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우리 그냥 비긴 걸로 하지 않을래?
이수민 저놈은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그런 말 있잖은가.
욕 먹으면 오래 산다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저놈 수명이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을 터.
왜냐하면 내가 지금 속으로 쌍욕 중이거든.
진짜로 어처구니가 없네.
인간이란 생물이 이렇게까지 민폐덩어리일 수가 있나?
천마였잖아. 나 죽고나서 천하제일인이었다면서. 실제로 싸움도 잘하잖아.
근데 그런 놈이 왜 자꾸 처맞고 다니는데.
왜 어딜 가나 일을 만드냐고.
그래. 백 번 양보해서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야.
근데 그 뒷수습을 왜 내가 다 해야 하냐는 말이다.
“후우······.”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내 등장에 사마군과 이수민까지 포함한 다섯이 입을 다물고 나만 쳐다보고 있다.
살짝 뻘쭘했지만 여기 온 목적은 달성해야 하니까.
한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안녕, 얘들아?”
“······.”
“우리 또 보네? 반갑다.”
“······.”
오늘 처음 보는 키큰 남녀 한쌍은 눈만 껌뻑거렸고, 마법사 계집애는 얼굴이 실시간으로 표독스러워진다.
그리고 대머리가 내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대답은 하지 않고 맞받았다.
“너네 왜 거짓말했냐?”
“뭐?”
손가락을 뻗어서 아직도 바닥에 엎어져 있는 이수민을 가리켰다.
“소란 피울 생각 없다면서. 근데 왜 불쌍한 애를 괴롭히고 그러냐고. 응?”
“구하러 온 건가?”
대머리의 물음이 의표를 찔렀다.
이게 따지고 보니까 그러네.
저놈들이 보기에는 내가 지금 이수민이를 구하러 온 게 되는 건가?
완전히 잘못 짚었는데.
전혀 아니다.
이수민이 저놈 거짓말하던 게 드디어 들통난 것 같고, 혹시 취조당하다가 우리 딸에 대한 게 밝혀지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온 것뿐이다.
우리 딸 아끼는 마음이 고마웠다거나, 여름에 힘 거의 다 잃어버린 것 때문에 얻어맞고 다니는 것 같아서 찝찝했다거나, 전생에 고기 억지로 먹이고 현생에 계속 부려먹고 갈군 게 미안하다거나.
그런 이유는 결단코 아니다.
아무튼 아니다.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키큰 남녀 한쌍은 대머리 앞에서 전위 포지션을 잡고 있었다.
마법사 계집애는 여전히 이수민 위에 뭉개고 앉아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리고 이수민은······,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그러다가 떠듬떠듬 입을 뗀다.
“서, 설마 하-”
“떼엑!”
내가 근엄하게 꾸짖었다.
눈을 찡긋하면서 전음을 보냈다.
<좀 닥치고 있어. 그러면 뭐, 내가 게이트 들어가서 죽기라도 했을 줄 알았냐? 이거 아주 웃기는 새끼네? 내가 누구 좋으라고 죽냐, 죽기는.>
“······.”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수민이 살짝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다.
다른 거야 어찌됐든 스미스 교관, 그러니까 하무린이 사실 살아 있었고 지금 자기 구하러 와줬다는 것까지는 분명히 인지를 했나보다.
대머리가 나와 이수민을 번갈아보더니 작게 중얼거린다.
“전대 교주. 제법 든든한 방수가 있었구료.”
“우리 마법사 친구들. 일단 내 얘기 한 번 들어보는 게 어때? 깔끔명료하게,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만 말할게.”
친절한 웃음을 띄고, 양팔을 벌려서 평화적인 제스쳐를 취했다.
“우리 있잖아······. 오늘은 그냥 비긴 걸로 하지 않을래?”
“뭐라고?”
“걔만 나한테 넘겨주면 평화롭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거 같거든.”
중앙으로 걸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중에 가위바위보를 하든 사다리타기를 하든 그건 좀 더 생각을 해 보고. 오늘은 여기서 적당히 마무리 짓고 끝내기. 괜찮은 제안 아니냐?”
“그걸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뭐지?”
이익이라······.
제법 괜찮은 게 있긴 하지.
“몸 성히 걸어다닐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자 이익이 아닐까?”
“크하핫!”
내 말에 대머리가 크게 웃었다.
왜 웃는 거지? 진심으로 한 말인데.
일상의 감사함을 모르는 놈이었다.
건물이 떠나가라 웃던 대머리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거절하지. 넘겨줄 수 없다.”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너희한테도 나쁜 제안이-”
“자신이 있다면 힘으로 뺏어봐라. 그렇지 않아도 너와는 한 번 싸워보고 싶었지.”
대머리가 호기롭게 말했다.
나도 솔직한 생각을 전했다.
“그으래? 난 때려보고 싶었는데.”
싸움이 시작됐다.
***
천유화는 당황스러움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뭐야? 저 인간 뭐냐고!’
