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내가 전생에 업보가 많나?
국내 최고의 헌터 정우철.
비교적 초기부터 각성자로서 활동해 왔으며 지닌 바 힘이나 업적은 전세계를 통틀어서도 톱클래스에 들어간다.
게다가 그의 비밀스러운 전생은 어쩌면 그보다도 특별했다.
그의 정체는 바로······.
소림사의 달마대사나 무당파 개파조사 장삼봉 진인에 비견될 만한 성취를 이룬 무인.
백년래 무공 천하제일로 불렸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을 집대성했다 평가받는 무학종사.
역대 무림맹주 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오래 집권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천재적인 정치인.
그 이름도 찬란한 협검무제 하무린.
······의 제자였다.
물론 정식제자는 아니었고 남출어청 같은 불명예스러운 별호도 가졌지만, 일반적인 기준에서 정우철의 성취는 결코 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우수했다.
다시 말해 정우철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어디가 모자라다거나 눈치가 없다거나, 사고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고로.
‘끄아아아아악!’
지금 정우철이 속으로 이런 단말마를 내지르는 것 역시도 당연한 이치의 귀결이었다.
“와아, 이수민 씨. 진짜 너어무, 너무너무 잘하세요! 다들 이수민 씨한테 박수쳐요. 빨리!”
저번에는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던 몸집 자그마한 여자.
오늘은 얼굴을 드러내고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손을 휘적거리며 호응을 유도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당연히 모두가 침묵했다.
몇 초가 지나도 아무도 박수를 안 치자 여자가 도끼눈을 뜨고 말했다.
“왜 반응이 없어? 빨리 박수 안 쳐요?”
그제서야 드문드문 박수 소리가 나왔다.
정우철도 일단 박수를 치긴 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장면이 만들어졌다.
‘본인도 싫어하잖아?’
이수민은 헌터들과 여자 사이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가끔 어깨가 들썩거리는 걸 보니 이 상황을 몹시 굴욕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뭐야, 왜 저래? 그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죽은 동태눈을 한 정예슬이 퍽퍽한 박수를 치며 중얼거렸다.
물론 정우철은 여자의 태도가 급변한 이유를 안다.
처음부터 기시감이 들었던 저 여자와 대머리 남자.
전생에서 본 적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을 했었다.
그리고 여자는 어떠한 언질도 없이 갑자기 이수민을 데려왔고, 아주 어화둥둥 난리가 났다.
마지막으로 정우철은 이수민의 전생을 안다.
바로 천마신교 육대 천마 진천군.
이상의 단서들을 조합하면 결론은 간단하게 나온다.
‘마교 놈들이었구나!’
천마 설운혜이자, 지금은 사부의 하나뿐인 딸이며 정우철도 극진하게 생각하는 14세 유지현 양.
최후의 정마대전 당시 그녀와 정파 백여 명의 고수가 겨룰 때 그 자리에 있던 놈들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하면 저자들의 정체 후보는 극단적으로 좁혀진다.
설운혜를 호위하던 네 명의 마교 고수들.
‘사마군이라고 했었나?’
진천군에게 팔을 잘리고 제 한 몸 겨우 가눌 정도밖에는 되지 않았던 정우철은 설운혜와도 사마군과도 직접 싸우지는 못했다.
그저 먼발치에서 봤을 뿐이니 확신할 수는 없다. 어떻게 마법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여자가 위험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반동분자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정우철이 한탄을 가득 담아 속으로 되뇌었다.
‘아아, 사부님······.’
정우철의 사부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아버지인 유수현이 걱정스럽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요즘 유지현이 귀가가 늦는다고 했다.
한데 유지현과 이수민은 아주 친한 사이이며,
이수민은 이미 사마군과 접촉한 상태다.
‘아, 안 돼!’
몇 달 전에 그 난리를 쳐가면서 간신히 모든 사태를 수습했는데 또 유지현 주변에 평범하지 않은 일이 생긴다면?
모든 것을 알게 된 사부의 진노를 이 세상 어느 누가 감당해낼 것인가.
그 유력한 후보인 정우철은 너무도 두려웠다.
‘적어도 나는 싫단 말이다!’
요즘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김유진과의 사이가 진전되고, 골치 아픈 헌터 일은 줄어들었고, 모아놓은 돈은 이미 평생 써도 다 못 쓸 정도로 많고, 존경하는 사부와 재회했다.
결코 이 행복을 깨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내가 막아야 해······!’
다행히 정우철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하나 있었다.
의도치 않게 얻어낸 비장의 무기.
지금이야말로 그걸 사용할 차례였다.
“그럼 오늘은 이만 할게요. 다들 이수민 씨 하는 거 반의 반의 반이라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시고요. 어차피 불가능하겠지만 기왕이면 목표는 높게 잡는 게 좋잖아요?”
