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59화 (59/130)

59. 외전/ 어린 칼을 위한 위령제 (1)

절대 안 된다.

필요한 말은 그 한 마디로 족했다.

“불가 不可.”

“몰려든 잡놈들이 벌써 수백에 달한다 합니다. 보내주십시오.”

용맹한 음성이 내게 간언했다.

답했다.

“허락하지 않는다.”

“아침에 하오문 편으로 연통이 왔습니다. 비급이 숨겨져 있다 하여 화전촌 하나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합니다. 보내주십시오.”

인의에 호소하는 목소리.

답했다.

“이미 알고 있다. 불가 不可.”

“행여 삿된 자가 혈왕의 비급을 차지한다면 후에 벌어질 혈겁이 두렵습니다. 보내주십시오.”

강호무림과 무인의 도리를 말한다.

답했다.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저녁노을이 비스듬하게 내려와 창으로 반짝였다.

사내의 일그러진 얼굴이 빛을 받아 음영을 담았다.

나는 기어이 다시 한 번 확언했다.

“천검대의 그 누구라도 차출은 불허한다.”

“대체 왜 안 됩니까! 저 혼자 가겠습니다!”

소리 지른 말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헛것을 상대하듯이 떨쳐냈다.

“천검대 삼 조장 제갈정명.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자중하라.”

제갈세가 방계.

무림맹 제일 타격대 천검대 소속.

천하백대고수 말석.

강호제일 기린아 제갈정명.

두 해 전 약관을 넘긴 얼굴이 수려했다.

꾹 다문 입이 내게 납득할 수 없다 말했다.

“어린놈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구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갈정명을 향해 다가갔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검집채로 빼들었다.

제갈정명의 가슴팍에 대어 몇 번을 눌렀다.

누르면서, 침묵으로 던져진 질문에 답했다.

“절강 비검문과 여씨세가 무력충돌.”

“호북 적수촌 사망검마 침입. 적수촌민 일백쉰두 명 전원몰살.”

“서안 모산파 일대제자 설화운, 제령법보를 훔쳐 잠적.”

눌러서 힘을 주고 밀었다.

제갈정명의 몸이 무기력하게 휘청이다 쓰러졌다.

마지막 말을 더했다.

“오늘 새벽. 천마신교 수라대 삼백 명 십만대산 출산.”

몸을 굽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철없는 새끼야. 이게 지난 이틀 동안 벌어진 일이다.”

“······.”

제갈정명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나는 추궁했다.

“알고 있었냐? 하나도 몰랐지?”

“······허나 태산의 일도 그와는 별개인 사안-”

“절강에는 비연대가 간다. 적수촌에는 은검단을 보냈고, 모산파는 서안 지부에서 담당한다. 그리고 천검대를 포함한 외당 이백 명이 사흘 후 사천으로 간다. 가서 마교놈들의 준동에 대비한다. 태산은 네가 신경 쓸 자리가 아니다.”

단검을 바닥에 던졌다.

빈 손으로 제갈정명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알겠나? 이 강호에는 네가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일들이 이토록 많다.”

제갈정명은 기도가 항상 맑았다. 덧칠하기가 쉬웠다.

내 말로 침묵을 덧칠하는 것은 이리도 간단했다.

조소하며 물었다.

“정명아. 너는 스스로를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무인입니다.”

“틀렸다.”

틀릴 뿐만 아니라 아둔한 대답이기도 했다.

정답을 일렀다.

“너는 칼이다. 어리고 쓰기 좋은 칼.”

울분에 찬 제갈정명의 눈빛이 내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실망한 듯이 어떤 말을 입에 담았다.

“······만검일주萬劍一主라 하더군요. 지금껏 무슨 뜻인지 몰랐으나······, 이제는 저도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갈정명이 거세게 부르짖었다.

“맹주님의 강호에 사람은 오직 맹주님 한 분만 계십니까? 다른 모두가 칼입니까?”

만검일주.

나를 달리 부르는 말 중 하나였다.

강호 백도정파 모든 칼의 하나뿐인 주인이라.

듣기엔 좋으나 실상 나의 독선과 아집을 겨냥한 말이었다.