갑작스럽게 난입한 정체불명의 헌터.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온몸에 강기를 두른 혁련휘가 달려든다.
상대가 여유롭게 오른손을 쫙 펼쳐서 앞으로 뻗었다.
힘의 낭비없이 손 주위로만 마나를 사용했다.
집적된 밀도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콰아앙!
혁련휘의 돌진이 가로막혔다.
강철도 종잇장처럼 찢어낼 공격을 한 손만 사용해 막아낸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나머지 한 손을 들었다.
곧바로 혁련휘를 향해 휘두르려 했으나,
쉬이잉!
곡비령과 진태호가 쏘아낸 마력을 가볍게 쳐내는 데에 그쳤다.
그 틈을 타 조금 거리를 벌린 혁련휘가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상대가 양손이 복잡하게 움직이며 맞섰다.
연이어 쏟아지는 곡비령과 진태호의 공격마법을 쳐내고, 혁련휘와는 복잡하게 초식을 주고받는다.
심지어 셋을 상대하는 상대 쪽이 더 여유로웠다.
타앙, 탕!
자신에게 날아온 공격마법을 혁련휘에게 튕겨내는 기교.
혁련휘가 그걸 피하고 받아내는 사이 상대가 접근했다.
이대로라면 정통으로 한 방 먹을 것이다.
‘위험해!’
천유화가 온힘을 다해 마나를 운용했다.
마력이 날아가 상대에게 적중했다.
투웅.
상대의 움직임이 일순간 무거워졌고, 혁련휘가 겨우 상대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곡비령과 진태호가 호위하듯이 그 앞에 섰다.
“방금 뭐한 거냐?”
상대의 시선이 천유화를 향했다.
방금 천유화가 구사한 마법은 국소영역 중력제어.
단순히 쉴드를 펼쳐주는 걸로는 효과가 없을 것 같아 무리해서 사용한 것인데,
‘저게 일 초도 못 버티고 해제돼?’
천유화가 상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여전히 제압되어 있는 이수민을 향해 물었다.
“저 인간 정체가 뭐지?”
“······.”
이수민은 노려보기만 할 뿐 입을 꾹 다물었다.
천유화가 바쁘게 생각했다.
‘나도 참전해야 하나?’
이수민을 안정적으로 붙잡아두려면 자신이 지키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곡비령과 진태호는 영 미덥지가 못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세 사람만으로 싸운다면 승부의 추가 기울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방금처럼 지원해주는 걸로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큰 오라버니가 전위. 내가 후방에서 컨트롤하고, 비령 언니랑 태호 오라버니가 엄호. 넷이 한꺼번에 상대하는 게 아니면 승산이 없어.’
결론을 내리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마군의 넷이 전력을 다해서 합공해야만 겨우 맞설 수 있다니.
‘옛날의 진천군이라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그리고 느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네 싸움 좀 한다?”
꽤나 감탄한 듯한 어조.
상대가 말을 이었다.
“거기 깔짝대는 두 명도 마음먹고 혼자 싸우면 어딜 가나 제 앞가림은 할 것 같고, 대머리 너는 내가 살면서 본 애들 중에 음······. 손가락발가락 다 합치면 얼추 들어갈 것도 같단 말이지. 그리고 마법사 너.”
‘나?’
갑자기 자신을 향한 말에 천유화가 눈을 크게 떴다.
상대가 힘을 주어 말했다.
“너 시발, 존나 짜증나. 거기 딱 기다리고 있어라.”
천유화는 오싹하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어떻게든 해야 돼!’
가장 좋은 방법은 인질을 활용하는 것이지만 지금 사용할 수는 없는 방법이다.
나누었던 대화나 상황에서 힌트를 얻은 것인지 상대는 자신들이 이수민을 죽일 수 없다는 걸 전제로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향후의 일을 고려하면 지금 죽일 수는 없었고, 목숨이 보장되어 있다는 걸 상대가 아는 상태에서 협박을 한다고 먹힐 리가 없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동안 버텨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천유화는 결정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마력을 끌어모았다.
‘오 분. 오 분만 있으면 돼.’
천유화가 애타게 혁련휘를 바라봤다.
혁련휘 역시 의도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재개된 싸움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상대는 이수민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려 했다.
사마군의 세 사람이 수세를 취하며 그를 저지했다.
허나 합공의 이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방식이어서, 다시 삼 분이 지난 후에는 진태호와 곡비령은 바닥에 널브러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마침내 혁련휘와 일대일로 맞선 상황.
상대가 주먹을 꽂아넣었다.
혁련휘가 양팔을 교차해 방어했다.
“크윽!”
혁련휘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상단을 노린 발차기가 날아왔다.
혁련휘가 간신히 고개를 뒤로 제껴 회피하자 상대가 파고들었다.
짧은 간격이나마 힘차게 땅을 박차 추진력을 얻었다.
상대의 어깨가 혁련휘의 상반신에 직격했다.
