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하늘에 피를 뿌리는 무의 제왕.
다소 뜬금없는 말이지만, 우리 지현이는 착하다.
애 엄마한테 쩔쩔매는 건 조금 다른 이야기니 별개로 두고, 아빠인 내 입장에서는 이만큼 착하고 귀여운 딸이 없는 것이다.
다른 집 애들은 중학교 들어가고 교복 입을 때쯤 되면 아빠랑 거리를 둔다는데.
개중에서도 듣고 가장 충격받은 일화는 이거다.
우리 부서 과장이 아침부터 죽상이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글쎄 자기 딸이 이랬다더만.
‘아, 아빠 옷이랑 내 옷 같이 빨지 말라고오!’
······그날은 과장이 먹고 싶다는 걸로 점심메뉴를 정했다.
아무튼 우리 지현이 심성이 정말로 착한데,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애가 아무리 화가 나거나 기분이 안 좋아도 하루이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까먹는다는 점.
특히나 맛있는 걸 먹으면 그 시간이 단축되는데, 오늘 내가 준비한 한수는 그중에서도 최강의 한수라고 자부할 수 있다.
“와, 이게 다 뭐야?”
방금 전까지 오 분 간격으로 현관문이 세 번 열렸다.
처음은 초밥.
두 번째는 탕수육.
세 번째는 피자.
궁극의 배달음식 3단콤보.
이걸로 지현이 기분이 풀리지 않은 적이 없다.
열 살 때였나? 운동회 장애물 달리기하다가 사람들 다 보는 데서 철퍼덕 엎어진 날도 이걸로 무마시켰으니까.
“아빠 내가 물 떠올게!”
지현이가 신이 나서 부엌과 거실 사이를 몇 번 가로질렀다.
물 가져오고, 컵 두 개에다가 얼음 담아서 챙겨오고, 숟가락이랑 젓가락도 가져온다. 저건 필요없는데? 배달봉투 안에 들어 있던 나무젓가락을 꺼내보였다.
“딸, 수저는 안 가져와도 되는데?”
“아빠 그러면 안 돼. 절약해야지.”
꼭 어린애 타이르는 것 같은 말투인데······.
뭐, 좋은 게 좋은 거다.
음식 세팅을 마무리하고 지현이한테 말했다.
“딸, 많이 먹어?”
“아빠 근데······, 엄마 나갔는데 우리끼리 먹어도 돼?”
표정이 잔뜩 폈으면서도 선뜻 안 먹고 우물쭈물하던 게 그런 이유였군.
“엄마는 밖에서 맛있는 거 먹고 온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딸이랑 아빠랑만 먹으면 돼.”
“그래? 히히.”
그제서야 지현이가 젓가락을 초밥 쪽으로 뻗는다.
애 엄마는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건데 여기 있으면 안 되지.
모든 게 사전에 계획된 것이다.
‘특별한 전생’을 공유하는 부녀지간으로서 지현이에게 알아내야 하는 게 있었으니까.
오늘은 지현이를 위한 맞춤메뉴였으니 소스도 내 손으로 직접 부어버렸다.
촤르륵!
지현이가 흠칫 놀란다.
“어? 어어?”
지현이 쪽으로 눈을 찡긋하면서 고해성사처럼 말했다.
“아빠도 이제 알겠더라구. 탕수육을 먹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부먹이지.”
“아빠······.”
내 말에 감동 받았는지 지현이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뜬다.
그래도 탕수육은 찍먹이야······.
어쨌든 지현이 기분을 최고조로 올려놓았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면서 음식을 먹다가, 슬쩍 흘리듯이 물었다.
“딸, 그러면 수민 언니랑 아직 연락 안 해?”
“응? 으응······.”
살짝 침울해졌지만 지현이가 계속해서 말했다.
“연락 안 와. 나도 음, 무서워서 못하겠어······.”
“그래? 그래도 수민 언니 엄청 좋아하지?”
