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딸이 천마인데 나는 무림맹주-55화 (55/130)

55. 모르는 사람이에요.

“저번에 그랬었지? 너희한테도 목적이 있다고.”

갑자기 나타나서는 묻는다는 게 저런 뜬금없는 질문이라니.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혁련휘는 우선 긍정했다.

“그래. 그건 왜 묻나.”

“그거 그냥 개인적인 일이라고 했었지?”

조금 짜증섞인 어투로 혁련휘가 답했다.

“그렇다. 너희들이 알 필요도 없고, 알려주고 싶지도-”

“하나만. 하나만 물어보자.”

위협적이던 상대의 어조가 변했다.

뭔가를 갈망하는 듯한 간절함이 거기 담겼다.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만 답하면 돼. 그 목적이란 거. 혹시 그냥 행복하게 사는 거냐?”

혁련휘는 남자의 물음에 담긴 의도를 파악해 보려고 했다.

아마 혁련휘 자신보다, 혈천무제 진천군보다도 강할 것이라 생각되는 상대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으면서도 그걸로 혁련휘를 강제하려 들지는 않았다.

질문에서 검은 속내랄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잠시 침묵하다가 혁련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나와 내 동생들은 다른 건 필요없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 그걸로 족하다.”

“그래?”

혁련휘는 바닥에 내려뒀던 마트 봉투를 다시 집어들었다. 봉투를 고쳐잡으면서 말했다.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말하지. 우리는 너희와 적대할 의사가 없다.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소란을 피울 생각도 없어. 그리고,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목적은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이루어졌다고?”

“그래. 지금도 그분을 맞이하러 가는 길이지. 네가 그런 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행여라도 방해는 하지 마라.”

그 말과 함께 혁련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주군이 방문하기로 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홀로 남은 남자. 유수현은 멍하니 혁련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잠깐 눈가를 좁혔다.

머리통에 비쳐서 그대로 반사된 태양빛이 문제였다.

유수현의 머릿속으로 제자인 정우철에게 들었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수민이도 이런 식으로 지랄 개폼을 잡았다더니.’

“마교 새끼들 종특인가?”

어이없다는 어조로 유수현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일단 안심이 들긴 했다. 반차를 내서 일부러 확인하러 온 건데 소득이 있었다.

놈들이 찾았다는 사람이 유지현이 아니라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가는 거라잖아.’

반면에 유지현은 집안의 중대 행사, 차수희와 유수현이 정식으로 사귄 기념일 파티를 위해서 오늘은 방과 후 계속 집에 있을 예정이었다.

알리바이가 완벽하게 성립한다.

‘지현이한테 하나만 더 물어보면 되겠네.’

시계를 보니 유지현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마중 나가서 같이 집에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유수현은 전화를 걸었다.

“응, 딸. 학교 마쳤어? 아빠가 데리러-”

자상하게 말하던 유수현의 말이 갑자기 뚝 끊겼다.

수화기 너머로 유지현의 침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빠······.>

“딸 지금 어디야?”

<여기 어디나면······.>

“응. 아빠 금방 갈게.”

유수현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

이수민은 번화가 건물 벽에 기대서서 초조하게 손가락을 두드렸다.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자꾸만 말이 새어나왔다.

“귀찮게시리 왜 만나자고 난리야?”

원망의 대상이 달리 있을 리는 없다.

전생의 부하이자 이제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자리매김해버린 사마군.

이수민을 찾은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자기들 집으로 초대를 했다.

어제는 온갖 핑계를 다 대서 거절했는데, 그 여파로 오늘 댈 핑계가 없었다.

해서 하는 수 없이 곡비령과 진태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저 사람 이수민 아냐?”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커플 한 쌍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수민은 가만히 눈에 힘을 줬다.

“사인 받고 싶은데.”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가자.”

대화를 나누던 커플은 곧 자리를 떴다.

배려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었다.

‘오래 가세요······.’

잠시 커플의 행복을 빌어준 이수민은 숨을 짧게 내쉬고 휴대전화 시계를 봤다.

오후 네 시 반이 다 되어 가는 중이었다.

약속시간이 정확히 네 시 반이었으니 일 분이라도 지체되면 그걸 핑계로 곧바로 집에 가버릴 생각이었다.

‘앞으로 오 분.’

오 분 남은 게 맞긴 했다.

물론 이수민의 생각처럼 해방의 시간이 아닌, 핵폭탄이 떨어지기까지 남은 시간이었다.

“수민 언니?”

익숙한 목소리.

이수민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꺄아악!”

“언니, 여기서 뭐해요?”

