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내가 그런 사람들 잘 알아요.
***
유지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설마하면서도 어렵사리 부정했던 것이 마침내 사실로 드러나고야 말았다.
‘사부님이 나를?’
여전히 놀라고 걱정스러운 안색을 한 이수민이 다시금 말한다.
“지현아. 속이 다시 안 좋아? 언니가 화장실 같이 가줄까?”
“아뇨옷!”
유지현은 있는 힘껏 외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치, 침착해. 맞아. 그,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지······, 않아!’
이수민이 유지현을 좋아한다.
그 사실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물론 많이 놀랄 일이기는 했지만 엄마가 말한대로 터놓고 이야기를 한다면 충분히 원만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터.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볼 상황이 아니다.
다른 제반사항들이 어둠 속에서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유지현 열네 살.
중학교 일학년.
전생에 천마였다.
이수민 스물여섯 살.
어엿한 사회인.
전생에는 마찬가지로 천마이면서, 유지현의 스승이었다.
유지현의 전생 기준으로 스승과 제자라면 사실상 부모자식지간이나 마찬가지다.
부모나 다름없는, 나이 차이가 띠동갑이나 나는 사부가 유지현 자신에 대한 마음을 고백한 것만 해도 큰일인 상황.
한데 이수민은 커다란 방 하나를 자체제작한 유지현 굿즈로 가득 채워놓은 사람이다.
어디다 내다 팔 목적도 아닌 오로지 개인소장용의 굿즈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지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서 활동반경까지도 몰래 알아내곤 했다.
결정적으로 자신은 지금 그 스토커의 집에서 스토커와 단둘이 있다.
상황 파악을 끝낸 유지현은 마음 깊이 자책했다.
‘내, 내가 여기를 무슨 생각으로 온 거야?’
여전히 놀라고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이수민이 다가온다.
유지현은 목소리가 떨리는 걸 애써 숨기며 물었다.
“어, 언제부터예요?”
도망갈 땐 가더라도 이것만은 물어봐야 했다.
전생에서 사부와 그렇게나 행복했는데.
그 기억만은 다른 무언가가 침범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느닷없는 질문에 이수민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언제부터라니?”
“좋아한 거요. 언제부터예요?”
잠시 골똘하게 생각하던 이수민이 조용히 답했다.
“정확하게는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올해 여름쯤인 것 같아.”
전생과는 연관이 없던 것에 안도하며 유지현이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러면 혹시 계기 같은 거는 있어요?”
“계기라······.”
시선을 먼 곳으로 하면서 말을 고른 이수민이 정말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냥, 내가 처음 생각했던 거랑은 다른 사람 같아서 관심이 갔어. 저 사람한테 저런 면도 있구나. 저 사람한테 저런 식으로 애정을 받는 건 행복하겠구나. 나도 저기에 같이 있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다 보니까 더 자주 생각하게 되고 그랬어.”
이수민의 진심을 다한 고백을 들으면서 유지현은 상상의 나래를 뻗었다.
이수민이 유지현의 집에 와서 큰절을 올린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지현이 행복하게 해주겠습니다. 저희 사이 허락해주세요!>
아빠가 노발대발하면서 말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절대로 안- 으아악!>
옆에 앉아 있던 엄마가 흙을 뿌린 것이다.
아빠가 눈을 부여잡고 구르는 동안 엄마가 말한다.
<이수민 씨.>
<네!>
<우리 지현이 잘 부탁해요.>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그렇게 본래 세 명이었던 유지현의 가족은 네 명이 돼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사부님이 원하시는 게 이거라고?’
머릿속을 스치는 충격적인 영상.
고개를 흔들어 간신히 떨쳐냈다.
이수민이 애달픈 표정으로 유지현을 바라봤다.
“미안해. 언니도 정말로 뭘 하겠다는 건 아니었어. 그냥 생각만 했던 거야. 나름대로 자제하려고 했는데 지현이 네가 눈치챌 줄은 몰랐어······.”
유지현은 속으로만 반박했다.
‘이미 이것저것 많이 했잖아요!’
게다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 하나 있었다.
‘나름대로 자제하려고 했는데’ 라니.
이게 자제한 거라고?
그러면 자제 안 한 건 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유지현은 두려운 마음에 흘끗 안쪽 방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방문이 열리고 거기 잠자고 있던 피규어들이 살아 움직이며 아장아장 걸어나올 것 같았다.
유지현을 그린 그림도 허공을 유영하듯이 팔랑거리며 다가온다.
그림 속의 유지현이 실체화해서 현실로 튀어나온다.
도리어 유지현 본인을 그림 속에 가둔다.
