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56화 (56/130)

56.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아는 걸 전부 다 털어놓으라는 말.

하지만 후폭풍이 무섭다.

“저기 말야. 굳이 당신까지 번거로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닭잡는 데 소잡는 칼 쓸 필요 없다고. 내 선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내가 직접 알아볼까?”

최대한 막아보려 했지만 애 엄마는 이미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냉기가 뚝뚝 흐르는 말투였다.

여기서 더 빼다간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 게 분명하고, 그건 내 입장에서는 절대 사양이다.

“제가 처음부터 상세하게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전부 다 말했다.

처음 김유진에게 의뢰를 받았을 때부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애 엄마는 팔짱을 낀 채로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간혹 눈썹 끝이 치켜올라가는 대목에서는 최대한 말을 빨리 해 넘기는 등 이런저런 생존스킬을 구사한 결과 삼십 분도 안 지나서 정리가 됐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음을 내무부 장관님께 어필하는 바입니다. 부디 선처를.”

“후우.”

애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래. 무섭게시리.

애 엄마가 팔짱을 풀고 내 손을 잡았다.

엄지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쓸어내리면서 이야기를 정리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네? 지현이 전생에 부하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왔고, 헌터 협회에서 마법 가르치고 있고.”

“네.”

“근데 지현이는 그걸 모르고, 부하라는 사람들은 이수민 씨랑 이산가족 상봉하고 있고.”

“맞습니다.”

“게다가 지현이 고 기집애가 밤에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지는 아직 오빠도 모르고.”

“정확하십니다.”

“······이게 뭐냐구.”

그러게 말야.

나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

“여름에는 현대 판타지 한 편 찍었다고 했지? 오빠가 생각할 때는 이번에는 무슨 장르야?”

“굳이 따지자면 스릴러 첩보물이 가미된 시트콤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아니, 아닙니다.”

애 엄마가 흘겨보길래 바로 꼬리를 내렸다.

말해보라면서. 그래서 말했는데 나한테 왜 그래······.

아직도 눈초리는 싸늘한데 내 손을 조물거리는 느낌은 좋다. 이율배반적인 쾌감에 내 정신이 혼미해졌다.

애 엄마가 말했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일단 두 가지만 생각해보자.”

“뭘?”

“첫 번째로 지현이. 우리 딸 밤에 뭐하고 다니는지는 꼭 알아야 돼.”

과연 옳은 말이다.

이수민이가 어쩌구, 사마군이 어쩌구저쩌구.

그런 거야 솔직히 지들끼리 알아서 할 일이고 애 엄마와 나는 지현이만 안 엮이면 아무래도 좋다.

“그리고 두 번째.”

애 엄마가 중대한 의문, 결정적인 맹점을 입에 담았다.

“사마군이라는 사람들이 찾는다는 사람. 그거 정말로 이수민 씨가 맞아?”

찬찬히 설명이 이어졌다.

“환생했잖아? 겉모습도 바뀌었구. 그 사람들 착각한 거 아니냐는 거지.”

“······.”

“어쩌면 이수민 씨가 착각하게 만들었거나.”

“그러면, 사실은 그놈들이 찾는 게 지현이인데 번지수를 좀 잘못 짚은 거다?”

“응. 내 생각은 그래. 왜, 오빠도 그랬잖아. 이수민 씨 전생에 성격 엄청 안 좋았다면서.”

“걔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다시 태어났지.”

지금 이수민은 교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획기적으로 사람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전생에는 그만한 꼴통 새끼가 없었는데.

“그런 사람을 찾으려고 부하들이 와서 극진히 모신다? 그것보다는 지현이 찾으러 왔다는 게 훨씬 이치에 맞아보여.”

썩 유쾌한 결론은 아니지만 신빙성이 있다.

그리고 만약 애 엄마 말이 맞는다면.

“천군아······.”

“응?”

“아냐, 아무것도.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

이 시대의 참스승 이수민에 대한 애수는 일단은 접어두자.

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니 애 엄마가 이어서 말했다.

“오빠가 지현이한테 한 번 물어보는 게 어때?”

“내가?”

“응. 오빠 그거잖아. ‘마교졸개’”

애 엄마가 피식 웃는다.

잊고 있었던 흑역사인데.

그래도 이 경우에는 도움이 된다.

지현이한테 의심 사지 않고 그냥 궁금한 척 물어볼 수 있으니까.

