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너 솔직히 말해.
천유화는 설운혜와의 대화에서 얻은 단서들을 빠짐없이 일렀다.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듣고 있던 혁련휘가 짧게 답했다.
“유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사실이라고 봐도 되겠지.”
수장은 자신이었지만 혁련휘는 천유화의 추론과 판단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진태호와 곡비령은 아직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진천군이 정파랑 손을 잡았다고?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그래, 나도 그건 좀······.”
“뭐예요. 내가 할 짓 없이 그놈 험담이나 하자고 이야기 꺼낸 줄 알아요?”
천유화가 눈에 쌍심지를 키고 말했다. 하수인에 불과한 진태호와 곡비령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쉰 천유화가 질책했다.
“휴우. 그냥 외우세요. 우선 첫 번째. 진천군은 성화가 폭발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정파 놈들과 협력하고 있다. 두 번째. 스미스라는 헌터와 우리가 싸웠던 남자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세 번째는 그놈이 정파 무리의 수장일 거라는 거고요. 그리고 네 번째.”
“네 번째?”
“그놈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마 성화를 차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
천유화의 목소리가 다시 침착해졌다.
안정을 되찾았다기보다는 너무 화가 치밀어올라서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은 것이다.
“스미스라는 작자는 틀림없이 성화의 정체를 알았을 거야. 운혜와 연결되어 있던 걸 끊어낸 건 아마 자기가 가지려고 했거나 또다른 의도가 있었겠죠. 우리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을 테지만요.”
“그러면 진천군은 왜 그러고 있는 건데?”
“뭐가요.”
“그놈 성격이 개차반이었던 건 사실이야. 그래도 운혜는 끔찍이 아꼈잖아? 애정이랍시고 하는 짓거리가 치가 떨리긴 해도, 자기 나름대로는 운혜한테 해가 될 일을 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진태호가 합당한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천유화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해서 가볍게 답했다.
“진천군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실컷 얻어맞고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걸지도 모르고, 그 와중에 운혜는 지켜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걸 수도 있고요. 근데, 그래서요?”
“응?”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요.”
“······.”
“중요한 건 따로 있죠. 운혜를 핍박했던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정파 개자식들이랑 짝짜꿍하고 있다는 거요. 솔직히 털어놓고 싶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는 거 잊지 마세요.”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있긴 했지만 이제는 곡비령과 진태호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정파와 손을 잡고 설운혜를 속였다.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이다.
거기에 피치 못할 사정 따위가 개입될 여지는 없었다.
“간단해요. 진천군도, 정파 놈들도 모조리 처리하면 끝나는 일이에요. 뭐가 어쨌니 저건 그랬니 같은 생각할 필요 없어요. 자칫하면 우리가 당하는 마당에 어떻게 사정을 봐줘요.”
“알겠다······.”
“다행히 우리가 정보에서 우위에 있어요. 그놈들 목적이 정말로 성화라면 그것도 활용할 방법이 있을 거고요. 큰 오라버니?”
말을 마치면서 천유화가 혁련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혁련휘가 입을 뗐다.
“유화 말대로다. 지금부터 진천군은 전대 교주가 아니다. 더러운 배신자. 혹은 정파의 부역자에 불과하다. 사정이 여의치 않게 되면 척살해도 좋다.”
천유화가 부연했다.
“그리고 중요한 게 있어요.”
가장 중요한 원칙이었다.
결코 설운혜가 이 상황에 휘말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헤어짐을 아쉬워했던 설운혜에게 연락처조차 알려주지 않았던 이유였다.
“그 애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요?”
조용히 듣고 있던 곡비령이 마지막 저항을 했다.
“있잖아. 혹시 진천군도 그런 생각에서-”
“아뇨, 언니.”
천유화가 한 손을 살짝 들어 이야기를 중단시켰다.
“우리는 진천군과는 달라. 운혜 목숨을 노렸던 정파 놈들과 타협하지는 않아요. 그래. 만약에 정말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고 해도 가장 먼저 운혜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야죠.”
“······.”
“그놈들 수장을 상대하려면 준비가 많이 필요해요. 진천군도 쉽게 행방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고요. 하지만 송사리 몇 마리 쫓는 것 정도는 지금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복수의 첫걸음이었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태산처럼 커져서 타오르던 불길.
성화를 제어하느라 안간힘을 쓰던 설운혜.
그런 그녀를 노리고 날아온 칼 한 자루.
안도해 이마의 땀을 닦아내던 설운혜의 표정으로 경악이 스쳤다.
입가로 피를 흘렸고, 천유화가 애타게 손을 뻗는 순간 빛이 폭발했다.
원통스러웠던 그때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환생? 개소리하지 말라고 해.’