이번에는 대답이 아둔하지 않았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맹의 어느 누구라도 내 칼이 아니고 내 붓이 아닌 자가 없다. 자질이 좋다 하여, 기연을 얻었다 하여, 무공이 조금 높다 하여 예외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나는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그리고 허공에다 대고 명했다.

“이 새끼 병장기 뺏고 어디다 가둬놔.”

조금의 소란이 더 있고, 내가 직접 제갈정명을 제압했다.

놈이 끌려나가고 마침내 내 집무실이 묵묵해졌다.

목이 타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었는데 다기를 열어보니 우려놓은 것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바닥이 보이는 다기를 흔들며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맹주님. 차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오게.”

총군사 제갈경이 퍽퍽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꼴도 보기 싫어 들고 온 다기만 보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나.”

“필요하실 것 같았습니다.”

“용정인가?”

“엽차입니다.”

“저리 꺼지시게.”

제갈경이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탁자에 다기를 내려놓았다.

언짢은 기색을 담아 타박했다.

“저 천둥벌거숭이 관리 제대로 안 하나?”

“방계지 않습니까. 세가 문턱도 드나든 적 없답디다.”

“저만하면 데려다 품어도 될 것을.”

제갈경이 너털웃음으로 말했다.

“맹주님께도 저러는 놈을 어디 쓰겠습니까.”

농을 담은 듯했으나 실상은 실소가 나올 만큼 냉정한 말이었다.

세가 내에 제갈정명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없다는 뜻이니까.

내 목소리에 자연스레 노기가 섞여 나왔다.

“그래서, 객사하든 말든 상관없다 그 말인가?”

“맹주께서 이리 챙겨주시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제자로 들일 생각 없다고 내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아니면 마시고요.”

“그래. 아니니 헛된 꿈일랑 어서 깨시게.”

이 맹 안에 내 본령무공의 한 자락이라도 파헤치려는 자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내가 맹주가 되고 권력을 내 손에 쥐고, 천하제일인이 되었다 해서 그런 시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틈이 생겼다.

고금제일무공이 실전되는 것은 강호무림을 위해서도 너무도 아까운 일이라고.

그러니 후인을 두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말하면서 어린 아이들을 들이밀었다.

오대세가의 입김이 닿은 아이들.

구파일방이 길러낸 전인들.

그들을 앞세운 늙은이들의 탐욕이 역겨워 여지껏 단 한 명도 제자를 들이지 않았다.

제갈세가 방계 제갈정명.

제갈경이 지금 놈에게 자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도 같은 말이었다.

지금 세가로 들인다면 내 전인이 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러니 후에.

혹시라도 내 본령무공을 이어받는다면 그 후에 품는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는 계산이리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제아무리 위대한 무인이라도 가문보다, 문파보다 오래 살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시간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편이었다.

나는 내가 아끼는 제갈정명이라는 칼에다 진흙물을 묻히고 싶지는 않았다.

“우철이 한 명이면 족해. 그놈이 시중을 잘 들어. 그리고 정명이 저놈은 이제 내 그림자도 안 밟을 텐데 무얼.”

“제가 일러드리리까? 맹주께서 네 목숨 살려주신 것이라고요.”

“처맞고 싶으면 어디 한 번 해보시게.”

제갈정명은 어렸다.

협의심도 무공도 넘칠 만큼 있었으나 여물지 못했다.

담금질도 채 끝내지 못한 칼이었다.

그러니 아직 몰라도 된다.

태산에 나돌고 있다는 비급의 주인.

혈왕이라는 작자가 백 년 전 십만대산의 마교에서 갈라져 나온 놈이라는 것.

그 혈왕의 후예라는 놈들이 강호에 소란 한 번 피워보겠다고 태산으로 무인들을 부나방처럼 끌어들인 것.

천마 백운상이 내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어 자신들이 처리하겠다 한 것.

오늘 십만대산을 나선 수라대는 천하의 이목을 속이기 위한 미끼일 뿐이며, 마교 팔대 장로 중 둘이 이끄는 최정예 본대 백 명이 열흘 내로 태산에 당도한다는 것.

그것을 용인해 주는 대가로 막대한 이권을 받기로 한 것.

어느 것 하나 제갈정명이 지금 알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해서, 그 어린놈이 사천에 가서 할 일이라고는 한 가지밖에는 없다.

