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60화 (60/130)

60. 외전/ 어린 칼을 위한 위령제 (2)

“피에 미친 귀신처럼 다녔다고 합니다.”

“알았네.”

“제 어미를 포함해 청운촌이 몰살당한 것을 확인한 후에는 목숨을 도외시했다고 합니다.”

“알아들었으니 그만하게.”

“협공에 당해 양팔이 잘린 후, 진원지기까지 소진해 입에 검을 물고 다시 삼십여 명을 베었다고-”

콰앙!

며칠도 안 되어서 벼루를 또 집어던졌다.

제갈경은 이번에는 피하지 못했다.

벼루에 정통으로 맞아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제갈경을 노려보며 낮은 어조로 말했다.

“듣기 싫다, 내가 그만하라지 않았나? 그게 아니면 우리 총군사는 벌써 가는 귀가 먹은 건가?”

“아직 귀는 멀쩡합니다만,”

흐르는 피도 닦지 않은 제갈경이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맹주님이 취임하시면서 제게 말하신 바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설령 맹주께서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시더라도, 단 하나도 빠짐없이 일어난 모든 일을 낱낱이 보고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잘했네.”

“과찬이십니다.”

제갈경이 그제서야 이마의 피를 닦았다.

“그럼 피해상황은 이 정도로 하고, 향후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행히 강호의 민심은 크게 상하지 않았습니다. 홀어미가 죽은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것을 내세운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다시 천마신교에 연락을 넣어 원만한 수습을-”

“그거 말인데 군사.”

“예.”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답하게.”

“말씀부터 해보시지요.”

“몇 번 남았나.”

“······.”

“답하라 했네. 몇 번 남았나.”

제갈경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아직 조금 남은 이마의 피를 벅벅 닦았다.

그리고 씹어먹듯이 말했다.

“향후 십 년 내로 세 번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때부터 몇 년 지났지?”

“이제 오 년 지났습니다.”

“아직 쓴 적이 없지?”

“없습니다.”

거기까지 듣고 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이번에 한 번 써도 되지 않겠나? 아직 두 번 남잖나.”

“한 번 남습니다.”

“군사는 귀가 먹더니 이제는 계산도 제대로 못하는 건가? 셋에서 하나를 빼면 둘이 남지, 어떻게 한 번이-”

“백운상이 엮인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

제갈경이 경고하듯이 말했다.

“분명 맹주께 말씀드렸습니다. 강호에서 벌어진,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들까지 고려해, 십 년 내로 세 번까지는 맹주께서 자유로이 행사하실 수 있다. 그까지는 어떻게든 제가 감당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허나 이번은 경우가 다릅니다.”

“마교놈들 때문에?”

제갈경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움직이신다면 천마신교와의 밀약을 깨시는 일이 됩니다. 본래의 한 번에 더해서 한 번의 기회를 더 소진하셔야 합니다. 설마하니 백운상을 얕잡아 보시는 것은 아니실 테지요.”

“······그건 아니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제갈경이 앉은 자리를 지나가면서 말했다.

“그래도 아직 한 번 남았군.”

“맹주!”

“나까지 귀 먹은 것 아니니 살살 말하게.”

돌아보니 제갈경의 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하게 이글거렸다.

“한 번이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 한 번으로 일백의 무인을 구하고 일천의 민초를 살릴 수도-”

“나도 알아.”

“그걸 안다는 분이 고작 죽어나자빠진 한 놈 때문에······.”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돌아서 제갈경에게 다가갔다.

한 대 거하게 얻어맞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제갈경이 몸에 힘을 잔뜩 주었다.

때리지는 않았다.

“군사 자네는 옳은 말을 좆같이 하는 게 문제야. 자네도 알지?”

“틀린 말을 듣기 좋게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한 번만 눈 감아주게.”

“네?”

제갈경의 얼굴에서 늘상 짓던 퍽퍽한 표정이 사라졌다.

진짜로 놀란 얼굴이었다.

맹주되고부터 부려먹거나 명령하기만 했지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한 적은 없었지, 아마.

“내가 뭐, 아주 완벽하지는 않아도 지금까지 잘 해왔잖나? 앞으로 더 잘하겠네. 그러면 되지 않겠나?”