“응!”
“아빠보다?”
“······어?”
지현이 얼굴이 혼란으로 물든다.
물론 지금 고민하는 게 이수민과 나를 똑같이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애가 너무 착해서, 이수민이한테 미안하니까 바로 대답을 못하는 거지.
암, 그렇고말고,
“으음······.”
한참을 고민하더니 지현이가 겨우 돌파구를 찾았나 보다.
얼굴이 확 밝아져서 말한다.
“지금은 아빠 1등! 왜냐면 나랑 밥 먹고 있으니까. 그리구 엄마가 2등. 왜냐면 아빠랑 나 빼고 외식하러 갔으니까. 그리고 수민 언니가 3등이야.”
“딸한테 싫다고 해서?”
“으응.”
“그러면 딸.”
“왜?”
이게 오늘 이 자리의 본론이다.
“딸 전생에 호위해줬다는 언니오빠들. 그 사람들은 몇 등이야?”
“공동 4등!”
이건 별로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는지 즉답이 나왔다.
여세를 몰아서 내가 말했다.
“그러면 있잖아. 아빠가 갑자기 궁금한데, 수민 언니랑 그 언니오빠들. 3등이랑 공동 4등은 서로 친했어?”
심장이 두근거린다.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지현이 대답에 달렸으니까.
그리고 지현이가 말했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고민할 것도 없다는 말투였다.
“응. 친했어!”
······뭐?
뜻밖의 대답에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일단 더 들어봐야 했다.
내가 굳이 더 묻지 않아도, 옛날 이야기가 나오니 지현이가 신이 나서 재잘거린다.
“사부님이 언니오빠들 엄청 챙겨주셨거든.”
“······구체적으로는?”
“무공도 하나하나 잘 가르쳐주시구, 그러다가 언니오빠들 다치면 좋은 약도 꼬박꼬박 주시구. 집도 엄청 으리으리하구. 맞다! 영약 같은 거도 많이 주셨어.”
어째 이상한데.
감정적인 교류가 아니라 죄다 물질적인 지원이잖아.
거기다 지현이가 말하는 게 대체로 무공과 관련된 거다.
이건 잘 대해줬다기보다는 뭐랄까.
흡사 인간병기를 만들기 위한······.
“수민 언니, 그러니까 사부님이 옛날에는 말수가 되게 없으셨거든? 그래서 남들이 보면 안 그래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다 안단 말야. 나랑 영호 삼촌이랑 또 몇 명 빼면 언니 오빠들이랑 제일 많이 친했어.”
살짝 감이 잡힌다.
그러니까 진천군 기준으로 저 정도면 친한 사이였다, 이건가.
이 새끼······. 도대체 전생에 어떤 삶을 살았던 거지?
“그러면 언니오빠들은 수민 언니 좋아했어?”
“으음······. 응.”
“주로 어떤 면에서?”
“왜애, 그런 거 있잖아. 존경심? 경외심? 그런 느낌으로. 태호 오빠 말버릇이 항상 그거였는데. ‘교주님이 아시면 경을 치실 겁니다.’”
이제는 완전히 알겠다.
천군이랑 사마군 이 새끼들.
그냥 비즈니스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양쪽 다 우리 딸한테는 껌뻑 죽었으니 지현이 앞에서만 예의 차린 거겠지.
사이 나쁘지만 자식 앞에서는 그런 티 안 내는 부모 같은 거.
“아, 근데 딱 한 번 사부님이랑 언니오빠들 싸운 적 있어.”
“언제?”
“내가 사부님한테 성화 건네받을 때 일인데.”
성화라······.
나는 이제 성화의 ㅅ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인데.
그래도 잠자코 들었다.
“유화 언니라고 언니오빠들 중에 막내였는데. 유화 언니가 나 고생한다구, 신녀 자기가 한다구 했을 때.”
“수민 언니도 딸이 그거 하는 거 안 좋아했다면서? 근데 왜 싸웠대?”
