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인사나 해주지 그래.
***
오늘은 주말이지만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서 부엌에 섰다.
팥이 들어간 찹쌀밥에 미역국.
한 마리에 몇만 원씩 하는 비싼 생선에 잡채.
마요네즈 들어간 전통식 사라다랑 한우불고기.
새벽에 몰래 오징어만 쏙쏙 빼먹는 재미가 있는 오징어볶음에다가 각종 야채전까지 부지런히 준비했다.
요즘 생일상 치고는 다소 클래식한 구성이지만······, 생일상 받는 사람 취향이 그런 걸 어쩌겠어.
평소 우리 집 음식은 지현이 입맞에 맞춰서 달고 간이 강한 편이지만 오늘은 최대한 정갈한 느낌으로 만들었다. 주인공이 따로 있으니까. 저기 오는구만.
“오빠······? 그게 다 뭐야?”
안방에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느껴졌나 보다.
평소보다 일찍 깬 애 엄마가 눈을 비비면서 다가온다.
내가 단호하게 답했다.
“접근금지.”
“으응?”
“다시 들어가서 도로 자고 있어.”
“뭐야, 왜? 나도 옆에서 보조-”
그건 내가 사양한다.
오늘 애 엄마가 할 일이라고는 수저 들고 밥 먹는 일밖에는 없다.
“아침 되면 깨워줄 테니까 빨리. 안 그래도 잠 얼마 못 잤잖아.”
“아이, 알았어. 알았으니까 밀지 좀 마아.”
애 엄마를 다시 안방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작업을 재개했다.
생일인 사람이 직접 음식 준비하는 건 말이 안 되지.
게다가 나도 그렇고 애 엄마도 그렇고 진짜로 몇 시간 못 잤다.
어제 하루 동안 워낙 일이 많았어서 보고하는 데 시간이 걸렸거든.
하극상을 당한 치코리타의 이야기까지 모두 들은 후에 애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그으. 내가 이런 말하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이수민 씨 있잖아······. 너무 좀 불쌍하지 않아?’
말로만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게 애 엄마 표정에서 확실히 드러나 보였다.
‘들어 보면 그 사람 요령이 없어서 그렇지 자기 딴에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괜히 마음이 짠하네.’
‘그게 다 전생의 업보야, 업보.’
‘아무튼 나 오빠 믿을게? 알아서 해결하는 대신 나한테 다 말해주기로. 약속하는 거지?’
‘응. 당연하지.’
나와 애 엄마가 내린 결론이 그랬다.
아직은 사마군이라는 놈들과 지현이가 직접적으로 엮이지는 않은 것 같고, 이수민이 열심히 어그로를 끌어주며 탱커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면 이수민을 앞세워서 사마군 놈들만 제압해버리면 깔끔하게 해결되니까.
‘지현이는 내가 신경 쓸 테니까 오빠는 이수민 씨랑 같이 밖에서 일 처리해 주면 될 것 같아. 그렇다고 너무 사적으로 친해지지는 마?’
이 부분에서는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수민이랑 내가?
하늘이 꺼졌다가 다시 솟아도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 그럼 다행이구.’
‘진짜로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 그러면 정리됐으니까 이제 자자.’
그때가 새벽 한 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그래. 그때 잤으면 이렇게 피곤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애 엄마가 의아한 투로 되물었다.
‘왜?’
‘네?’
‘내일 주말이잖아.’
‘그, 렇지?’
‘좀 더 늦게 자도 나는 괜찮을 거 같은데?’
애 엄마가 손으로 탁,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뭔가가 안방을 감쌌다.
이건······.
내 예상 그대로 애 엄마가 말했다.
‘별 거 아니구 그냥 밖으로 소리 안 새어나가게 한 거야.’
‘그, 그래? 근데 그건 왜······, 왜요?’
뭘 그런 걸 묻냐는 듯이 애 엄마가 살풋 웃었다.
‘오늘 늦게 자려구. ······싫어?’
결국 새벽 다섯 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서 바로 생일상을 준비 중인 거다.
밥 안치고 미역국이 보글보글 끓을 때쯤 되니 지현이도 깼는지 거실로 나왔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다가오는데, 우리 딸은 또 왜 눈이 퀭한 거지?
내가 말했다.
“딸, 일어났으면 세수하고. 조금 있다 밥 먹자.”
“으응. 나 도와줄 거 없어?”
어디 큰일날 소리를.
절대 안 될 일이다.
“괜찮아. 빨리 씻구 와?”
“네에.”
욕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지현이가 본격적으로 의욕을 드러냈다.
음식 간을 좀 봐야겠다느니, 불고기는 냄비에 ‘끓이기만’ 하면 되니까 자기가 하겠다느니.
단어 선택부터 절망적이라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괜찮아. 탁자에 식기만 좀 놔주면 돼.”
“진짜? 으음. 알겠어.”
식기를 놔두고 이제 물컵을 가지러 부엌으로 조르르 달려온 지현이에게 물었다.
“딸. 근데 수민 언니랑-”
터엉.
“아앗!”