“전생에 이수민 씨가 지현이 호위대랑 친했냐, 사이가 좋았냐. 그런 식으로 티 안 나게 한 번 물어봐줘. 그거 답이 나오고 나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자.”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당신이랑 상의할 걸 그랬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그렇게 말하자 애 엄마가 양팔을 벌리더니 나를 꼭 끌어안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딱히 감동적인 멘트는 아니었다.

“그걸 이제 알면 어떡해. 그러니까 오빠는······,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으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부드럽게 속삭여서 귓가에 스며드는 세뇌.

거부할 수도 없고 딱히 거부하고 싶지도 않다.

생각한 그대로 답했다.

“······충성충성.”

“아무튼 오늘은 좀 그렇구, 지현이 기분 좀 풀리면 한 번 알아봐줘. 이제 부엌에 있는 거 먹어도 돼.”

“장관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방문을 나서려던 때였다.

애 엄마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오빠.”

“응?”

“빼빼로데이 기념이라고 직원이 선물 돌린 거 받아온 거.”

“응.”

이번에 새로 들어온 여직원인데 성격 싹싹하고 인상도 호감이라 금방 우리 부서의 마스코트 비스무리하게 자리매김했다.

빼빼로데이라고 나한테도 선물포장해서 뭘 주던데 안 뜯고 애 엄마한테 바로 건네줬다.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 거지?

“내가 열어봤는데 쪽지 같은 거 하나 있더라구.”

“······.”

“별 내용 아니었구 아직 서툰데 많이 도와주셔서 항상 감사하다고 하더라? 내가 읽고 버렸어.”

“그랬어······?”

“길게 얘기 안 할게. 잘해.”

“넵.”

‘잘해’라는 건 일종의 기회를 주는 말이다.

이 시점에서 내가 잘하지 못하면 애 엄마와 ‘잘해’의 대상이 마주치게 된다.

억지스럽지도 않고 정말 자연스럽게 대면하는 것이다.

그 뒤에는 어쩐 일인지 그 사람들 다 나를 피하더라구. 정말 신기한 현상이지.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니, 모르고 싶다······.

***

유지현은 베개맡에서 얼굴을 들었다.

베개 커버가 축축했다.

눈가에 손을 대어보니 엉망으로 부어있었다.

유지현은 깊이 성찰했다.

‘삶이란, 죽음이란 도대체 뭘까. 나라는 인간의 존재가치는 뭐야?’

잘하는 것도 없다.

노력도 안 한다.

‘아직은’ 키도 작다.

급기야 사랑하는 사부에게까지 미움을 샀다.

유지현은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작가도, 다크나이트도 아냐.’

그냥, 그냥 중2병이다.

“히잉.”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유지현은 눈가를 꾹 눌렀다.

오히려 역효과였다. 눈물이 주르륵 흘러버렸다.

그래도 실컷 울고 자신의 쓸모없음에 대해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개운해졌다.

밑바닥을 보고서야 용기가 생겼다고나 할까.

‘이대로는 안 돼.’

이제야 겨우 결심이란 게 섰다.

다시 약한 마음이 들기 전에 행동으로 옮겨야 했다.

유지현은 비척비척 침대에서 일어났다.

책상에 덩그러니 놓인 노트북을 열었다.

인터넷을 켰다.

어딘가에 접속하고 로그인을 했다.

읽지 않은 쪽지 87통.

확인하지 않은 댓글 558개.

“읏······.”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에 유지현은 무심코 얼굴을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이것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다.

눈 돌리지 않고 당당히 마주해야 했다.

유지현의 입에서 무거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어······.”

그리고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공지사항 쓰기.

제목 : 스카이 데빌입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물 한 잔······, 마셨습니다······.’

***

마법 교육 도중의 쉬는 시간.

구석 자리에서 이수민과 담소를 나누던 천유화는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교육을 받는 헌터들 대부분이 빙 둘러 모여서 웅성거리는 걸 본 것이다.

‘뭐야?’

서로 안면이야 있지만 보통 쉴 때는 자기 친한 사람들끼리 노는데.

호기심이 생긴 천유화가 이수민에게 물었다.

“혹시 오늘 무슨 일 있니?”

“네? 아뇨, 제가 알기로는 딱히······.”

“잠깐만 보고 올게.”

천유화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헌터들 쪽으로 다가갔다.

말소리가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렸다.

“연중했어?”

“아쉽다. 요즘 재밌었는데.”

천유화가 불쑥 고개를 들이밀고 물었다.

“거기 다들 뭐해요?”

헌터 중 한 명이 대표로 말했다.

“아, 소설 보던 게 있었는데 이제 연재를 안 한다고 해서요.”

