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속이고 있어요.
놀라기로는 유지현도 마찬가지였다.
어제는 미리 연락해 둔 반 친구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결혼기념일이라던가 집안의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 친구 집에서 자고 오면 용돈이 두둑이 들어온다는 걸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일요일이기도 하고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심심했던 유지현은 마법사들에게 받아둔 명함으로 연락을 했다.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서 대표로 누가 만나러 올 테니 어디 카페에서 기다려 달라는 답장이 왔다.
유지현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마법에 관한 건 전생에서도 풍문으로만 들어본 적 있을 뿐이다.
서쪽으로 만리길을 넘게 걸어가면 피부색이 희고 눈동자가 파란색이며 머리칼은 금발인 사람들만 모여 사는 땅이 나오는데, 그곳에서도 특별한 몇몇 사람들이 마법이라는 힘을 사역한다는 소문.
그건 무공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술이나 법력 같은 것과도 궤를 달리하는 신비한 힘이라는 말이었다.
‘진짜일까?’
산속에서 수련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영 못 미더운 이야기도 아닌 것 같았다.
재능이 있다고는 해도 아직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들이 손에서 불을 뿜고 허공을 날아다녔으니까.
무공으로 그런 힘을 보이려면 어지간한 경지로는 어림도 없었다.
물론 전생부터 워낙 다사다난했던 탓에 유지현이 경계심을 완전히 놓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약속장소부터가 탁 트인 곳이고, 이미 경험해 본 바로는 악독한 사람들일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호기심이 드는 게 만남의 가장 큰 이유이긴 했지만.
그리고.
유지현 본인과 키 차이도 별로 안 나는 가녀린 여자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순간.
마법사가 어쩌니 기대감이 어쩌니 했던 것은 깨끗이 잊히고 말았다.
“유화 언니······?”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냐는 듯 상대가 미심쩍은 얼굴을 한다.
“언니!”
설명할 여유도 없었다. 유지현은 그대로 달려가 맞은편 여자에게 안겼다.
“뭐야. 왜 이래요. 미쳤어요?”
상대가 난처한 투로 말한다.
그러면서도 유지현을 품에서 떼어내지는 않았다.
천유화.
유화 언니는 항상 이랬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혼자 속앓이를 하고 툴툴거리면서도 사실은 잔정이 많았다.
전생에는 자신이 힘들어하면 이렇게 꼭 끌어 안아주곤 했다.
그때에 비해 유지현의 키는 한 뼘 가까이나 줄어버렸지만······.
유지현이 고개를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나. 운혜. 나 못 알아보려나······?”
“운혜? 설운혜?”
“응! 언니 유화 언니 맞잖아. 맞지? 우리 언니.”
“잠깐만 기다려봐요!”
갑자기 자신이 설운혜라며 안겨온 굉장히 귀여운 여자애를 어렵사리 떨쳐낸 천유화가 속으로 되뇌었다.
‘침착해. 진천군의 함정일지도 몰라.’
한 번 속은 것이야 그럴 수도 있다. 진천군의 인성이 되먹지 못한 탓일 뿐이다.
하지만 두 번 속는다면?
그때는 이쪽이 멍청했던 거다.
실은 방금 접근을 허용했던 것부터 이미 크나큰 실수라고 할 수 있었다.
천유화는 미심쩍은 눈초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매서운 눈빛에 맞은편의 여자애가 안절부절못했다.
“어어······? 언니 나 진짜로 운혜 맞는데······.”
“증거를 대봐요.”
“증거?”
그냥 봐도 온힘을 다해 궁리하는 게 훤히 보였다.
여자애가 생각났다는 듯이 밝게 외쳤다.
“나 운혜 맞아!”
이 시대, 이 나라의 말이 아닌 중원어였다.
하지만 천유화가 재차 추궁했다.
“그걸로 어떻게 믿어요. 다른 거 없어요?”
“그러니까 언니는 유화 언니구. 휘 오라버니랑 태호 오라버니랑 비령 언니랑······.”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한다.
하지만 믿을 수 없었다.
이미 한 번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잖은가.
“정말로 그쪽이 운혜면 천마신공 쓸 수 있어요?”
“여기서?”
확실히 벌건 대낮에 천마군림보라도 밟았다간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천유화가 말했다.
“시늉만 해봐요.”
“이렇게?”
여자애의 손으로 살짝 빛이 났다가 곧바로 꺼졌다.
‘천마신공이 맞긴 한데······.’
그래도 아직 안 된다.
구체적인 증거. 자신과 설운혜만이 공유했던 무언가가 필요했다.
천유화가 말했다.
“내가 운혜 열다섯 생일에 준 게 있어요. 몰래 준 거라서 아무도 몰라. 그게 뭔지 알아요?”