둔탁한 소리에 지현이가 제풀에 놀랐다.
지현이 손에서 미끄러진 물컵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행히 깨진 건 아니라서 도로 물컵을 줍고 내가 다시 물었다.
“수민 언니한테 다시 연락 왔어? 화해했니?”
“응! 화해했어!”
지현이가 밝게 외쳤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부자연스러웠다.
식은땀은 왜 흘리는데.
“너 이 시발, 솔직히 말해. 뭐 실수한 거 있냐?”
내가 엄중히 추궁했다.
“······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이수민이 불쾌한 얼굴로 되물었다.
“실수? 무슨 실수?”
“내가 어제 들은 게 있어서 그래.”
어제, 그러니까 애 엄마 생일날 오전에는 집에 있었다.
내가 차린 생일상을 셋이서 먹었지.
저녁에는 레스토랑 가서 밥 먹고 케익 촛불 불었다.
지현이는 레스토랑 나오자마자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고 어디로 가버렸다. 애 엄마랑 나를 보면서 실실 웃던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어린 게 벌써부터 발랑 까져서는 말이야.
나랑 애 엄마는 어디 비싼 호텔에서 하룻밤 묵었다.
아직 들여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우리 집 매트리스의 건강도 우려스러웠고, 기분도 낼 겸.
그리고 점심 때쯤 체크아웃하고, 뜨끈한 국밥 한 그릇씩 먹고 집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나와서 지금 이수민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저번에 못 다한 대책회의와 작전 수립을 위해서.
내가 재차 추궁했다.
“너 지금 우리 딸이랑 연락하냐?”
“아니, 답장이 없는데······.”
“또 뭔 짓을 했길래 그러냐. 어엉?”
내가 아는 건 이수민 이놈이 제풀에 놀라서 우리 딸한테 소설 내려라고 하고, 우리 딸 기분이 팍 상해버린 것까진데.
이수민이 우물쭈물 답했다.
“소설 일은 사과했는데 답장이 아직 없어. 메시지 보내도 읽었다는 표시도 없고······.”
“어휴.”
이수민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팔을 붙잡는다.
“지현이 혹시 화 많이 났어? 밤에 연락 못해서 화난 건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네가 또 지뢰 하나 거하게 밟았겠지.”
“나는 진짜 모르겠는데······.”
이수민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기분 탓인지 뒤로 맵시 좋게 묶은 포니테일 머리도 축 처지는 것 같다.
내가 달래듯이 말했다.
“내가 나중에 다시 한 번 물어볼 테니까 그건 일단 놔두고.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누구?”
이수민이 반사적으로 물었다가 곧 짚이는 바가 있는지 재차 말한다.
“혹시?”
“아, 저기 오네.”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자. 우철이가 산 중턱을 넘어서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소리쳤다.
“이 새끼 빠져가지고. 빨리 안 와?”
슈우웅!
땅을 박찬 우철이가 바람처럼 내 앞까지 달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저 사기꾼 새끼는 왜 부른 거지?”
이수민이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사기꾼이라······.
저놈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한가.
내가 죽은 척하고 나서 우철이한테 목숨빚이니 뭐니 있는대로 폼 잡았다고 들었으니까.
우철이가 살짝 고개를 들더니 비웃었다.
“속은 게 바보 아닌가? 겨우 그런 걸로 우리 사부님이 잘못되셨을 거라고 생각한 네 아이큐 문제 같은데?”
“뭐야?”
“워, 워워.”
곧바로 멱살 잡고 싸울 것 같길래 내가 나서서 중재를 했다.
“왜 또 싸우고 그러냐. 우리 셋이 지금부터 한 팀 먹어야 하는데.”
“저 사기꾼이랑?”
“저런 허당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부님.”
“······지금부터 궁시렁거리는 놈은 몇 대 맞고 시작할 거니까 둘다 조용히 있어.”
그제서야 분위기가 좀 진지해졌다.
내가 말했다.
“여름에는 워낙 다사다난했어서 이래저래 달고 다녀야 할 인간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나랑 우철이, 이수민까지 셋. 소수정예로 간다. 우리의 목표는 단 하나. 대머리와 마법사 기집애, 그 외 멀대 둘까지 총 네 명. 그놈들 잡아다가 참교육을 시켜주는 것뿐이야.”
“옳으신 말씀입니다.”
“본론을 말해, 본론을.”
이수민이 투덜거렸다.
본론이라. 거 말 잘했다.
내가 대뜸 말했다.
“우철아.”
“네, 사부님!”
“그리고 우리 치코리타?”
“······.”
“천군아?”
“왜.”
검지손가락을 뻗어서 우철이와 이수민을 한 번씩 가리켰다.
“너네는 지금 소수 정예가 아냐. 그냥 소수지. 무슨 말인지 알겠냐?”
“······.”
“우철이 너 지금 무공수위가 어느 정도냐.”
“절정입니다.”
“절정 끝자락?”
“네.”
“천군이 너는?”
“입신경-”
“왕년에는 내가 이랬는데에- 이런 거 필요없어. 리즈 시절 찾지 말고 지금 말하는 거야. 싸움 어느 정도 하냐고.”
