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너의 죄목은.
‘어디까지 가는 거야?’
추적대상도 유지현 본인도 도심은 벗어난 지 이미 오래였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상대를 추궁해 보려던 것이긴 했지만, 어디서 멈춘다는 기약도 없이 계속 쫓아가려니 약간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딱히 위험할 일은 없어 보이니까.
유지현의 기준으로 생각해 봤을 때 허공답보를 이만큼 안정적으로, 그리고 오랜 시간 펼쳐낸다는 건 상대가 어마어마한 고수라는 걸 의미했지만······, 상대는 아무리 봐도 약해 보였다.
허공에 두둥실 떠서 이따금 슈퍼맨 흉내를 내는 모습에서는 고수의 풍모란 게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지현이 괴리감에 고민하고 있던 와중에,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상대가 땅으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유지현의 표정에 이채가 스쳤다.
산속의 공터에 상대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총 다섯 명.
모두 트레이닝복이나 후드티 같은 편안한 복장이었다.
‘비밀결사 같은 거 아니었어?’
그랬다면 검정색 로브 같은 걸 뒤집어쓰거나, 최소한 복장이라도 통일되어 있어야 할 텐데.
맥이 탁 풀렸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유지현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숨어서 대화를 엿들었다.
“오, 이제 잘하네? 어디까지 갔다 왔어?”
“강남까지.”
“들키거나 사진 찍힌 거 아냐?”
“내가 너처럼 건물 태워먹고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
‘역시 맞았어!’
유지현은 자신의 날카로운 통찰력에 소름이 돋았다.
의문을 남겼던 며칠 전의 카페 화재.
이 사람들 중에 그 범인이 있었다.
여기까지 들었으면 더 볼 것도 없다.
유지현은 곧장 그들 앞으로 나서려다가······, 곧 중대한 문제를 하나 깨달았다.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
모자랑 마스크나 선글라스 같은 거라도 가져왔으면 좋았겠지만 지금은 교복 차림이다.
유지현이 다니는 중학교는 교복이 이쁘기로 이 근방에서 소문이 나 있다. 한 번만 봐도 바로 신원이 들통날 것이다. 선글라스 같은 건 애초에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답답한 마음에 유지현은 발을 동동 굴렀다.
‘으으, 역용술 같은 거 좀 배워둘걸.’
뒤늦은 후회였다.
비밀결사인지 뭔지 정체가 애매한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자리를 털고 공터를 떠날 것 같았다.
결국 유지현은 최후의 수단을 썼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아서 소리쳤다.
“너희들은 뭐냐아!”
의도와는 달리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은 목소리가 공터에 울렸다.
공터에 있던 자들이 놀라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렸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는 없었다.
강호무림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경지인 육합전성을 대충 흉내만 낸 것이었는데, 컴컴한 밤이기도 해서 의외로 잘 먹혔다.
‘엄마가 누구랑 말할 때 항상 눈 마주치라고 했는데······.’
하지만 이건 예외적인 상황에 충분히 들어갈 터였다.
큼,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유지현이 말을 이었다.
“너희를 지켜보았다. 특이한 힘을 쓰던데 뭐하는 놈들이냐.”
남자 한 명이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구······, 누구세요?”
“내가 먼저 물었잖아!”
다 큰 어른들한테 반말을 하는 것도 조금 양심에 찔리긴 했지만 이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별로 거리낄 게 없다.
‘전생부터 치면 나는 벌써 서른 살도 훨씬 넘었으니까!’
물론 그건 그다지 의미가 없는 숫자였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져 굶어죽을 뻔한 걸 진천군이 데려온 이후, 소교주 설운혜는 신교의 절대 권력자 진천군과 호위인 사마군, 그리고 신교 수뇌부의 지극한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십만대산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아꼈다.
천성이 선해서 버릇없이 패악질을 부리지는 않았으나 세상의 쓴맛을 모르기로는 현생과 별반 차이도 없었다.
허나 본인이 자각하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기어이 모든 미망을 떨쳐낸 유지현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십성을 넘어선 천마신공의 기세가 공터 전체를 뒤덮었다.
다섯 명 모두 버티기 어려워하며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
“말 안 하면 더 큰일이 생길 줄 알아라. 어어? 거기 고개 들지 마요. 지금부터 일어나는 사람 다 범인이야. 빨리 정체를 밝혀!”
마침내 한 남자가 힘겹게나마 입을 열었다.
“저희 마법 수련 중이었는데요······.”
***
남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랬다.
그들은 최근에 각성자가 된 사람들이다.
힘이 폭주해서 하마터면 사고를 칠 뻔했는데 어떤 사람들이 그걸 수습해주고 그들에게 마법을 가르쳤다.
조건은 단 하나.
다음에 잡일 시킬 일 생기면 군말 없이 도와줄 것.
유지현은 혼란스러웠다.
‘······착한 사람들 아냐?’
이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는 일반인이었다.
마나가 있고 마법이라는 걸 배웠을 뿐.
마법을 가르쳐줬다는 사람도 유지현이 듣기에는 나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대가도 없이 그런 걸 선뜻 가르쳐줬다지 않나.
유지현이 물었다.
“가르쳐주는 대신에 뭔가 요구한 게 있었을 것 아냐. 그걸 말해봐요.”
처음과는 달리 은근슬쩍 존댓말을 섞어쓰는 말투에 미약한 의구심을 가지면서 남자가 답했다.
“그런 건 없었습니다. 배웠다고 어디다 자랑하거나 소란 피우지 말라고만 했습니다.”
“금제 같은 건요? 함부로 말하고 다니면 엄청 아플 거라거나.”