이 시대에 옹기종기 모인 개자식들이 그 일을 쉬쉬하거나 혹은 까맣게 잊어버렸다면 다시금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 마땅했다.
“백 번 양보해서 진천군에게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네.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정파 놈들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주군을 해하려 한 자들을 단죄하는 것.
그것이 교주 직속호위 사마군으로서의 책무이며,
설운혜를 맞이하기 전에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일이었다.
천유화는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그때 진태호가 손을 들었다.
“왜요? 또 궁금한 거 있어요?”
그렇게 묻자 진태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어. 별건 아닌데.”
“빨리 말해봐요. 뭔데요.”
“운혜가 썼다는 소설 있잖아.”
“네. 그게 왜요?”
“그거 나도 읽어보고 싶은데. 번역마법으로 어떻게 안 될까?”
천유화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버럭 화를 냈다.
“이 화상아! 지금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오-”
“유화야. 나도 부탁 좀 할게······.”
“나도 아직 이곳 말을 잘 모른다.”
곡비령은 둘째치고 혁련휘마저 묘하게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유화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숨을 뱉었다.
“이 식충이들······.”
***
아쉬움과 홀가분한 마음이 동시에 든다.
오늘. 그러니까 지현이 생일을 마지막으로 11월에 잡혀 있던 우리 집 큰 행사가 모두 끝난다.
그 다음이래봐야 크리스마스니까 한 달도 넘게 남았지.
해서 외식 장소를 어디로 할지 고민하다가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으로 왔다.
며칠 전 애 엄마 생일 때 갔던 곳도 가격대가 꽤 있는 편이었지만 그거보다 두 배쯤 비싼 곳으로.
애 엄마는 내 바로 옆자리에 차분하게 앉아 있고, 반대편 자리에는 지현이가 앉았다.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쥔 지현이가 괜히 속에도 없는 말을 했다.
“근데 아빠. 우리 이런 데 와도 돼?”
“응?”
“그게, 아빠 월급으로는 쪼오금······.”
순간적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지현이 코를 움켜쥐었다.
잠깐 숨을 참다가 지현이가 입을 헤 벌렸다.
“으이구. 딸은 그런 거 신경 안 써도 돼. 알겠지?”
“진짜?”
“응.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알겠어!”
지현이 목소리 텐션이 순식간에 높아진다.
역시나 그냥 해 본 소리였군.
정말로 걱정할 필요 없었다.
내 월급으로 간당간당한 건 사실이지만 오늘은 물주가 따로 있어서 말이지.
길게 이어지는 코스 요리를 모두 먹고 지현이가 만족한 듯이 말했다.
“끄으윽. 내가 여기를 너무 얕봤나봐. 참새 눈물만큼 쬐끔씩 나오길래 방심했는데 지금 배 터질 것 같아.”
그러면서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배를 두드렸다.
애 엄마가 나를 보며 웃었다.
나도 마주 웃어줬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예리하게 타이밍을 쟀다.
지현이의 경계심은 포만감과 정확히 반비례한다.
지금이다, 치코리타!
“어머.”
놀란 듯한 목소리.
약속된 타이밍이었다.
지현이가 고개를 돌린다.
맵시 있게 차려입은 올블랙 패션.
길다란 머리카락은 뒤로 묶어 늘어뜨리고 만면에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전생에 천마였으나 지금은 내 충실한 수하가 된 그놈.
아군이 된 적의 모범적인 사례.
이수민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다른 누구보다 애 엄마가 먼저 답했다.
“이수민 씨 맞으시죠?”
“네!”
이수민이 90도로 꾸벅 인사를 했다.
하나로 묶은 머리칼이 휘날렸다.
애 엄마가 내게 눈짓했다.
‘이러면 돼?’
나도 마주 눈을 찡긋했다.
‘고마워.’
지현이 쪽도 슬쩍 곁눈질로 봤는데,
“······.”
아직 배에서 손도 못 떼고 있었다.
많이 놀란 건가?
생각보다 일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래도 상의한 게 있으니 일단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네요.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 약속이 좀 있어서요.”
이거 어째 처음부터 글러먹은 것 같은데.
연기 진짜 더럽게 못하네.
설상가상으로 이수민이가 어색하게 한 손을 들었다.
“지현아. 그으, 안녕?”
지현이가 움찔거렸다.
계획이고 뭐고 당장 멱살 잡고 묻고 싶어졌다.
뭐냐. 대체 뭔 짓을 했길래 우리 딸이 저렇게 무서워하는 거야.
“안녕하세요······.”
“그러고 보니까! 오늘 지현이 생일이었지? 언니가 바빠서 축하도 못해줬네. 미안해?”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제부터 축하 메시지를 보내야 할지, 보냈을 때 무시당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나한테 징징거렸잖아.