“······절정.”
“절정에서 중간쯤 되지?”
“그것보다는 좀 더 나아. 중상 정도······.”
“그거나 그거나.”
내가 다시 설명했다.
“대머리 걔는 입신경쯤 돼. 아주 초짜는 아닌 수준? 키큰 멀대 둘도 우철이 너 정도 하거나 그거보다 나은 것 같다. 마법사 기집애는······, 걔는 존나 짜증나고.”
짜증난다는 건 나한테 있어서는 극찬에 가까웠다.
‘게임 줘까치 하네’랑 비슷한 의미랄까.
“그것만 해도 너희 둘이 후달리는데 심지어 걔네는 환생한 것도 아니잖아. 그치?”
사실 그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쪽은 강호무림에서 팔팔한 현역으로 뛰다가 판타지 건너가서 이계진입물 한 편 거하게 찍고 온 것 같은데, 이쪽은 몇십 년을 속세에 찌들은 퇴물들이라 이거지.
“몬스터 십 년 잡았다고 그게 어디 우리 전생만 하겠냐? 다시 말해서 너희는 지금 전력도 달리고,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것도 부족하고, 심지어 실전 경험도 부족하단 말이야.”
“크음······.”
우철이가 무겁게 침음성을 냈다.
이수민은 아예 아무 말도 없고.
“물론 내가 작정하고 나서면 걔네 묵사발 만드는 거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천군이 너는 봤지?”
이수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을 거다.
뭔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마법사 계집애는 마나나 내공을 일시적으로 제한할 수 있다.
그거 당하면 내 역용술도 풀리고 만다. 내공으로 유지하는 거니까.
나에게 있어서는 쉬이 감수할 수 없는 리스크였다.
“그래서 대책을 확실히 마련할 때까지는 내가 함부로 나설 수는 없다 이 말이야. 뭐,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고. 너희도 힘 좀 키워야지.”
이제는 우철이도 이수민이도 굳이 인적 없는 이런 곳으로 부른 이유를 눈치챈 것 같았다.
흡족한 마음으로 내가 우철이에게 물었다.
“우철아. 너 나 안 지 몇 년 됐냐.”
“전생까지 포함하면······.”
“백 년까진 안 돼도 오십 년은 넘었지?”
“네.”
“오래 기다렸다.”
이 말을 우철이에게 할 수 있어서 기뻤다.
“너 무적신공 배워볼래?”
우철이가 곧바로 머리를 땅에 박으려고 하길래 허공섭물로 일으켰다.
우철이가 발악했다.
“으아아아! 사부님 말리지 마십시오! 빨리, 빨리 구배지례를 드려야!”
“그, 그래? 그럼 네 마음대로 하던지······.”
우철이 눈빛이 광기에 차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쿵, 쿵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이수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설마 나한테도-”
“꿈 깨라.”
“그럴 줄 알았어.”
이수민도 딱히 아쉬워하지 않는 듯했다.
천마신공이 어디 가서 빠지는 무공도 아니고 쟤는 지금 내공이 부족한 것뿐이니까.
“그러면 나는 뭘- 으아악!”
말하다 말고 이수민이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주먹을 거두면서 내가 설명했다.
“뭐긴 뭐야. 너는 나랑 실전훈련이지. 걔네 너 부하들이었잖아. 그놈들 파해법도 찾고, 실전 감각도 올리고.”
암만 생각해도 백운상이가 키우다가 선계 가버려서 저놈이 테크트리를 제대로 못 탄 것 같단 말이지.
그 나물에 그 밥이긴 해도 치코리타보다는 베이리프가 낫잖아.
내가 말했다.
“백운상이 대리라고 생각해.”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하늘이 탁 트인 산 어귀였다.
나는 선계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백운상은 처음에 농이 지나치다며 웃었다.
다시 한 번 선계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백운상이 여지껏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처참한 표정을 보였다.
그리고 내공을 싣지 않은 손으로 나를 두들겨팼다.
무어라고 악을 썼던 것 같다.
나는 말을 고치지 않았다.
선계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허탈하게 웃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가.
마지막에 백운상이 입에 담은 건 원망도, 약속도 아니었다.
자기 꼴통 같은 제자. 죽이지만 말아 달라고. 그 말이었다.
이 정도면 그놈도 만족하겠지.
벌써 세 번을 살려줬고 또 뒤치다꺼리까지 맡았으니까.
백가야. 보고 있냐?
보고 있으면······, 고맙다고 인사나 좀 해주지 그래.
그런 생각을 했다.
***
사마군의 막내이자 실세인 천유화는 어릴 적부터 머리 쓰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눈치도 빨랐고 머리 회전도 좋았다.
뭔가를 예상하면 어지간하면 들어맞았다.
하지만 지금.
그런 천유화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두 가지나 일어났다.
첫 번째로 정체불명의 고수라던 자가 천유화 본인보다도 키가 작은 어린 여자애라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유화 언니?”
그 여자애가 대면하자마자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은 것.
“언니!”
여자애가 힘껏 외치며 천유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세 번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