“그거는 사부님은 신녀 하면서 많이 힘드셨다구 나도 그럴까봐 걱정하신 거! 근데 그래도 신녀 하면 그으, 빽이 어엄청 두둑해지거든. 나는 두 사람 다 이해해. 나 걱정해서 싸운 거니까.”
유화라는 게 그 마법 가르치던 걔 같은데.
성질 더러운 줄은 벌써 알았지만 배짱이 상당히 좋네.
걔 입장에서 당시의 이수민이한테 개기는 건 거의 목숨 내놓고 하는 일이었을 텐데.
지현이가 자랑처럼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막상 해보니까 나랑 성화랑 엄청 잘 맞았다? 역대 신녀 중에 제일 뛰어난 자질이라구 막 수민 언니도 유화 언니도 팔짝 뛰면서 좋아했어.”
“그랬구나······.”
가끔씩 궁금하긴 했다.
그 성화라는 게 도대체 뭐길래 불덩어리 하나로 이 사단이 일어난 건지.
하지만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물건이니 이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어쨌든 대강은 애 엄마 추측이 맞아보인다,
사마군이라는 애들이 이수민이 찾아서 왔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결론을 내고 처참하게 눅눅해진 탕수육을 피해 내가 초밥 쪽으로 젓가락을 뻗었을 때였다.
탁자 위에 놓아둔 지현이 휴대전화가 울렸다.
스윽 보고는 지현이가 놀라서 외쳤다.
“어? 언니다!”
놀람과 기대감이 섞인 눈빛으로 지현이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다시 뚫어져라 휴대전화 액정을 바라본다.
지현이 얼굴에 점점 핏기가 없어진다.
마침내 지현이가 고개를 떨구고 툭, 내뱉었다.
“아빠.”
“딸 왜?”
“랭킹, 변동 있어.”
“응?”
“아빠, 엄마, 언니오빠들. 그 다음 7등 수민 언니······.”
지현이가 휴대전화 화면을 내게 보여준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현아, 연재 중단한 소설 말인데, 본문을 아예 내려버리거나 비공개로 해두면 안 될까?>
아이고, 천군아······.
***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네?”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길래.”
천유화가 궁금한 듯이 물었다.
이수민은 그제서야 자각했다.
아까 유지현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로 쭉 휴대전화만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답장이 없어······.’
혹시나 모를 위험을 대비해 글을 내리라고 권유한 건데 기분이 상해버렸나?
아직 화해도 안 한 상황에서 주제넘는 짓이었나?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수민 입장에서는 한시가 급한 일이었니까.
‘으으······.’
“고민거리 있니?”
“네?”
“언니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너무도 상냥한 천유화의 배려.
이수민은 퍼뜩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뇨. 괜찮아요!”
“······그래?”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지만 천유화의 말에는 서운함이 깊게 배여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운함이 아닌 자괴감.
설운혜에게 변변한 도움을 못 준다는 사실이 서글픈 모양이었다.
이수민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너희가 운혜를 아끼는 것만은 인정할게. 내 마음의 백분의 일 정도? 딱 거기까지만.’
“근데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천유화가 보여줄 게 있다고 해서 따라나선지가 십 분째였다.
사마군이 살고 있는 저택 뒤편. 동네 뒷산이라기엔 조금 높고 그렇다고 사람들이 다니는 것도 아닌 버려진 야산.
산책로가 닦여 있는 게 아니라 길이 험했지만 천유화와 이수민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냥 뜬금없이 여길 왜 올라가는지가 궁금했던 것이다.
벌써 세 번째 물었는데 천유화는 눈을 찡긋하면서 ‘비밀’이라고만 답했다.
이수민은 속으로 은근히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알아챘을지도 몰라.’
인적이 드문 곳에서 처리하려고 데려가는 것일지도 모르리라.
‘이기진 못해도 도망치는 것 정도는 가능해.’