유지현이 있을 자리를 빼앗은 그림이 이수민과 팔짱을 낀 채로 하하호호 웃는다.
주위로는 예쁜 백합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힌 유지현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또 하나 충격적인 사실.
‘엄마가 틀렸어.’
분명히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잘 풀릴 거라고 했는데!
이건 도저히 그런 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지금껏 십수 년을 살아오면서 유지현은 엄마인 차수희가 한 말이 틀린 걸 본 적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이수민의 일그러진 사랑이 엄마의 예상조차 뛰어넘었다는 뜻이다.
공포심이 더욱 커졌고 이제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여기서 빨리 나가야 해!’
“······지현아?”
“언니! 나, 나 지금 잠깐 친구가 돌아가셔서! 빨리 가봐야 할 거 같아요!”
그리고 몸을 휙 돌려 줄행랑을 치려고 했다.
터억.
이수민의 손이 유지현의 어깨를 잡았다.
“으갸아악!”
유지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리를 벌렸다.
이수민이 당황과 슬픔이 뒤섞인 얼굴로 다가온다.
유지현이 더듬더듬 말했다.
“가, 가까이 오면 소리 지를 거예요.”
“······어?”
“언니. 아니, 사부님! 우리 배분! 배분을 생각해봐요! 이거 완전히 족보 꼬이는-”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왜······, 언니?”
열심히 설득하려던 유지현이 갑자기 놀라서 이수민을 불렀다.
이수민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물기가 반짝이는 것도 언뜻 보였다.
이수민이 울먹이며 말했다.
“나도 알아.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언니도 알아. 그래서 참으려고 했어! 그래. 애초에 안 될 거였으니까 괜히 바라지 말자. 적어도 겉으로 드러내지는 말자. 나한테는 우리 제자. 지현이만 있으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어······.”
‘어?’
이쯤 되니 유지현도 깨달았다.
잘 맞물리는 것 같던 두 사람의 대화가 실은 완전히 어긋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을.
“······언니?”
그리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지금 당장 오해를 풀고 이 이야기를 여기서 중단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좀 전의 것에 비해 결코 못하지 않은 충격이 다가올 것이라고.
하지만 유지현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이수민이 입을 뗐다.
지금껏 마음고생했던 것을 모두 담아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눈물을 흩뿌리며 외쳤다.
“근데! 지현이가 언니 피했잖아! 그래, 맞아! 내가 좋아했어! 내가 유수현 씨 좋아할 수도 있잖아! 그러면 안 돼? 그래도 안 되는 거 아니까, 티 안 내려고 했단 말야! 언니는! 지현이 너만 있어주면 되는 거였는데······.”
슬픔을 가누지 못한 스물여섯 살 성인 여성 이수민이 무너져내렸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대고 끅끅거렸다.
열네 살 짜리 제자 앞에서.
그리고 유지현은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오늘 그녀는 귀중한 것을 두 가지나 알게 되었다.
전생과 현생을 합쳐서도 알지 못했던 것들.
그중 첫번째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구나······.’
바로 불신이라는 감정.
그리고 두 번째 깨달음.
오늘따라 한없이 가냘파 보이는 사부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며 유지현은 생각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저 방 봤다고 말하면 그걸로 사부님은 끝장이야······.’
세상에는 선의에서 우러나온 거짓말이라는 것도 존재했다.
‘절대로 말 안 해야지······.’
철부지 열네 살 아이는 그렇게 조금 어른이 되었다.
***
“거꾸로 보니까 세상이 어때 보여요?”
기품 있는 음성이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천유화는 눈을 깜빡였다.
말그대로였다.
세상이 정반대로 뒤집혀 있었다.
여자가 천천히 다가오면서 말한다.
“뭔가 좀 다르게 보이지 않아요?”
천유화는 대꾸하지 않고 거꾸로 매달린 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이래저래 사람들을 많이 봤거든요. 근데 대체로 다들 자기가 아는 것만 알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물구나무 서 있으면 시야가 탁 트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표정 보니까 아닌 것 같네.”
“닥쳐!”
천유화가 외치면서 있는 힘을 다해 마나를 움직였다.
굴욕적인 상황을 감수하며 몇 초간 모았던 마나가 폭발했고, 겨우 결박을 풀어냈다.
다시 똑바로 선 천유화가 여자와 거리를 벌렸다.
“개소리하지 말고 덤벼.”
“가급적이면 대화로 풀었으면 좋겠는데. 별로 안 내켜요?”
천유화는 답하는 대신 양손을 모아서 뻗었다.
그녀의 손 주변으로 지름이 일 미터도 넘는 거대한 불덩이가 생겨났다.
일견하기에는 일반적인 파이어볼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폭발하면서 공격대상을 감싸고 흔적도 없이 불태우는 고위 공격마법.