“알아!”
“뭔지 말해봐요.”
“잠깐만 기다려 봐?”
하라는 대답은 않고 여자애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순간적으로 기습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천유화는 긴장한 채 기다렸다.
그리고 여자애가 내민 건 휴대전화였다.
“이거 봐!”
화면에 보이는 문장들.
‘······어?’
소설처럼 보이는 글.
천유화와 설운혜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글 속의 천유화는 설운혜를 몰래 불러서 두툼한 옷 한 벌을 건넸다.
설운혜가 물었다.
‘이게 뭐야?’
‘포목점에서 샀습니다.’
거짓말이었다. 직접 실과 솜을 구해다 만든 옷이었다.
사부인 진천군을 따라서 설운혜는 항상 얇은 베옷만을 입었다.
그것이 못내 안쓰러웠던 천유화는 어린 주군을 위해 옷 한 벌을 지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몰래.
옷을 받아든 설운혜가 말했다.
‘샀다고? 이런 걸 누가 돈 주고 사?’
‘······!’
천유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따뜻한 솜을 정성스레 구해서 서툰 솜씨나마 열심히 지은 옷인데 마음에 차지 않았나 보다.
천유화가 힘껏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내일 당장 다른 옷으로 바꿔서-’
‘뭘 바꿔······? 대답해봐. 이런 걸 누가 돈 주고 사냐구. 바느질도 엉망이구 여기 봐. 여기만 솜 엄청 많이 들어가 있잖아. 자기가 만든 거면서, 이걸 어디서 바꿔온다는 거야······.’
떨리는 목소리.
천유화가 설운혜를 바라봤다.
앳된 얼굴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설운혜가 양쪽 팔 길이도 제대로 안 맞는 옷을 품에 끌어안았다.
‘안 돼. 돌아가. 절대 안 바꿔줘. 이거 내 옷이야. 절대 안 바꾸고 평생 가지고 있을 거야.’
거기까지 읽고 천유화는 한 손을 들어 얼굴에 댔다.
눈물을 닦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마찬가지로 눈가가 젖어 있는 여자애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애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말한 적 있나? 나 있잖아. 나중에 키 크고 나서 못 입게 됐어도 그 옷 계속 가지구 있었다?”
“······정말로, 운혜······?”
미소를 띠고 여자애가 자랑처럼 말했다.
“내가 평생 가지고 있을 거라고 했잖아.”
“운혜야!”
“언니!”
천유화는 그제서야 모든 의심을 거뒀다.
의심이 자리를 비운 곳.
미안함과 그리움, 재회의 기쁨을 담아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러니까아 자고 일어나서 양치하구 있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는 거야. 아, 맞다! 나 천마였어! 하구.”
“놀라지 않았어?”
“엄청 놀랐어. 생각하면 머리도 많이 아팠구. 근데 그때 우리 집에 일이 좀 있었거든. 그거도 되게 고민되는 거였단 말야? 그래서 이거는 어쩌지, 저거는 또 어쩌지 하다 보니까 오히려 괜찮아졌어.”
“그랬구나······.”
“그러구 김치찌개. 언니 김치찌개 알아? 그거 먹다가 되게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우리 아빠한테 말하구. 그 다음에는······.”
긴 시간 이어진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소용돌이쳤지만, 천유화에게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손을 뻗어 유지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운혜 고생 많이 했네.”
“나보다는 사부님이- 아, 근데 언니.”
“왜?”
“나는 잘 몰랐는데 있잖아. 언니오빠들이랑 사부님.”
“응.”
“······혹시 사이 안 좋았어?”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유지현이 물었다.
천유화가 살풋이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냐.”
“그러면 사부님한테도 언니오빠들 봤다구 말해도 돼? 나 지금 사부님이랑 쪼금 그렇긴 한데······.”
이번에도 천유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혜야. 언니랑 약속 하나만 해줄래?”
“뭔데?”
“잠깐이면 되니까 오늘 언니 만난 거 비밀로 하기로.”
“비밀?”
“응. 전대 교주님한테도, 아무한테도 말 안 해줄 수 있을까?”
불길한 예감에 유지현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진짜로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지? 싸우고 그러면 안 되는데.”
“교주님이 내가 알던 그분이라면 왜 싸우겠어. 우리 운혜 싫어할 텐데. 그치?”
“응!”
“언니가 꼭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래. 잠깐이면 돼.”
“진짜로 싸우는 거 아니지?”
천유화가 답했다.
“언니는 우리 운혜랑 앞으로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돼. 싸울 사람이라고는······, 우리 운혜 못 살게 구는 비열한 정파놈들 말고는 없지.”