“무슨 소설인데 여기 사람들이 전부 다 이러고 있어요?”

“그게, 무협 소설인데 저희 아는 애가 인터넷에서 연재하거든요.”

“무협?”

그 웅장한 울림에 천유화는 흥미가 솟는 걸 느꼈다.

수강생의 설명이 이어졌다.

“왜, 무공 같은 거 있잖아요. 무림맹 있고, 천마 나오고 그런 건데-”

“천마?”

여기서 그 이름을 듣게 될 줄이야.

천유화가 재촉하듯 말했다.

“어디 나도 한 번 봐요.”

“근데 이건 연재중단해서 차라리 다른 거 추천을-”

“알겠으니까 그거나 한 번 보여줘봐요.”

“네.”

헌터가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천유화가 손을 뻗어 받으려고 했다.

그리고.

휴대전화에 손이 닿기 직전에-

콰아아아앙!

등 뒤에서 어마어마한 폭음이 터졌다.

천유화를 비롯한 모두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아악! 팔이, 팔이-!”

그곳에 이수민이 서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쪽 팔목을 부여잡고, 오른손을 중심으로 검은색의 마력구체가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는 상태였다.

이수민이 애타는 눈으로 천유화를 바라봤다.

도움을 바라는 눈길.

“안 돼!”

천유화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체내의 마나의 흐름이 뒤엉킨 마력폭주.

강호무림 기준으로는 주화입마의 초기 증상.

바람처럼 달려간 천유화가 이수민의 팔에 손을 얹었다.

“진정하고, 내가 시키는대로 해!”

여기서 잘못했다간 큰일이 벌어진다.

천유화는 사력을 다해서 이수민의 방대한 마력흐름을 올바르게 인도해나갔다.

조금 늦게 놀라서 다가온 헌터들이 걱정어린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일 분여가 지나서야 이수민의 몸에서 손을 뗀 천유화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수민도 기운이 잔뜩 빠져서 옆에 쓰러졌다.

지친 천유화가 손을 뻗어 이수민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괜찮니?”

이수민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큰일날 뻔했어. 조심 좀 하지 않구.”

“죄송해요······.”

풀이 죽은 이수민의 얼굴.

천유화는 안쓰러운 마음에 말했다.

“아냐, 탓하는 거 아냐. 그냥, 나도 놀래서. 뭘봐요, 구경났어요?”

주변에 있던 헌터들을 물리고 천유화가 작게 속삭였다.

“운혜야, 조심해야 돼.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몸상태 보고, 이런 일 또 안 생기도록 언니가 더 잘 가르쳐줄게. 알았지?”

이수민은 생각했다.

‘좆······까······.’

물론, 마력폭주는 의도된 것이었다.

우철과 협상을 한 이후로 우철은 마법 교육에 나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환생자인 이서준도 우철이 구슬려 훈련에 빠지게 했다.

그걸로 불안요소는 다 제거했다고 생각했는데······.

‘지현이 소설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

‘칠대 천마의 전설’이라는 제목부터가 문제다.

천유화가 저걸 보게 되면 끝장이었다.

하지만 당장 시선을 돌릴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서 내공을 역류시키는 요령으로 마나폭주를 일으킨 것이다.

다행히 작전은 성공했다.

안도한 눈으로 이수민을 바라보는 천유화의 머릿속에서 조금 전의 무협소설 같은 건 이미 저 멀리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급한 불은 껐지만······.

이수민의 마음은 여전히 침울하기만 했다.

‘아직 화해도 못했는데.’

개찰구에서의 가슴 아픈 이별 이후 유지현과 연락이 뚝 끊겼다.

유지현 쪽에서도 아무런 말이 없었고 이수민은 무서워서 못했다.

심지어 소설을 연재중단한다는 중대한 결정이 있었는데 그것도 몰랐다.

그게 꼭 자신과 제자 사이의 멀어진 거리를 나타내는 것 같아 이수민은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시린 한기를 담은 이수민의 눈이 천유화를 응시했다.

천유화가 애정어린 미소로 웃어줬다.

그 순간.

‘······!’

이수민의 마음에 불청객이 침입했다.

불편한 기분.

자신에게 애정을 보내는 상대를 속이는 것에 대한 가책이랄까.

이수민은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고 했다.

‘아냐, 아냐. 지현이만 지킬 수 있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그리고 이년은 지현이를 좋아하는 거야. 나보고 개새끼라고, 짝궁뎅이라고 했어. 내가 자책할 필요는······.’

하지만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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