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67화 (67/130)

67.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

이수민을 자주 갈구고 괴롭히다가 하나 깨달은 게 있다.

이놈 현재 기분이나 상태를 뒤로 높게 묶은 머리칼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

의기소침해지고 풀이 죽으면 머리칼도 같이 축 처진다.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다.

얼굴 각도가 미묘하게 내려가면서 머리카락도 함께 내려가는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서 보면, 지금 이수민 상태는 가히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까까지 보기 좋게 잘 묶어놓았던 머리카락이 지금은 꼭 씻어놓은지 이틀은 지난 상추처럼 흐느적거린다.

불쌍하기도 하고 그다지 오래 보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렇게 알고, 당분간은 지현이랑 연락하지 말고 자중하고 있어.”

“당분간이면 하루 말하는 거지? 이틀은 너무 긴데······.”

당분간이 하루?

이틀은 너무 길어?

이거 완전히 미쳤구만.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오늘 다시 한 번 절절하게 느꼈다.

“하루로 되겠냐. 한 일주일은 기다려야지.”

“그렇게나······?”

볼일 급한 강아지처럼 불쌍한 척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거야. 우리 일 다 끝내고, 지현이 상태까지 보고 그 후에 구상을 해 보자. 알아들었냐?”

“으으. 대협,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이수민이 내 팔을 부여잡고 흐느적거렸다.

우리가 한 배를 탄 건 맞지만 수평적인 동료 관계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어디까지나 선장은 나였고 결정권도 나한테 있었다.

“천군아. 이제 내가 좀 편하냐? 그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지현이 보호자로서도, 우리 계획의 리더로서도 허락 못해. 다 정리되고 나면 다시 자리 한 번 마련해줄게. 지현이 오기 전에 오늘은 좀 돌아-”

우웅.

아까 식사했던 테이블에 올려뒀던 내 휴대전화가 울렸다.

우철이한테 온 전화였다.

얘가 이 시간에 연락을 왜 했지?

“잠깐만. 우철이한테 전화 왔다.”

전화를 받고 물었다.

“그래, 무슨 일 있냐?”

<사부님. 지금 계신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여기? 레스토랑?”

<네.>

“여길 왜 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오늘이 우리 딸 생일인 건 우철이도 알고 있는데.

한데도 와야 한다면, 상당히 귀찮은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우철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 들어보니까 납득이 된다. 이건 와야겠네.

“알겠다. 근처 오면 다시 전화하고 일단 끊자.”

전화를 끝내고 이수민에게 말했다.

“너랑 지현이 화해하는 계획.”

“응?”

“좀 당겨질 수도 있을 것 같네.”

“정말이야?”

반색하면서도 이수민이 물었다.

“근데 방금 전화는 왜 온 건데?”

“나 말고 우철이 오면 설명 들어. 그러니까 일단 가지 말고 있어봐라.”

지현이 데리고 화장실 가 있는 애 엄마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잠깐만 내려갔다 올 건데 지현이랑 얘기 좀 하고 있어줄래?>

<응. 안 그래도 그러려구.>

“따라와.”

일층으로 내려가서 십 분쯤 기다렸다.

저 멀리서 인파를 헤치고 우철이가 달려왔다.

인사할 겨를도 없는지 곧장 본론부터 시작했다.

“그게 말입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랬다.

오늘은 이서준을 포함해서 환생자 몇 명이 모이기로 한 날이다.

우철이는 볼일이 좀 있어서 늦게 간다고 미리 말했고 한 시간 전까지는 이서준과 연락이 됐다.

그리고 뒤늦게 약속장소에 갔더니 화장실 간다고 나간 이서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여겼겠지만 지금 시기가 시기이니까.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우철이가 내게 연락을 한 것이다.

거기까지 듣고 내가 우철이에게 물었다.

“이서준이든 누구든 우리 일에 관한 거 말한 적은 없지?”

“없습니다. 다만 서준이도 처음에 마법 배우러 왔던 적이 있으니까 걱정이 돼서 간단하게 언질을 두긴 했습니다.”

“뭐라고 했는데?”

“만약에 무슨 일이든 생기면 무조건 제 이름 팔라고요.”

“다른 말 없이 그 이야기만 했어?”