천유화는 마법을 발출했다.
여자가 손을 내저었다.
단순한 그 손짓만으로 날아들던 불덩이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
여자가 말했다.
“대화할 생각 정말로 없어요?”
“네년이 우는 소리 말고는 들을 생각 없어!”
“······말을 참 험하게 하신다.”
여자가 낙심한 얼굴로 살포시 땅에 내려섰다.
그리고 이어 말했다.
“그러지 말고요. 나 그거 관심 있거든요. 뭐더라······? 성화라고 했나? 그게 그렇게 신기한 거라면서요?”
천유화는 생각했다.
힘으로는 자신이 열세인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상대는 성화를 차지하는 것이 목적 같으니 어쩌면 그걸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던 때였다.
갑자기 여자가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요.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아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어조였다.
저도 모르게 천유화가 되물었다.
“뭐?”
“아까 말했죠? 내가 이래저래 사람들 많이 봤다고요. 그중에서 그쪽 같은 사람들도 꽤 있었거든요. 그쪽 머리 좋죠?”
천유화가 대답하지 않음에도 여자가 흥얼거리듯이 말을 이었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머릿속에 서랍장 같은 게 있어서 다 정리가 되고, 생각하면 생각하는 그대로 다 들어맞아서 세상이 꼭 내 머리 안에 다 들어 있는 것 같죠?”
여자가 자기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 보면 막 답답하기도 하고 왜 저러나 싶고. 아마 내 말이 맞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
“내가 그런 사람들 잘 알아요.”
천유화는 체내의 마나를 운동시켰다.
주변의 마나까지 끌어당겨와서는 거대한 힘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상대에게 내쏘았다.
‘정체 모를 힘을 사역하고 있어. 잔기술은 안 통해.’
기술은 배제하고 순수하게 공격력에 치중한 마탄.
하지만 여자에게 닿기도 전에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졌다.
천유화는 다시 한 번 마탄을 발출했다.
이번에는 여자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콰앙! 콰앙!
십여 개의 마탄이 땅에 닿으며 흙먼지가 세차게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밤이라 어둑했던 시야가 완전히 흐려졌다.
마법을 이용해 흙먼지가 가라앉지 않도록 고정시킨 천유화가 경신술을 발휘해 여자가 서 있으리라 생각되는 곳으로 달렸다.
원거리에서 무력하다면 접근전에서 승부를 보면 그만이다.
천유화가 힘차게 주먹을 내뻗었다.
그러나,
파앙! 하는 예리한 파공성이 들렸을 뿐이다.
‘어디지?’
“말하다 말았는데. 내가 볼 때는 그쪽 같은 사람들 되게 답답하거든요. 자기 혼자 생각하고 자기 혼자 결론내고. 눈 감고 귀 닫고. 그래놓고 혹시라도 본인이 틀리면 힘으로 찍어누르고는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내가 틀린 게 아니다, 이러잖아요. 그런 거 여기서는 정신승리라고 하는데.”
천유화는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렸다.
이번에도 주먹에 감촉이 없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천유화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자세를 다잡았다.
‘잡히기만 하면······!’
천유화가 외쳤다.
“그렇게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너는 그럼 뭔데?”
“응. 그건 맞아요. 나도 그런 사람이긴 해.”
‘저긴가?’
확실하게 잡았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는다.
천유화는 은밀하게 보법을 밟았다.
소리가 들려온 곳까지 도달했고, 그와 동시에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를 일시에 해제시켰다.
여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잡았다!’
쾌재를 부르며 천유화가 발차기를 날렸다.
저 재수없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고 싶었다.
타아앙!
“크읏!”
믿기 힘들 정도로 능숙한 방어.
발차기를 막음과 동시에 팔꿈치로 발등을 깨부수듯이 노렸다.
생각도 못한 고통에 뒤로 물러서다가 천유화는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중력제어? 공간절단?’
여자가 다가왔다.
“그쪽만 싸울 줄 아는 거 아닌데. 여기도 나름 격투기 같은 거 있어요.”
그렇게 말한 후 여자가 주먹을 내질렀다.
천유화는 손을 들어 방어하려고 했지만 정체 모를 힘에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정확히 급소들을 노린 무자비한 타격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콰앙!
공을 차듯이 힘차게 발이 뻗었다.
얻어맞은 천유화가 힘없이 나가떨어졌다.
허공을 날다가 철퍼덕 땅에 부닥치는 천유화를 보면서 여자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나도 그런 사람이 맞긴 한데······, 그래도 그중에서 내가 제일 낫거든요.”
아까 천유화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꼬우면 나보다 잘나시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