“알겠어!”
유지현은 그제야 납득했다.
무언가 비밀스레 할 일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싸울 사람이라고는 유지현 자신을 괴롭히는 정파밖에 없다는 말.
전생부터 천유화가 자주 입에 담던 표현이다.
천유화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고 정파의 위선자들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천유화가 자리를 정리했다.
“나중에 일 다 끝내구 네 명이 다 같이 찾아갈게. 잠깐만 기다려줘?”
그 말을 남기고 천유화가 떠났다.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지현은 자책했다.
‘나 모르는 게 많았구나······.’
천유화는 부정했지만 알 것 같았다.
전생 때 생각했던 것만큼 언니오빠들과 사부님이 좋은 사이는 아니라는 걸.
유지현은 결심했다.
‘할 일 끝나면 찾아온다고 했어. 여기는 우리 괴롭히는 정파도 황실도 없으니까.’
어렵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마음을 열면 되는 일이다.
물론 정작 유지현 자신이 이수민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품었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것도 터놓고 대화를 하면 어쩌면 괜찮아지리라.
유지현이 희망에 차 생각했다.
***
수련 도중의 쉬는 시간.
하늘 보고 대자로 뻗어 있는 이수민에게 말했다.
“천군아.”
“왜 불러?”
“이왕 이렇게 된 거 네가 중간다리 놓아주면 안 되냐?”
숨을 몰아쉬던 이수민이 멍하니 되묻는다.
“무슨 다리.”
“나랑 우리 딸 말이야.”
뒤치다꺼리 해주는 만큼 나도 얻어가는 게 있어야지.
찬찬히 설명했다.
“너 우리 딸이랑 빨리 화해한 다음에 조금씩 흘려. 사실 하무린이라는 사람이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랑 백운상이가 굉장히 돈독한 관계였다.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이미지를 바꾸는 거지. 가능하겠냐?”
물론 그게 잘 돼도 내가 먼저 정체를 밝힐 이유는 없지만.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서 밑작업을 해두자는 생각이었다.
이수민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툭 던졌다.
“알겠어.”
“진짜로? 너 할 수 있냐?”
“그 대신.”
“엉? 이 배은망덕한 새끼가 어디 조건을 달려고-”
“나랑 지현이 화해하는 것부터 좀 도와주면······.”
왜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의기소침해지는 거지?
떨어진 낙엽을 허공섭물로 모아서 이수민 위에 덮어줬다.
“그래. 우리 힘을 합쳐서 일심동체로 한 번 잘해보자. 천군아. 이제는 너와 내가 완전히 한 배를 탄 사이 아니겠냐?”
옆에서 듣고 있던 우철이가 서운하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사부님. 이 하나뿐인 제자를 빼놓으시면 섭섭하-”
“너는 숨쉬기부터 제대로 좀 해라. 뭐가 좀 느껴지냐?”
“아뇨. 아직은요.”
“호흡 제대로 못하면 그거 1성도 제대로 못 깨우쳐. 빨리 네 자리로 돌아가.”
우철이가 축 처진 어깨로 멀어진다.
그때까지도 이수민이 침울해하길래 내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야, 따라해. 화이팅!”
“화이팅······.”
이수민이 한 손을 올렸다.
덮어놨던 낙엽이 처량하게 떨어지는 걸 보더니 다시 고개를 떨군다.
나약한 놈 같으니라고.
저놈이야 하도 실패만 하고 다니니 의기소침해 하고 있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우리 딸한테 들킬 일은 없다.
사마군 놈들은 조만간 때려잡을 거고.
모든 게 잘 풀릴 거다.
***
“죽여버릴 거야······!”
임시거처로 돌아온 천유화가 다짜고짜 험악한 말을 내뱉었다.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곡비령과 진태호가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혁련휘가 침착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후우······.”
천유화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도무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일 수가 없었다.
결국 설명보다 먼저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속이고 있어요.”
“뭐?”
그래.
속이고 있었던 거다.
환생을 한 설운혜.
성화의 폭발을 비롯한 그 당시의 상황.
운혜가 쓴 소설.
거기 달린 댓글의 내용.
운혜의 소설을 열렬히 좋아했다는 독자들.
말도 못하게 강했지만 자신을 희생해서 사라졌다는 스미스라는 남자.
진천군과 스미스가 무언가를 숨겼다는 것.
진천군을 도우러 온 정체불명의 헌터.
얼굴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고, 중원말을 알았다.
조각들이 맞춰지고 끔찍한 결론이 나왔다.
천유화가 주체하지 못할 증오심과 함께 내뱉었다.
“진천군 그 배신자가 정파 놈들이랑 결탁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운혜를 속이고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