“네.”

침착하게 대답은 했지만 우철이 속이 말이 아닐 거다.

나한테야 이서준은 전생에는 잔머리 굴리다가 나한테 몇 대 맞은 적 있던 뺀질이에다 이번 생에서는 우리 딸 마음에 상처를 준 악플러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놈 입장은 다르겠지.

전생에도 제법 친하게 지냈다고 하고 현생에는 사촌동생이니까.

우철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중얼거렸다.

“만약에 사마군 그놈들이 눈치를 챈 거라면 어떻게 하죠? 저희는 그놈들 행방도 모르잖습니까.”

“마음은 알겠는데 진정 좀 해 봐라.”

사마군 놈들이 이서준을 데려갔다고?

무슨 수로 정확하게 골라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말고는 이 사태가 설명이 안 되긴 한다.

그러면 일단 그게 맞는다고 가정하고.

현재 상황과 기존에 알고 있던 변수들을 조합해 봤다.

그리고 나온 결론이······. “어?”

“사부님, 왜 그러십니까.”

“잠깐만. 잠깐 기다려봐.”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데?

행복회로를 돌린 게 맞긴 한데, 의외로 희망적인 관측이 나왔다.

우철이에게 확인차 물었다.

“우철아. 거 이서준이 있잖냐. 옛날부터 잔머리 잘 돌아갔지? 전생도 포함해서.”

갑자기 왜 그런 걸 묻는지 궁금한 눈치였지만 우철이가 성실하게 대답했다.

“네. 심성이 나쁜 애는 아니었는데 그거랑 별개로 그런 방면에는 일가견이 있었죠.”

“그치? 나도 그렇게 기억하거든.”

내가 본 그 세대 애들 중에서는 제일이라고 할 만했다.

총군사 제갈경의 절반 수준쯤 됐던 것 같은데 그 정도 되면 어딜 가도 밥 굶고 다닐 일은 없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우철이 안심도 시킬 겸 내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걔 살아 있을 거야.”

“정말입니까?”

“그래.”

그리고 만약에 일이 잘 풀린다면······.

사마군 놈들 홀라당 벗겨먹고 오늘 다 끝낼 수도 있겠다.

“일단은 기다려보자.”

우철이와,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이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기도가 닿지는 않겠지만 잠시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바랐다.

이서준이가 정파 무림맹주라는 자리에 걸맞는 기지를 보여줄 수 있기를.

물론 위기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해볼 만했다.

그놈은 이미 충분한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

이서준은 눈을 떴다.

온몸이 꽁꽁 묶여 있었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릴 적에 열이 40도 가까이 올랐던 때보다도 몸 상태가 안 좋았다.

‘내공이 안 느껴져······.’

어쩌면 일시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할 건 아니다.

화장실에서 습격을 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으니까. 게다가······.

‘환생을 아는 놈이었어.’

“정신이 드나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

이서준이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협회에 마법을 가르치러 왔던 여자. 처음부터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긴 했지만 왜 저 여자가?

차분하게 말을 건네면서도 풀어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여자가 다짜고짜 말했다.

“환생, 정파. 맞죠?”

이서준은 답했다.

“아냐.”

퍼억!

매서운 손길에 고개가 휙 돌아갔다.

조금 전의 나긋나긋한 음성은 어디로 갔는지 여자가 으름장을 놓았다.

“아는 걸 솔직하게 말하면 적어도 편히 죽게는 해줄게. 전부 다 말해.”

여자는 대답을 요구하면서도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제일 처음 서두로 꺼낸 환생과 정파라는 두 단어뿐.

그리고, 그 정도 단서면 상황을 추측해내는 데 충분했다.

‘전생을 알아. 정파냐고 물으면서 나를 때렸어. 그럼 마교?’

정파든 마교든 관계없이 환생과 같은 특별한 경험을 한 이들은 성화나 천마 설운혜와 관련된 자들뿐이었다. 결론이 간단하게 도출된다.

‘지현이 호위대. 그놈들이었구나!’

이서준이 생각을 이어나갔다.

‘단어선택을 두루뭉술하게 했어. 단순히 복수하는 게 목적이 아니야. 알아낼 게 있는 거지. 하지만 캐낼 게 뭐가 있지? 아······!’