격려인지 비난인지 알 수 없는 여자의 말과 함께 마법 교육이 끝났다.
정우철은 휴대전화를 들어 메시지를 보냈다.
한 시간 후.
어느 카페에서 이수민과 대면한 정우철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다 알고 있다.”
의외로 이수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저건 침착한 태도라기보다는······.
‘그냥 체념한 사람 같은데?’
이미 닥쳐온 일들이 너무 감당하기 버거워서 시답잖은 일에까지 당황할 겨를이 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수민이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뭘 안단 말이지?”
“마법 가르치는 애들. 아는 놈들이지?”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얘기해.”
퍽 귀찮아 보이는 말투였다.
이수민과 얼굴 맞대고 있는 건 정우철에게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어서 곧장 본론을 꺼냈다.
“네 선에서 커트해.”
“뭐라고?”
“그놈들 전생에 네 부하 아니었나? 사고 못 치게 알아서 컨트롤하라는 말이다.”
정우철은 준비한 카드를 꺼냈다.
“나한테 빚이 있었지? 우리 사부님에게 입었던 목숨빚.”
‘웃지 마, 웃으면 안 돼.’
바로 며칠 전에도 그 사부와 맥주잔을 부딪친 정우철이 필사적으로 웃음을 억눌렀다.
“그걸 지금 사용할 거다. 무제 진천군, 약속을 지켜. 그놈들을 통제해라. 마도천하니 뭐니 하는 짓을 벌일 거라면 막고 너 이외에 다른 자들과 교류하는 것도 가능하면 막아. 예를 들어 유지현 그 애라거나. 절대로 모르게 하란 말이다. 혹시 벌써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정우철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추궁했다.
그리고 간절히 염원했다.
제발 모른다고 말하길. 그들이 접촉한 사람은 아직 이수민 본인뿐이라고 말하길.
‘아니면 우리 다 좆되는 거라고······.’
묵묵부답이던 이수민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눈치가 빠르군. 우철.”
‘역시 맞았어!’
정우철은 재차 말했다.
“내가 말한 대로 할 수 있겠지?”
“그 말인즉슨 너도 이 건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고 다니진 않을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내가 진천군이라는 것까지 포함해서.”
“당연하지. 굳이 왜 말하고 다니겠어.”
이수민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약속을 지키도록 하지. 하지만 정말 그걸로 되나?”
“응? 뭔 소리야.”
“내 목숨에 대한 구명지은은 그리 가볍지 않다. 그걸로 소모해 버려도 괜찮냐는 말이야.”
“네가 왜 그런 걸 묻지?”
정우철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됐다.
이수민이 이런 식으로 마음을 써줄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수민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대로 뒤돌았다.
뒤돌아선 채로 나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걱정하지 마라. 지현이는 몰라. 오직 나만이, 그놈들의 정체를 안다.”
‘그놈들?’
단어 선택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수민의 말이 이어졌다.
“목숨빚의 대가는 좀 더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왜냐하면-”
이수민의 가녀린 어깨는 한없이 무거워보였다.
뭐랄까. 이루 말할 수 없는 무게의 짐이 그 어깨에 이미 얹혀져 있는 것 같은······.
이수민이 마지막 말을 이었다.
“네 부탁은······, 이미 이루어져 있으니까.”
그 말만 남기고 이수민이 자리를 떠났다.
홀로 남은 정우철은 황당한 심정으로 단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입에 담았다.
“개폼 존나 잡네.”
그래도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정우철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사부님. 접니다, 우철이. 드릴 말씀이 있어서-”
***
“우철아, 다시 한 번 말해봐라.”
“안 때리신다고 말씀해 주시면 기꺼이 몇 번이라도 다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철이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으며 말했다.
쿵,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 새끼 지금 자진납세한 건가?
평소 같았으면 내 지난 행실에 대해서 반성의 시간을 한 번 가져볼 만한 제스쳐였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다.
이마가 지끈거려서 한 손으로 짚고 잔에 남아 있는 맥주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러니까 그 대머리랑 여자가 전생에 지현이 쫄다구였다. 방금 그 말한 거지?”
“역시 사부님. 사태를 한눈에 정확하게 파악하시는 혜안이 정말 대단하십니다.”
“환생 이런 거 아니고?”
우철이가 단호하게 답했다.
“네. 지금 생각해 보면 머리털이 없어서 그렇지 비주얼적으로는 예전과 크게 차이도 안 났던 것 같습니다.”
“그랬냐······.”
일단 테이블 구석에 있는 벨을 눌렀다.
띵동 소리와 함께 종업원이 들어와서 물었다.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소주 두 병. 아니, 세 병 주세요. 빨간 걸로요.”
“네.”
종업원이 가지고 온 소주와 원래 마시던 맥주를 큰 잔에다 7대 3의 비율로 섞었다. 물론 소주가 7이었다.