예쁜 교복을 입은 유지현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살짝 뾰루퉁한 어조이긴 했지만 해맑은 미소와 함께 말을 걸어왔다.

“요즘 연락도 잘 안 받고 너무해. 근데, 근데 여기 왜 있어요? 누구 기다려요?”

‘아, 안 돼.’

이수민의 두뇌가 고속회전을 했다.

곡비령과 진태호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 분 후.

아마 곧 올 것이다.

그리고 온다면?

필연적으로 유지현과도 마주치게 된다.

곡비령과 진태호는 유지현을 못 알아봐도 유지현은 틀림없이 알아본다.

환생을 한 것도 아니고 혁련휘처럼 외모에 변화가 생긴 것도 아니니까.

‘이걸 어쩌지?’

이수민이 고민하는 것도 모른 채 유지현이 다가와서 손을 덥썩 잡았다.

“혹시 남자친구? 히히. 그런 거면 안 섭섭할래. 그래도 나빴어요. 나한테는 왜 소개 안 해줘요? 응?”

이수민은 겨우 고갯짓하며 답했다.

“나, 남자친구 아냐.”

“그러면요? 썸 타는 사람?”

“그런 것도 아닌데······.”

“으음. 못 믿겠어.”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유지현이 이수민과 나란히 섰다.

이수민이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왜, 왜애?”

“누구 만나는지 보고 갈 거야. 우리 언니 마음고생 시키지 말라고 내가 말해줄 거예요.”

아이의 천진함은 의도가 없어서 더욱 잔인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리고 그 말은 아마도 중학교 1학년까지는 통용이 되는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유지현이 이 자리를 떠나게 해야만 했다.

“집에 빨리 가야 하지 않니? 아버님이 걱정하실 텐데.”

“아직 다섯 시도 안 됐는데? 아, 이거 봐요!”

유지현이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흔들며 자랑했다.

“오늘 엄마 아빠 사귄 기념일이라서 선물 준비한 거. 엄청 고민하다가 큰 맘 먹고 남은 용돈 다 모아서 산 거예요!”

“그, 그렇구나.”

“아무튼 5시 반까지 오라고 했으니까 괜찮아요. 언니 오랜만에 봤는데 좀 더 같이 있을래.”

유지현이 천진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수민은 죽을 맛이었다.

‘내가, 내가 안 괜찮아.’

그리고.

급기야 사태가 더욱 괜찮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수민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태호가 보낸 메시지였다.

<운혜야. 우리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것 같은데 어딨어? 건물 1층?>

‘끄아아아악!’

지하철역 출구 바로 앞의 건물이니까 길게 잡아도 3분이면 마주친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수민은 양손으로 유지현의 어깨를 붙잡았다. 온 힘을 다해 말했다.

“지현아, 언니가 지금 너어무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돼. 나중에 연락할게! 따라오면 안 돼!”

이수민은 곧장 지하철 역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사부 말이라고는 지지리도 안 듣는 유지현이 그 뒤를 쫓았다.

“언니, 왜 그래요! 언니!”

‘미안, 미안해.’

사마군이 역 개찰구를 통과해버리면 모든 게 끝장이다.

이수민은 사력을 다한 뜀박질로 개찰구까지 달렸다.

“언니!”

뒤에서 유지현이 애타게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휴대전화를 개찰구에 대고 통과했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지하철이 역으로 진입해 들어왔다.

등 뒤에서 유지현이 개찰구를 통과하려고 달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수민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오지 마!”

“언니······?”

명백히 놀라고 상처받은 것 같은 음색.

이수민은 이번에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경고처럼 말했다.

“오지 마. 오면 혼내줄 거야······.”

이제는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수민은 예리한 동체시력으로 지하철 유리창에 비치는 진태호와 곡비령을 잡아냈다.

개찰구에서 대각선 방향.

그쪽으로 걸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순식간에 역이 시끌시끌해졌다.

티격태격하며 나오던 진태호와 곡비령이 이수민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운혜야? 왜-”

“다음역에서 내려요.”

이수민은 양손으로 진태호와 곡비령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행여나 유지현이 얼굴을 보지 못하게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언니! 수민 언니이!”

이제는 숫제 비명처럼 들리는 외침이 이수민의 고막을 강타했다.

“운혜야. 저거 너 부르는 거 아냐?”

이수민은 대답하지 않고 진태호와 곡비령을 지하철 안으로 밀어넣었다.

‘문이 닫힙니다’라는 안내음과 함께, 마침내 문이 닫혔다.