대강 답해주니까 나중에는 전화까지 걸려 오더만.
그때 애 엄마가 말한 거다.
정 화해를 하고 싶으면 우연히 만난 척 생일 축하자리에 부르는 게 어떻겠냐고.
나도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이수민한테 연락했더니 아주 좋아서 방방 뛰었다.
예약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레스토랑도 자기 선에서 바로 예약해주고 비용까지 전부 다 대준다고 했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고 실제로도 잘 먹힐 거라고 판단한 건데.
이 싸한 분위기는 뭐지?
아까까지 행복해하던 지현이 입가에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이수민이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지현이 뭐 먹었어? 와아, 맛있었겠다. 그런데 케익은? 혹시 괜찮으면 언니가 기프티콘 보내줄까?”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져 나왔지만 지현이는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았다.
몇 초간 입을 꾹 다물더니 그제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언니 약속 있다구요?”
“응? 어, 응! 약속 있어서 왔어.”
“누구랑요? 그 사람 어디 있는데요?”
“어······?”
살면서 지현이가 이런 눈빛을 하는 걸 오늘 처음 봤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굳이 따진다면 경계심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설마 이런 질문이 들어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나 보다.
이수민이 발끝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갑자기 매고 있던 백을 열어젖혔다.
“그, 조금 늦나봐. 근데 지현아.”
“······네.”
“이거 생일선물인데······.”
이수민이 호다닥 무언가를 꺼냈다.
척 봐도 아주 공을 들여서 만든 거였다.
우리 지현이를 1/10으로 축소한 것 같은 인형, 혹은 피규어.
“와아.”
애 엄마가 작게 감탄했다.
확실히 예삿솜씨가 아니긴 하네.
이수민이 피규어를 지현이한테 내밀었다.
“언니 열심히 만들었는데······, 받아주면 안 될까?”
잔뜩 긴장한 이수민이 눈을 꼭 감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피규어와 이수민을 번갈아보는 지현이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리는 걸.
“끄윽!”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딸꾹질 소리.
이수민이 놀라서 눈을 떴다.
“끅!”
지현이가 질린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딸꾹질을 했다.
이수민이 걱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지현아? 갑자기 왜-”
지현이가 몸을 뒤로 뺀다.
푹신한 의자에 가로막혀 있지만 그나마 최대한 뒤로 가려고 했다.
그러면서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애 엄마에게 보냈다.
“어, 엄마. 나, 나 속 안 좋아- 우읍······!”
애 엄마가 벌떡 일어나서 지현이를 데리고 다급히 화장실 쪽으로 향했다.
이제 테이블에는 나와 이수민 둘만 남았다.
나직이 이수민을 불렀다.
“야.”
“······.”
“야.”
“······네.”
황당함과 분노를 함께 삭이며 내가 말했다.
“너 대체 애한테 뭔 짓을 한 거야. 진짜 솔직히 말해.”
“나도 몰라. 진짜 짚이는 거 없어······.”
그건 네 사정이고요.
우리 딸 보호자로서 선언했다.
“너 당분간 우리 애한테 접근금지야. 알겠냐?”
충격과 공포로 울상인 이수민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같은 시각.
전직 무림맹주 이서준은 화장실 벽을 노크하고 있었다.
물론 머리로.
쿵, 쿠웅.
둔탁한 소리가 번화가 공용 화장실로 울렸다.
이서준은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서준아, 왜 이래. 너 약한 애 아니잖아. 정신 차려야지.’
하지만 취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내공을 운용해서 알콜을 내보냈겠지만 오늘은 그것도 못한다.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대번에 알아챌 것이다.
‘어? 우리 맹주님 설마 취해서 알콜 비웠어요?’
이런 비아냥이 쏟아질 게 틀림없었다.
이전부터 알던 지인들인 데다가 같은 전생을 공유한다는 유대로 묶여서 요즘도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 가끔 술자리를 같이 했다.
오늘따라 술이 달게 느껴져서 조금 과하게 마신 것이다.
간신히 이마를 벽에서 떼어낸 이서준이 몸을 돌렸다.
“후우.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이서준!”
그리고 화장실 문을 빠져나가려던 순간.
쿠웅.
모르는 사람과 몸이 부딪치고 말았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부딪치면 없던 예의도 차리는 것이 대한민국의 국민 룰.
이서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
상대는 대꾸하지 않았다.
기분이 나빴나? 좀 세게 부딪치긴 했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이서준이 다시 화장실을 나서려 했다.
그때였다.
대꾸하지 않던 남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혹시 전생이라는 거 믿으십니까?”
취한 와중에도 이서준이 놀라서 몸을 돌렸다.
그 표정을 본 상대가 씨익 웃었다.
“맞네.”
끼익.
화장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엄청난 충격이 이서준의 머리를 강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