“맹주께서 정명이 그놈을 이만큼이나 아끼셨는지는 몰랐습니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집무실을 나서기 직전.

내가 말을 덧붙였다.

“그냥, 아직 많이 써먹지도 못한 어린 칼이 아까워서 이러는 거라고 생각하게나.”

그리고 곧바로 우철이 처소로 향했다.

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

“우철아!”

“맹주님······?”

수련을 하고 있었던지 땀을 뻘뻘 흘리는 우철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내가 대뜸 말했다.

“나랑 저기 산에 좀 다녀와야겠다.”

“어디 산 말씀이십니까?”

목적지를 말해줬다.

“태산.”

***

만검일주 萬劍一主.

강호무림 모든 검의 주인.

근원을 살피자면 멸칭에 가까웠지만 나는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지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무공 하나 배워 강호출도한 촌놈이,

온 세상이 제 것인 마냥 설치고 다니다,

어린 마종에 그만 눈이 멀어서,

권력을 손에 쥐고,

온몸에 피를 묻혔다.

오로지 내 욕망을 위해 그리 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내가 뿌린 피는 오롯이 나의 책임이어야 했다.

내 검과 내 붓을 통해 이뤄진 모든 업은 나의 것이어야만 했기에,

다른 모든 이들은 그저 휘두를 칼이면 족했다.

나는, 내가 행한 모든 일에 대해서,

그것이 내 책임이 아니라 눈 돌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다만.

그래도.

일만의 검 중 하나 정도는.

힘을 다해 담금질해서, 반짝반짝 빛을 내어서, 모두가 우러러볼 명검으로 만들어서.

마침내는 사람으로서 나와 마주보게 하고 싶었다.

그것이 내 삶에 있어 몇 안 되는 바람 중 하나였고,

그렇게 남몰래 애지중지하던 어린 검이 부러졌다.

이유는 그걸로 충분했다.

“무림맹주 협검무제는 강호의 제일가는 협객이라 모두가 우러러 보았는데, 이럴 수가 있소이까! 어찌 혈왕의 비급을-”

“지랄하고 자빠졌네. 다음번엔 단전이 아니라 머리통에 바람구멍을 뚫어줄 테니 여름철 시원하게 나고 싶으면 한 번 더 입 열어라.”

태산 인근에 부나방처럼 몰려든 무인들.

스스로를 정正이라고 말하는 사기꾼.

사특한 기운을 흘리는 자.

협의를 말하는 위선자.

가리지 않고 모조리 무공을 폐했다.

너네 다 똑같은 새끼들이야.

내공에서 피냄새가 나는 자들이 몰려 왔다.

백여 명 정도.

“너네가 혈왕이 어쩌고 하는 잡놈들이냐?”

입을 여는 것도 보기 싫어 말했다.

“한 놈만 남고 다 죽어라.”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심장이 터진 자들이 일흔.

강기를 튕겨내 목을 베어낸 자들이 서른.

마지막 남은 한 놈이 자결하려고 하길래 단전을 폐하고 혀를 뽑았다.

제갈경도 아니니 말이야 알아듣겠지 싶어 말했다.

“안내해.”

산기슭을 몇 개 지나 들어선 지하에 으리으리한 본거지가 있었다.

대뜸 말했다.

“흡성대법 쓰는 새끼 튀어나와라.”

차고 있던 검을 바닥에 꽂고 말했다.

“어디 내 것도 한 번 먹어봐. 나는 어떠한 방해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내 심장에 걸린 맹세다.”

무적신공을 운용해서, 주변 잡놈들이 다 볼 수 있게 유형화시킨 강기로 내 심장에 직접 심령금제를 걸었다.

일 각을 기다렸다.

얼굴에 혈관이 드러나 있는 새끼 하나가 튀어나와서 내 팔을 잡았다.

“놓는 순간 뒤지는 줄 알아라. 어디 해 봐.”

정확히 십 초를 버틴 후, 놈은 칠공에서 피를 뿜으며 죽어 나자빠졌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고작 이런 새끼 때문에.

이따위 놈들 때문에······.

앞으로 걸었다.

손발을 뻗었다.

걸음마다 한 놈씩 죽어나갔다.

가끔은 두 놈씩.

혈왕의 비급을 익힌 걸로 보이는 우두머리는 세 걸음이 걸렸다.