지하철이 출발한 후 진태호가 재차 물었다.

“운혜야. 방금 너 부른 사람. 아는 사람 아냐? 왜- 어? 운혜야? 지금 울어?”

그 말대로였다. 이수민의 눈자위가 어느새 시뻘개져 있었다.

곡비령이 날이 선 어조로 말했다.

“저게 그, 스토커라는 건가? 그래서 도망온 거니?”

이수민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은 하나뿐인 제자를 내팽개친 죄인이다.

그런 주제에 눈물 같은 걸 흘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목까지 차오르는 무언가를 간신히 삼키고, 이수민은 다만 이렇게 말했다.

“아뇨······. 모르는 사람이에요······.”

지하철이 힘차게 달렸다.

***

역대 최악의 기념파티였다, 라고 단언할 수 있다.

풀이 죽은 지현이 목소리에 놀라서 데리러 갔더니 지현이가 지하철 역 앞에서 울먹거리고 있었다.

일단 집에 데려와서 이야기를 들어보자 싶어 데려왔더니 하는 말이······.

“언니, 수민 언니가아······. 나보고, 방해된다고 했어······. 나 같은 거 다시는 꼴도 보기 싫댔어······.”

아니, 그럴 리가.

그 새끼가 주화입마로 헤까닥 돌아버리지 않는 이상 그럴 리가 없는데.

하지만 지현이가 단단히 충격을 받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애써 사귄 기념일 축하한다고 준비해 둔 선물까지 꺼냈지만 그게 한계였다.

가만히 있다가도 슬픔이 밀려오는지 내내 침울한 기색이었다.

결국 애 엄마가 정성스레 준비해놓은 음식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대강 케이크에 불 붙여서 노래 부르고, 조금 있다가 지현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애는 계속 있으려고 하는데 그냥 내가 들여보낸 거다.

더 있으면 펑펑 울 것 같아서.

애 엄마가 지현이랑 내가 좋아하는 음식만 만든 거라서 나는 솔직히 먹고 싶었는데.

부엌에서 큰 접시를 하나 내서 음식을 조금씩 덜었다.

애 엄마도 안방에 들어가 있고 지현이는 나올 기색이 없다.

서재 방에 가서 좀 먹어야겠다.

갈비찜 너는 일단 죽었다고 생각하고.

다 먹고 애 엄마한테 맛있었다고 말한 다음에 이수민한테 연락을 해봐야-

달칵.

안방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애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힐난하는 눈빛 같았다.

애 엄마가 내 손에 든 접시와 나를 번갈아본다.

“오빠. 그거 먹으려고?”

“응? 아······.”

꼭 ‘지금 그게 입에 넘어가냐’ 라고 묻는 것 같아서 상당히 억울했다.

딸은 딸이고, 와이프가 정성 들여서 차려준 음식 먹겠다는데 왜 내가 저런 눈빛을 받아야 하는 거지?

물론 속마음과는 별개로 접시를 식탁에 고이 내려뒀다.

“아니, 아니. 그냥. 요즘 플레이팅에 관심이 생겨서, 연습 좀 해본다고 담아봤어. 왜?”

“오빠. 잠깐 나 좀 봐.”

그 말과 함께 방문이 닫혔다.

보자고 했으면서 문은 왜 닫아······.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귄위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켁.”

바로 흠칫했다.

애 엄마가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눈빛이 날카롭다.

애 엄마가 말했다.

“오빠, 있잖아. 나 그냥 모른 척 있으려고 했거든? 별 일 아니겠지 싶어서.”

“······뭘?”

내가 물은 건 깜빡 못 들었나보다. 그래. 그게 아니면 자기 할 말만 계속할 리가 없지.

애 엄마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냥 알겠더라고. 요즘 우리 집 분위기가 좀 이상했거든. 오빠도, 지현이도.”

나왔다. ‘그냥’

“그래도 이번 달은 신경 쓸 일도 많고 무슨 일 있으면 오빠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모른 척 기다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오늘은······, 나도 좀 화가 나네?”

“암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음식 준비만 하루종일 했잖아. 그럴 만하지.

애 엄마가 침대맡을 툭툭 쳤다.

자기 옆에 앉으라는 말이다.

쪼르르 다가가서 앉았다. 애 엄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눈빛이 그윽하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지? 설마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 둘째 계획은 조금 더 시간을 두기로-

애 엄마가 내 얼굴로 손을 뻗었다. 턱선 근처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내가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잠깐만,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

“오빠가 아는 거 다 말해봐.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

유혹이 맞긴 한데.

그 유혹이 아니었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