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68화 (68/130)

68. 서툰 사람이네.

‘사이다’를 외치는 얼굴이 해맑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길 바라면서 말을 건넸다.

“근데 당신 진짜로 같이 가려구?”

“왜? 내가 가면 방해돼?”

애 엄마가 툴툴거렸다.

“나 잘할 수 있는데.”

나랑 같이 교복 입고 학교 다니던 시절에 자주 쓰던 말투.

내가 답했다.

“으응. 방해돼서 그런 건 아니구.”

“그러면······, 혹시 걱정돼서?”

“응.”

고개를 끄덕이자 애 엄마가 얼굴을 밝게 했다.

캄캄한 밤인데도 빛이 나는 것처럼 예뻤다.

애 엄마가 손깍지는 그대로 둔 채 반대편 손까지 뻗어서 내 팔을 감쌌다.

“나도 오빠 걱정돼. 그리고, 나 지현이 엄마잖아. ······아냐?”

“맞아. 당신 지현이 엄마 맞아.”

내가 긍정하자 애 엄마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매번 그런 식으로 확인하고, 겨우 안도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 사람들 마법 쓴다고 했지? 내가 도와줄 일 있을 거야. 빨리 정리해버리구 지현이 데려와서 집에서 쉬자.”

“아, 그거 말인데······.”

갑작스러운 참전 선언만큼이나 놀란 게 그거였다.

나랑 이수민, 우철이까지 셋이서 이서준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데 애 엄마한테 메시지가 왔었다.

<지현이 이제 괜찮아. 얘기도 끝났구. 오빠 오래 걸려?>

내가 간략하게 상황을 요약해서 메시지를 보냈고 다시 답장이 왔다.

<오빠, 이수민 씨 빼고 내가 갈 수 있어? 이수민 씨한테는 비밀로 하구.>

그리고 제안이 하나 더 있었다.

<이수민 씨는 지현이랑 얘기 좀 할 수 있게 해주자.>

올라가서 확인해 보니까 지현이도 아까보다는 많이 진정이 된 얼굴이었다.

그래서 애 엄마 말대로 적당히 핑계대서 이수민이는 뒤로 빼놓긴 했지만······.

아까 참사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걱정이 된다.

우리 딸이 참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진짜 괜찮을까? 애가 딸꾹질하고 기겁을 하던데.”

“응. 아마 별일 없을 거야.”

애 엄마가 선선히 답했다. 애 엄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아직 하나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근데 당신은 이수민 걔 별로 안 좋아하지 않았어? 내가 보기엔 그랬던 것 같은데.”

“오늘 원래 계획했던 것도 그렇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잘해주냐는 말이지?”

“응.”

“그냥, 잘해주고 싶어서. 귀엽잖아.”

이건 또 무슨 말이래. 걔가 귀엽다고?

애 엄마가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웃는다.

“왜? 되게 귀여운데.”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끼셨는지 한 번 들어나 봅시다.”

“글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면서 애 엄마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았다.

“열심히 하는데 잘 안 되는 거랑 근데도 계속 해 보려고 하는 거? 그 사람 가만 보면 하는 행동도 귀여워. 어깨 축 늘어뜨릴 때 머리카락 막 찰랑거린다? 아, 맞다. 레벨 1이라서 전투력 엄청 낮은 것도 가산점 많이 들어갔어.”

마지막으로 말한 전투력이나 레벨 1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으니 차치하고서라도,

나머지 것들은 귀여움을 느낄 포인트가 아닌 것 같은데.

차라리 동정심이 들면 들었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애 엄마가 피식 웃었다.

“그래? 난 그 사람 보면 꼭 우리 지현이 키 큰 버전 보는 기분인데.”

“저기, 우리 지현이랑 비교는 좀······.”

“뭐, 오빠는 잘 몰라도 돼. 그리고.”

잠깐 말을 멈췄다가 애 엄마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지현이 많이 위해주는 거 확실하니까. 문제가 있어도 터놓고 대화하면 잘 풀릴 거야.”

“그건 그렇긴 하다.”

“우리 딸 아끼는 사람 많으면 좋잖아?”

“응.”

“그러니까 둘이 사이 돈독해지게 놔두고 우리는 우리 할 일 열심히 하고 오자.”

“장관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걸로 이야기가 정리가 됐는데······.

몇 미터 앞서 걸어가는 우철이 저놈.

아닌 척하면서 왜 자꾸 이쪽을 흘깃거리냐.

“뭐야. 뭘 봐.”

“아뇨. 아닙니다.”

쟤는 애 엄마를 평범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으니까.

아까 많이 놀라긴 하더라만.

근데 몇 번씩 이쪽을 보는 게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어째 느낌이 안 좋아서 내가 전음이든 뭐든 적당히 언질을 주려고 하던 그때.