쿠당탕!
혁련휘의 몸이 손쓸 틈도 없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직 전투능력은 건재했기에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타아앙!
힘껏 내지른 발에 얻어맞아 그대로 반대편 벽까지 날아가고 말았다.
천유화는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방해물을 모두 제거한 상대가 천유화를 향해 뛰었다.
당장 혁련휘를 무력화시키는 것보다 이수민을 확보하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
그리고 마침내 상대가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천유화가 속으로 외쳤다.
‘됐다!’
새하얀 빛이 건물 전체를 덮었다.
지금껏 준비하고 있던 마법, 마나 디스펠.
지정된 범위 내의 마력을 모두 통제해 중화시키고 무로 돌리는 초고위 마법.
거친 손길이 자신을 잡아채서 멀리 내던지는 와중에도 천유화는 확신했다.
틀림없이 먹혔다고.
그리고 빛이 꺼진 후에는······.
상대는 본래 천유화가 있던 자리에서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천유화가 신이 나서 혁련휘를 향해 외쳤다.
“오라버니 지금이에요!”
혁련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천유화는 의아함과 조급함을 동시에 느꼈다.
상대가 피해버리면 곤란하기에 디스펠을 이 공간 전체에다 걸었다.
하지만 마력이나 내공을 운용할 수 없다면 조건은 같다.
사마군 전원이 합공한다면 제압할 수 있다.
천유화가 다시 외쳤다.
“이거 길게 못 가요! 빨리-”
“마법사 친구들?”
천유화는 순간적으로 조급한 마음도 잊은 채 생각했다.
‘중원말?’
등을 지고 선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익숙했다.
그리운 고향의 언어.
상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시 한 번 제안할게. 우리 오늘은······, 그냥 비긴 걸로 하면 안 될까? 부탁한다.”
“무슨 개소리야! 오라버니, 어서-”
“한 번만 부탁할게.”
상대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만약에 내가 지금 여기서 등을 돌리잖아?”
그 목소리가 귀에 닿자마자 천유화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말투의 가벼움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말에 담긴 무게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그러면 너네 다 죽어. 한 명도 못 살려둔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현재 상황의 유불리와는 전혀 관계없이 상대의 말이 오롯한 진실임을 천유화는 깨달았다.
“내가 그러기 싫어서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그냥 비긴 걸로 하자.”
“······보내줄 건가?”
어느새 일어선 혁련휘가 묵묵히 말했다.
“다 데리고 가라.”
“오라버니!”
“유화. 오늘은 물러난다. ······다음에 다시 보지.”
천유화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혁련휘가 한 선택은 지금껏 한 번도 그릇된 적이 없었으니까.
곡비령과 진태호를 들쳐메고 그들이 출구 쪽으로 걸었다.
그때 상대가 외쳤다.
“잠깐만. 야, 마법사.”
“뭐야?”
“너 혹시 얘. 이수민이 휴대전화 네가 들고 있냐?”
“······.”
“그것도 내놓고 가라.”
혁련휘가 눈짓했다.
천유화는 휴대전화를 꺼내서 신경질적으로 던졌다.
건물을 빠져나온 후에야 천유화가 앙칼진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오라버니! 그냥 계속 싸웠으면-”
“그랬으면 다 죽었겠지.”
“······!”
“저자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정말로 다 죽었을 거다.”
혁련휘의 몸이 잠시 떨렸다.
그 모습에 천유화는 저도 모르게 불경스러운 생각을 했다.
사마군의 수좌이자 입신경의 고수인 혁련휘가······.
꼭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디스펠이 펼쳐진 후 바닥에 엎어져 있던 이수민의 표정.
경악을 금치 못하던 그 표정에 대해서.
***
······이거 좆됐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지금이 될 줄은 몰랐다.
조금 전까지 쌈박질하던 공간이 지금은 죽은 듯이 조용하다.
나도 모르게 뒷통수로 손이 올라갔다.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내뱉었다.
“거 뭐냐. 아무튼······, 그렇게 됐다야.”
나를 올려다보는 이수민.
경악, 분노, 당황.
온갖 감정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있다.
“너······!”
“너? 이 새끼 말버릇 보소?”
바로 뒷통수를 후려깠다.
아프지도 않은지, 그게 아니면 아플 여유도 없는 건지 이수민이 멍하니 중얼거린다.
“네가, 지현이 아버- 하무······.”
“뭐 이 시발. 하나만 해, 하나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내가 지현이 아빠다. 시발, 그래서 뭐 어쩌라고.”
“너어-!”
이번엔 삿대질까지 하길래 한 방 더 때려주려고 손을 들었다.
그래. 때려‘주려고’ 한 거다.
한데.
“어어어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이수민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뭐지? 이 새끼 지금 기절한 건가?
내 입에서 허탈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아직 안 때렸는데······.”
들어 올린 손이 민망해서 괜히 이수민 뺨을 툭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