그렇게 두 잔을 만들어서 한 잔은 우철이에게 건넸다. 잔을 넘겨주면서 미리 일러뒀다.
“내공 쓰지 마라.”
“······넵.”
이 새끼 쓰려고 했나 보네.
아무튼 건배를 하고 우철이와 내가 잔을 한 번에 비웠다.
또 만들고, 또 마셨다.
그렇게 다섯 번을 반복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입에서 요상한 넋두리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우철아아. 우리 제자야아······!”
“느에, 사부님······. 불초 우철, 듣고 있습니다아!”
“내가, 내가······. 전생에 그으렇게도 업보가 많냐? 끄윽.”
“아닙니다아!”
입에서 제멋대로 말이 나왔다.
“나도오, 시이발. 나도 열심히 했거드은? 거 로미오와 줄리엣 좀 찍어보겠다고, 어엉? 하기도 싫고오, 팔자에도 없는 맹주 해보겠다고오. 오대세가. 구파일바앙. 그 좆같은 새끼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드을! 어르고 달래가면서어, 몇십 년을 죽어라 했다고오.”
“······로미오와 줄리엣이요?”
우철이가 뭐라고 말한 것 같은데 잘 안 들렸다. 그냥 계속 말했다.
“내가! 내가아! 처음 강호출도 했을 때는 별호가 흐흐······. 별호가 천룡이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갑자기 떠억하니 나타나서는 무공 세고, 좋은 일도 많이 하고오. 비무행 다니면서 낭만도 좇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부르더라고? 참 재미나게 살았지이.”
“저도 익히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때는 세상에 근심걱정이랄 게 없었다.
힘든 일이 아주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것까지 포함해서 살아볼 만한 날들이었다.
“그러다 무림맹 구경이나 해보자 하고 갔다가 얼떨결에 어디 대주 되고. 그렇게 됐지······. 그래도 나 열심히 했다······. 열심히 살았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테이블에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하늘로 처들고 원망을 쏟아냈다.
“운상아아! 백가야! 보고 있냐? 보고 있지? 왜 나만 힘들어! 어어? 내가 전생에 뭐 그렇게 큰 죄를 지었다고 나한테만······. 어? 우철이 너 왜 잔이 비었냐······?”
“방금 마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우철이가 잔을 내밀었다.
술잔을 받아드는 손에 흔들림이 없었다.
이 자식 언제 내공 써서 알콜 내보낸 거지?
나도 심호흡을 하면서 취기를 좀 가라앉혔다.
“어우, 취하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이수민이가 자기 선에서 커트하겠다고 했습니다.”
문득 이런 충동이 들었다.
“확 두들겨 패버릴까? ‘서울을, 한국을 떠나라!’ 이렇게 말이야.”
“제 짧은 생각으로는 오히려 불안요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도 그래.”
우철이 말이 정론이었다.
마법으로 어떤 일까지 가능한지 모르니까.
정신금제를 걸어도 풀 방법이 있다면 괜히 들쑤시는 것밖에는 안 된다.
그렇다고 죽이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고.
내가 이수민이도 살려뒀는데 심지어 걔네는 지현이 부하였다잖아. 사이도 좋았다고 들었고.
아직 지현이와 만나지도 않았으며 현재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놈들.
죽여서 리스크를 제거하는 건 아무리 들키지 않을 거라고 해도 지현이에게 못할 짓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지만.
우철이에게 물었다.
“확인은 해봐야겠다. 자리 좀 만들어야겠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기특한 녀석.
내가 전생의 업보인지 뭔지 몰라도 지금 온갖 마음고생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철이가 있어서 그나마 버틸 만했다.
이번엔 맥주로 건배를 하려고 했다.
한데 우철이가 묘하게 망설이는 태도로 우물쭈물했다.
“왜? 취하냐? 그럼 안 마셔도 돼.”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왜.”
갑자기 우철이가 저 혼자 잔을 비우더니 기세를 몰아 말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잊어라.”
“넵.”
말 잘 듣는 제자가 즉각 답했다.
충분히 잘 알아들을 수 있게 일렀다.
“다 옛날 얘기야. 만약에 지현이 엄마 귀에 들어가면······. 알지?”
“사부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불초제자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좋아.”
쨍.
잔이 부딪혔다.
***
“우리 또 볼 거라고 말했지?”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던 혁련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낯이 익었다.
일전에 헌터 협회와 협상을 할 때 그쪽에서 데려온 실력자.
혁련휘는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이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강하다.’
최전성기의 진천군과 비견할 만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혁련휘는 호승심과 경계심이 마음속에서 뒤섞여 요동치는 걸 느꼈다.
묵직한 봉투를 땅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렇군. 갑자기 무슨 일이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왔지.”
그리고 남자가 입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