애 엄마가 선수를 쳤다.

“정우철 씨.”

“네! 사모님!”

어······?

애 엄마는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단지 방금 전처럼 다정한 미소가 아니었다.

“뭐가 되게 신기하신가 봐요?”

“네? 어, 그게, 그게 아닙니다. 사모님. 저는 그냥······.”

“혹시 이런 생각 하고 있어요? 저분도 환생한 사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요.”

우철아. 내가 아끼는 제자야.

이 사부는 너를 믿는다.

대답 똑바로 해. 제발······.

그렇게 간절히 빌었건만 우철이 이 멍청한 놈이 아무런 말 못했다.

입을 꾹 다물고 걷기만 한다.

정우철! 야이 시발놈아! 왜 대답을 안 하냐고. 왜!

“와아. 그거 되게 이상하네요. 왜냐하면 나는 환생 같은 거 안 했거든요. 근데도 정우철 씨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잠깐만. 당신 지금 뭔가 오해가-”

“혹시 누구 짚이는 사람이 있는 건가?”

이거 뭐냐.

갑자기 왜 이렇게 되는데.

사마군 놈들 작살내기도 전에 당장 내게 닥친 위기가 너무 컸다.

“뭐, 더 물어보면 미안하니까 여기까지만 할게요. 지금 일도 급하고, 괜히 애먼 사람 추궁할 필요 없잖아요?”

아아.

그렇게 되면······.

애 엄마가 생기 발랄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나중에 당사자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

침묵한 채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저 똑바로 앞으로만 걷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대응이란 고작 그런 것밖에는 없었다.

***

같은 시각.

유지현 역시도 입을 꾹 다문 채 걷고 있었다.

일 미터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 누군가 종종걸음으로 따라붙었다.

방향만 살짝 틀어도 화들짝 놀라 움찔거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솔직히 유지현 입장에서는 굉장히 난처했다.

‘어색해······.’

유지현 자신에게 말도 못 붙이고 그저 따라오기만 하는 이수민.

사부와 이런 식의 갑을관계가 형성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천성적으로 남한테 모진 소리를 잘 못하고, 해본 적도 없는데 심지어 상대가 존경‘했었’던 사부다.

이 상황이 거북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엄마가 말했잖아. 진심을 담아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구.’

레스토랑 화장실에서 엄마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

“갸아아악! 구와아악!”

비싸보이는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고 마찬가지로 비싼 식사들을 유지현은 거침없이 물 속으로 흘려보냈다.

토닥토닥.

엄마가 차분하게 등을 두들겨주다가 물었다.

“딸, 괜찮아? 좀 더 할래?”

“아, 아니. 이제 괜찮······. 으, 끄으윽.”

“안 되겠다. 한 번 더해.”

“으응.”

다시 한 번 도저히 못 들어줄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제서야 속이 좀 편해진 유지현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언제 챙겨왔는지 엄마가 일회용 칫솔과 치약 세트를 내밀었다. “자.”

“고마워······.”

화장실 거울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유지현은 칫솔질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스친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스, 스토커······.’

이수민이 했던 말.

약속이 있어서 왔다고 했다.

그걸 세상 어떤 바보가 속겠는가.

새빨간 거짓말일 게 뻔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지현 자신을 찾아서 온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 선물.’

이수민의 집 가장 안쪽 방에서 봤던 컬렉션과 똑같았다.

유지현 자신을 본뜬 피규어.

그 방에 그런 게 산더미처럼 있었다.

직접 그린 그림도 절절한 편지도.

하나라면 감동이고, 열 개라면 눈물이다.

하지만 백 개는? 이백 개는?

그건 그냥 무서운 거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부에 대한 애정과 공포가 정확히 길항상태를 이루고 있었지만 오늘로 대세가 기울었다.

‘어, 어떡하지. 화장실 나갔는데 계속 계시면······.’

화장실에서 빨리 나가고 싶지 않았던 유지현은 생각했다.

모름지기 양치란 오 분 동안 꼼꼼히 해야 하는 법이라고.

힘없는 칫솔질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결국 오 분을 넘겼고,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던 엄마가 유지현을 불렀다.

“딸?”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는 뜻.

유지현은 겨우 입을 헹구고 엄마와 눈을 마주쳤다.

엄마가 차분하게 말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니?”

‘엄마한테 말해볼까······?’

엄마는 화났을 때는 세상에서 제일 무섭지만 평소에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예쁘다.

무언가 해결책을 제시해주리라.

그런 기대감과 함께 유지현이 입을 열었다.

“그게 있잖아.”

전생의 일을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사실대로 다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최선을 다해서 전했다.

이수민이 유지현 자신을 너무 좋아해서 무섭다는 것.

그 감정에 대해서만은 정확하게 이야기했다.