“갈 때 은자 좀 두둑이 쥐어주게나. 가서 사천요리나 실컷 먹고 오라고 하게. 맛있는 것 먹고, 생각도 하고. 그놈도 이제는 철 좀 들어야지.”

“그리 되면 좋겠습니다만······.”

자기 잔의 엽차를 다 비운 제갈경이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문득 궁금한 게 있어 제갈경을 불러세웠다.

“군사.”

“네, 맹주님.”

“한데 정명이 저놈. 왜 그리 태산에 가고 싶어 지랄을 한 거지?”

“네?”

“협이니 뭐니 하면 대가리가 헤까닥 돌아버리는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사리분별은 됐잖나. 혈왕인가 뭔가 하는 놈 비급이 탐나서 그런 것은 아닐 테고. 그놈이 익힌 무공이 훨씬 더 좋을 터인데.”

“······모르셨습니까?”

제갈경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짜증이 벌컥 나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모르니까 묻지. 대답이나 하시게.”

“세가 문턱이야 밟아본 적이 없지만 태산은 그놈 집이나 다름없습니다.”

“뭐야?”

“어릴 적에는 홀어미 모시고 그 인근에 청운촌이라고, 거기서 농사지으며 살았다더군요. 맹주님 정말로 모르셨습니까?”

“······이런 썅. 말을 안 해주는데 내가 어떻게 아나.”

“허어······.”

제갈경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서른 살 넘고부터는 잘 보이지 않았던, 진심에서 우러나온 표정이었다.

혀를 끌끌 차며 제갈경이 말했다.

“맹주님 집무실로 들이받으면서 그 이야기를 안 한 정명이 그놈이나, 속으로는 그리 아끼시면서 매몰차게 대하시는 맹주님이나. 아주 똑닮았습니다그려.”

“당장 그 입 닥치지 않으면 자네 신상에 커다란 불운이 닥칠지도 모르겠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갈정명은 맹의 수많은 무인 가운데서도 내가 특히나 아끼는 칼이다.

아직 덜 여물었으나 시간이 흐른다면 금강석도 자르는 명검이 될 수 있는 놈이다.

담금질을 하는 것은 좋지만 이런 방식은 좋지 않았다.

그놈을 엇나가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벼리고, 벼려내서, 명검으로 만들어서.

마침내는······.

제갈경에게 말했다.

“오늘은 그놈도 머리 좀 식히라고 하고 내일 오후에 이리로 불러주게.”

“알겠습니다.”

제갈경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집무실을 나서기 직전.

뒤돌아서 표정을 보이지 않은 채로 내게 말했다.

“폐가의 가주나 맹의 총군사로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대세가나 맹과는 상관없이, 맹주께서 강호초출 촌놈이던 시절을 아는 옛 지우로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머리 굵어지고 나서 먼저 잔대가리 굴리기 시작한 건 군사 아닌가? 뭐, 됐으니 말해보시게.”

제갈경이 말을 쏟아냈다.

“하가놈아! 네놈 죽은 후에 향 피워줄 사람이라곤 우철이랑 정명이 둘뿐일 테니 제발 잘 좀 대해줘라!”

콰앙!

내가 집어던진 벼루가 문에 맞아 떨어졌다.

제갈경은 이미 집무실 밖으로 달아난 뒤였다.

이 위아래도 없는 새끼.

“언젯적 친구라고 아직 맞먹으려고 들어, 들기는······.”

그래도.

기분이 썩 불쾌하지는 않았다.

개운한 마음으로 집무실을 나서 침소에 들었다.

몇 달 만에 잠을 푹 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집무를 시작할 때마다 들어오는 보고 문건들을 읽었다.

그중에 눈에 띄는 종이가 하나 있었다.

태산 인근 무력충돌.

일급 채음보양술 흡성대공 출현.

인근 세 개 촌락 삼백오십칠 명 대상.

전원 사망.

촌락의 이름.

양사촌. 제룡촌. 청운촌.

오후에 들르기로 했던 제갈정명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도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는 태산 인근에서 제갈정명이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들어 왔다.

열흘 후.

내가 아끼던 어린 칼이, 흰 천에 감싸여 소금에 절인 목만 남은 채 맹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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