄, 기타 등등.”

그리고 선언했다.

“땅바닥 기어다니게 해줄게.”

“가랏, 치코리타! 너로 정했다!”

유수현이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응원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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