이서준은 얼마 전의 일을 기억해냈다.

사촌 형 정우철이 말했다.

행여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자기 이름을 팔라고.

‘우철이 형은 이놈들을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서······.’

하지만 당장 정우철 이야기를 하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가진 수단을 다 소진하고, 이쪽에서 역으로 캐낼 수 있는 건 캐낸다.

그 이후라도 늦지 않다.

마음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고 답했다.

“난 아무것도 말 못해.”

“말하기 싫다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이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여자가 침음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이서준이 판단했다.

‘내가 함부로 말을 못 꺼낸다는 선택지가 이미 이 여자 머릿속에 있었어.’

그렇다면 역시 노리는 건 이서준 자신이 아니었다.

‘내 뒤에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이 있다고 의심하는 거야. 아마 우철이 형이랑 관련된······.’

여자가 물었다.

“혹시 심령금제가 걸려 있나?”

‘······어쩔 수 없네.’ 이서준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이 엄습해 왔다.

이서준은 참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아픈 척 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여자가 중얼거렸다.

이서준은 이를 악물었다. 아직도 고통이 가시지 않았지만 방금은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맨 처음 스미스 교관과 대면했던 날 그가 걸었던 심령금제.

스미스 본인과 그날 겪었던 일, 유지현에 관한 정보.

그리고 전생에 관련한 것까지 타인에게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게 한 금제.

그게 지금 이서준이 가진 무기였다.

여자가 물었다.

“너한테 금제를 건 자가 누구지?”

“말 못해.”

“너는 환생자인가?”

“아냐.”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뜻대로 되지 않아 불쾌한 듯한 기색.

마법을 이용해서 취조를 한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한테 걸린 금제가 더 강해.’

그리고 또 하나의 단서를 얻었다.

심령금제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꺼냈다는 것.

그건 정우철 정도의 실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 여자의 목적은 우철이 형도 아냐. 그보다도 강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있어.’

그런 사람이라면 이서준이 아는 범위 내에서는 단 한 명밖에 없다.

여자가 말했다.

“스미스라는 사람 알지?”

이서준의 예상 그대로였다.

‘그렇게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는데······.’

단순히 스미스를 아냐는 질문이라면 심령금제의 영역 밖이다.

얼마든지 대답 가능했다.

“알아.”

“금제를 건 게 그자가 맞나?”

“······.”

이서준은 어떤 생각도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미묘하게나마 심령금제가 작용할 수밖에 없다.

얼추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밀려 왔다.

이서준이 의도한 그대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여자가 말했다.

“좋아. 그거면 돼.”

그리고 여자는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이서준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스미스가 명령을 내린 것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명령이었는지.

스미스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지. 그를 불러낼 방법이 있는지.

이서준이 답했다.

“맞아.”

“말, 으윽. 말 못해.

“아는 거 없어. 명령하는 대로 따랐을 뿐이야.”

“몰라.”

“······그래?”

팔짱을 끼고 듣던 여자가 검지손가락으로 반대쪽 팔을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네가 지금 연락할 수 있는 상위자가 누구지?”

이제는 말해야 할 순간이었다.

“우철이 형. 내 사촌형······.”

“정우철?”

“그래.”

“정우철한테 내가 말하는 그대로 연락해.”

그리고 여자가 몇 마디 문장을 일렀다.

의심을 사지 않고 정우철 혼자만 불러낼 수 있는 메시지.

“전화라도 걸려오면 받아야 하니까 그때까지는 살려줄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메시지를 보내면서 이서준은 생각했다.

정우철이 혼자 올 리가 없다고.

옆에 무자비한 사람을 하나 달고 올 거라고.

‘미친년. 어디 한 번 죽어봐라.’

***

“거봐라. 연락 왔잖냐.”

우철이가 분노를 억지로 삼키며 답했다.

“네.”

“그러면 가자.”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총 인원 세 명.

우철이와 나, 그리고 세 번째로······.

내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근데 오빠.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참교육······이었나? 으음.”

“······사이다 말하는 거야?”

“맞아. 사이다! 그거 말하는 거였어!”

마지막 한 사람.

애 엄마가 즐겁게 외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