게다가 있는 그대로 말하면 엄마가 화를 많이 낼 것 같았다.

해결을 바란 것이긴 하지만 이수민을 너무 몰아붙인다고 상상하니 그것도 싫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다 들은 엄마는 놀라지도, 당장 이수민을 신고해야겠다고 휴대전화를 들지도 않았다.

“딸.”

“응, 엄마.”

그저 조곤조곤 말했다.

“수민 언니가 많이 서툰 사람이다. 그치?” 서툰 사람.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유지현이 되묻자 엄마가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런 사람이 있어. 자기가 좋아하고 아껴주고 싶은 걸 표현하려다가 실수하는 사람.”

“실수?”

“엄마가 보기에는 수민 언니가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그냥 우리 지현이 엄청 좋아하는데 표현을 잘 못했나봐.”

엄마가 제시한 발상의 전환에 유지현의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온전한 진실을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유지현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그러면 있잖아. 만약에 엄마가, 으음, 그런 일 저얼대로 없겠지만, 진짜 만약에, 갑자기 나랑 이제 못 만나게 됐다고 치면.”

“······응. 만약에.”

“그러면 엄마는 막 내가 그리워서, 나 조각한 거 만들구. 나한테 편지 써서 모아두고, 그림도 그리고. 엄마는 그럴 거야?”

“아니? 엄마는 안 그럴 건데?”

‘거봐. 스토커만 그러는 거 맞잖아······.’

유지현의 마음이 다시 꺾이려고 했다.

이어진 말을 듣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랬을지도 몰랐다.

“엄마는 조각만 하는 게 아니라 지현이 동상도 세울 건데?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볼 수 있게 이만큼, 어엄청 크게.”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슬프게 들린다, 라고.

유지현은 영문도 모른 채 생각했다.

“그러니까 수민 언니랑 한 번 이야기를 해보면 좋을 것 같아. 수민 언니는 많이 서툰 사람인데, 우리 딸은 이제 중학생이고 다 컸으니까.”

“진짜로 이야기하면 풀 수 있어?”

“우리 딸이 솔직하게 말하면 수민 언니도 고쳐야 할 건 고칠 수 있을걸? 그러고 나면 걱정할 거 하나도 없지.”

엄마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왜냐하면 수민 언니가 우리 딸 아무리 좋아해도, 엄마가 지현이 좋아하는 만큼은 절대로 안 될 거니까.”

***

‘엄마 말이 맞아. 사부님은 서툰 사람이구 나는 다 큰 어른이나 마찬가지야.’

마침내 결심이 섰다.

유지현은 몸을 돌렸다.

이수민이 흠칫하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지현아. 갑자기 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부님이 먼저 털어놓실 수 있게 기회를 줘야 해.’

지금이야말로 제자로서 사부에 대한 이해심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이런저런 단어와 문장들이 떠올랐고, 유지현은 그중 하나를 골랐다.

“언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숨기는 거······?”

그리고.

그런 이해심과 포용력을 통해서 입 밖에 나온 말이란 게······.

“저한테 잘못하신 거 있으시면 지금 말해주세요.”

‘네 잘못을 네 스스로 제시하라.’ 라는 절대적인 갑의 대사.

말과 생각은 가끔씩 따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겨울로 넘어가는 추운 날씨임에도 이수민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궁지에 몰린 이수민은 우선 시간을 벌기로 결심했다. “지현아. 여기는 너무 추운데 언니 집 가서 이야기하면 안 될까?”

“좋아요.”

사부와 제자가 함께 걸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다행이야. 사부님이 솔직히 말씀하시려나봐.’

‘집 가는 동안 뭐라도 생각해내야 해······.’

***

밤낚시 하는 사람들이나 가끔 올 법한 인적이 드문 호숫가가 저 멀리 보였다.

“이 근처 맞지?”

“네. 이쪽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기감을 높여 주위를 둘러봤다.

딱히 잡히는 건 없었다.

애 엄마도 마찬가지로 말했다.

“응. 나도. 우리 본 것 같지는 않네.”

“이제 전화 한 통 해봐라.”

“네.”

우철이가 이서준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그래. 서준아. 나 다 왔는데 어디로 가면 되냐?”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우철이가 혼자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미리 정한대로였다.

몇 분 후 곧게 뻗은 나무들에 가려져 우철이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됐다.

다시 조금 더 시간이 지났다.

콰앙!

쾅!

멀찍이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도 가자.”

“응.”

애 엄마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호숫가로 향했다.

걸으면서 애 엄마가 물었다.

“근데 오빠. 어떻게 할 거야?”

“응?”

“저 사람들 선을 넘은 거지?”

선을 넘었다는 말.

바꿔 말하면 대화로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 많이 넘었지.”

“그러면?”

“응. 아마 쟤들은······, 저대로 살려두기는 힘들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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