물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니 현재로서는 따라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괜히 제발 저려서 일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면 안 되니까.
이수민의 얼굴이 복잡해보였던지 천유화가 달래듯이 말했다.
“이제 다 와가. 오 분 정도?”
과연 그 말대로 곧 가파르던 산길이 완만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평지가 되었을 때쯤.
‘길 끊겼는데?’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걸으면 저 아래로 굴러떨어질 것이다.
여기서 밀어버리려고 하나? 라고 이수민이 긴장을 했던 그때, 천유화가 말했다.
“여기서 잠깐 날아가야 돼.”
“네?”
“가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수민의 몸이 붕 떴다.
천유화의 마법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날아서 도착한 곳은 바로······.
별다를 것 없는 커다란 석벽 앞이었다.
“여기 찾는다고 고생 좀 했어.”
으스대듯이 말한 천유화가 뭐라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석벽의 중앙부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이다.
밖에서는 쉬이 가늠이 안 될 정도로 깊은 동굴이었다.
“들어가자.”
쾌활하게 말한 천유화가 먼저 동굴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이수민도 그 뒤를 따라 내부로 진입했다.
동굴 속을 걸으면서 천유화가 자랑처럼 말했다.
“의외로 깨끗하지?”
“네······.”
막상 안에 들어가보니 이건 동굴이라기보다는 잘 닦인 통로 같은 분위기였다.
천유화가 설명했다.
“미리 치워뒀거든. 운혜 너 데려오려구.”
“······여기 뭐가 있나요?”
“응. 있어.”
천유화는 그렇게만 말하고 더는 알려주지 않았다.
다시 십 분을 더 걸어서, 굽이진 갈래길을 몇 번이나 지나서.
마침내 넓은 공터가 확 펼쳐졌다.
그리고.
고풍스럽게 세워진 제단보다, 공터 사방을 밝히는 횃불보다도 먼저 눈에 띈 그것.
화아악-!
사람 몸통만한 크기로 타오르는, 푸르디 푸른 불꽃이었다.
이수민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저 불꽃의 정체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수민 자신과는 지지리도 안 맞던.
사랑하는 제자와는 찰떡궁합이던.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사태를 일으킨 만악의 근원.
‘성화······!’
앞장서 있던 천유화가 뒤돌아서 이수민 쪽을 향했다.
그리고, 정말로 환한 미소와 함께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나의 주군. 신교의 주인이시여. 당신의 영광을 이 천것이 잠시 받잡고 있었나이다. 이제 성화는 본디 있어야 할 자리로 오롯이 돌아갈 터이니, 부디 굽어살펴주시옵소서······.”
타닥.
발소리가 들렸다.
이수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태호, 곡비령, 혁련휘.
사마군의 나머지 셋이 상기된 표정으로 공터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이수민 앞에선 그들 역시도 천유화와 마찬가지로 극진한 예로 절을 했다.
“굽어살펴주시옵소서!”
“굽어살펴주시옵소서!”
공터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들.
이수민은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나, 나는······.”
혼란을 틈타 고개를 잠깐 든 진태호가 말했다.
“운혜야,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건 운혜니까 그런 거고!’
이수민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옛날 생각이 났다.
신녀 자리를 이어받던 날.
장장 열두 시진이 걸린 계승의식.
사부 백운상의 이마에 핏대가 서는 걸 그날 처음 봤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던 한숨.
새로운 신녀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기대와 격려에서 낙담과 체념을 거쳐 결국에는 한없이 싸해지고 만 분위기.
6대 천마 진천군.
백운상과 하무린이 사라진 강호무림을 지배한 천하제일인.
해서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일컫기를, 하늘에 피를 뿌리는 무의 제왕(血天武帝)이라.
그리고.
그 처참했던 계승의식을 지켜봤던 이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신녀이자······, 그냥 힘만 더럽게 센, ‘그 꼴통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