놈의 손이 핏빛 강기를 머금고 나를 향해 휘둘러졌고, 검을 들어 양손을 잘라내고, 그대로 목을 베었다.

놈을 끝으로 나와 우철이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이 공간에 산 자가 없었다.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우철아.”

“네, 맹주님.”

“여기 어디 책 같은 거 있나 찾아봐라.”

“분부 받들겠습니다.”

한 시진 후에 우철이가 낡은 종이뭉치를 하나 내게 건넸다.

겉을 살피니 혈왕공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걸 들고 다시 태산 인근으로 향했다.

나와 우철이가 나오기를 기다린 수백 명의 무인들이 시선을 보내왔다.

정확하게는 내 손에 들린 혈왕공을 향한 탐욕이었다.

비급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이거 너네가 찾던 거. 갖고 싶지? 그런데 어쩌냐. 안 줄 건데.”

“······!”

“꼬우면 덤벼보든가, 좆밥 새끼들아.”

사실은 그걸 바랐다.

비급을 원해 몰려든 부나방 같은 자들.

그들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내 목을 노리고, 나와 싸울 만한 기개가 있기를.

제갈정명이라는 칼을 부러뜨린 이들이 최소한 그런 자들이기를.

그리하여 이놈들을 모조리 죽여 내 어린 칼을 위로할 수 있기를.

그러나, 누구도 덤비는 이가 없었다.

“······됐다. 뭘 더 바라겠냐.”

비급을 양손으로 쥐고 부욱 찢어냈다.

삼매진화를 일으켜 남김없이 태워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한 식경쯤 걸으니 제법 강단이 있어보이는 놈들 백 명이 나와 우철이 앞을 막아섰다.

내가 물었다.

“너네 백운상이 부하들이지? 거기 앞에 두 놈은 안면 있는데.”

상대가 씹어먹듯이 말했다.

“협검무제······. 교주님을 우롱하려 든 죄는 반드시 치르게 될 거요.”

“운상이한테 미안하게 됐다고 전해줘라. 대신 너네 다 고스란히 살려줄 테니까 소란 피우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고.”

맹에 돌아와보니 백운상이가 보낸 서신이 들어와 있었다.

글이 짧았다.

<하무린, 미쳤느냐?>

“그래. 미쳤다.”

뇌까리며 서신을 찢어버렸다.

백운상이가 보낸 글귀 중에 따로 보관하지 않고 찢어버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손에 피냄새가 너무 지독하게 나서, 별로 슬프지 않았다.

제갈경을 불러 말했다.

“군사. 준비 좀 해주게나.”

***

위령제가 열렸다.

가장 마지막에 열린 이후로 일 년 만이었다.

그간 맹의 식솔 이백스물일곱이 죽었다.

나는 흰 옷을 정갈하게 갖춰입고 높은 단상에 섰다.

수천, 수만 명이 오직 나만을 바라봤다.

준비해 둔 종이는 태워버렸다.

굳이 필요가 없었다.

“궁유민, 진소운, 언세화, 남궁상인······.”

길게 이어지는 이름들.

모두 다 빠짐없이 기억한다.

내가 휘두른 칼과, 칼과, 다시 칼과,

그리고.

“-제갈정명.”

‘네가 절벽에서 떨어져서 기연 얻었다는 그놈이냐?’

‘네. 맹주님. 존경합니다!’

‘존경은 개뿔. 너 그러면 이제 뭐하고 살 거냐? 힘도 세졌잖아.’

‘사람된 도리를 잊지 않고 살아서 맹주님 같은 협객이 되고 싶습니다!’

‘······그것도 썩 할 짓은 못 되는데.’

‘만검일주라. 맹주님의 강호에 사람은 오직 맹주님 한 분이십니까?’

‘그래. 이 맹의 어느 누구라도 내 칼이 아닌 자가 없다.’

제갈정명.

채 벼려내지 못하고 부러진 어린 칼.

혹은, 다른 무언가.

“그대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모인 이들 모두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춤췄다.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피냄새가 더는 지워지지 않아도.

가슴속에 품었던 약속이 빛을 바래도.

내가 휘두른 칼들이 모조리 부러진다 해도.

그 모두를 잊지 않고 짊어지는 것.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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