“어차피 알려질 건데 필요가 없다고 하던데요······. 그리고 딴 마음 먹으면 다 아는 수가 있다고요. 대신에 허락이 있기 전에 미리 떠벌리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끼리 모여서 남들 안 보게 연습하는 거였는데······.”
‘이게 뭐야!’
단순히 학구열 높은 사람들이었다니.
이러면 괜히 겁박한 것밖에는 안 된다.
궁지에 몰린 유지현은 최후의 보루를 꺼내들었다.
“그러면, 그럼 카페에 불은 왜 냈어요?”
“그건 저희도 엄청 혼났습니다. 사람 안 다쳤으니까 봐주는 거라고, 한 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절대로 가만히 안 둘 거라고 하셔서 최대한 문제 생길 일 없게 장소도 여기로 옮긴 건데······.”
‘아앗······.’
마침내 유지현은 완전무결한 가해자가 됐다.
상대방은 윤리의식 높은 모범적인 집단이었고 자신은 괜히 오해를 해서 그 사람들을 못 살게 군 것이다.
한참 언니 오빠들인데 내공을 써서 강제로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반말까지 써가면서 추궁했다. 어떠한 명분도 없이 오로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벌인 일이다.
소설을 연재 중단하고 도망친 이후 자기혐오감에서 해방됐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 번 우중충한 감정이 자신을 덮쳐오는 것 같았다.
“으, 으으······.”
당장 떠나야만 한다.
여기 더 있다간 인간으로서 중요한 무언가가 부서져 버릴 것이다.
그런 위험을 감지한 유지현은 서둘러 마지막 한 마디를 남겼다.
“아, 알았어요. 그럼 열심히들 해요. 그래도 또 불 내고 그러면 내가 혼내줄 거예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천마신공의 기세가 사라졌다.
풀려난 사람들이 공터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유지현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네.”
“흐음······.”
혁련휘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방금 천유화가 보고한 것.
주군을 찾는 것과 그 이후에도 이래저래 부려먹을 일이 있을 것 같아 마법을 가르쳐준 자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와 접촉했다는 내용이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기세가 강했다는데 말투나 하는 행동은 되게 어리숙했다더라고요.”
“그럴 수가 있나?”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 사람들 저한테 거짓말 못하니까요. 아마 사실일 거예요.”
잠시 고민하다 혁련휘가 입을 뗐다.
“유화 네가 일러둬라.”
“뭐라고요?”
“만약 그자를 또 만난다면 우리 앞으로 한 번 데려오라고.”
“그래도 괜찮을까요?”
말과는 달리 천유화도 그다지 걱정하는 투는 아니었다.
혁련휘가 설명했다.
“어떠한 금제나 제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고 했지? 행동거지도 어수룩했고. 강하지만 결코 위협은 되지 않을 자라면 얼굴을 익혀두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알겠어요.”
그리고 혁련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유화가 웃으며 물었다.
“어디 가세요?”
“태호와 비령이 주군께 결례라도 저지르진 않는지 감시하러 간다.”
“흐응······.”
천유화가 별다른 말 없이 콧소리만 내자 혁련휘가 추궁처럼 물었다.
“뭐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래부터 푼수끼가 다분한 진태호와 곡비령은 이수민이라고 이름을 밝힌 주군 옆에 찰싹 붙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하지만 혁련휘는 무게 잡고 있느라고 그러지 못했다.
그게 아쉬워서 감시를 핑계로 자리에 끼어보려는 것이리라.
피식 웃은 천유화가 혁련휘와 나란히 섰다.
“저도 같이 가요. 저 혼자 여기 있어봐야 뭐해요.”
협회가 사마군에게 제공해준 단독주택.
방을 나서자 진태호가 손짓발짓을 동원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네가 말야. 나한테 이랬거든. ‘오라버니가 왜 제 부하예요? 저는 그런 거 싫어요! 우리 가족이잖아요. 그쵸?’”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 주군이 그 말을 유심히 듣는 중이었다.
“내가 이랬지. ‘교주님이 들으시면 경을 치실 일입니다. 부디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니까 운혜 네가 ‘싫어, 싫어! 소교주 명령이에요. 운혜야, 해보세요. 운혜야.’”
진태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다짐했지. 이 애를 위해서는 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다고.”
잠시 말을 멈춘 진태호가 흐르지도 않은 눈물을 슥 훔쳤다.
그때 이수민이 망설이듯이 말을 꺼냈다.
“들어보면 그 교주라는 사람이 저를 굉장히 아낀 것 같은데 왜들 그렇게 미워-”
“아냐, 운혜야. 그건 그냥 학대였어, 학대. 운혜 너는 어려서 그걸 잘 모른 거지. 이십 년을 넘게 속아넘어간 거야.”
“그, 그랬나요?”
진태호가 과장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만한 악당이 세상에 없었다니까? 거 정파에 하무린이라는 양반도 있었다고 하고, 고금을 통틀어 비슷한 악당이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당대의 천하제일인 것만은 틀림없지. 운혜 네가 워낙 심성이 착해서 물들지 않은 거야. 천만다행인 일이지······.”
진태호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옛 상사의 흉을 봤다.
“퍽하면 주먹 날아가고, 아주 자기 말은 무조건 법이고 진리인 독재자에, 음식 강요에-”
“-짝궁뎅이.”
“그래. 짝궁뎅······. 응?”
느닷없이 던져진 천유화의 발언.
진태호가 놀라서 그녀를 쳐다봤다.
천유화는 여유롭게 말했다.
“어머, 제가 말한 적 없어요? 예전에 같이 목욕한 적 있는데 그때 봤어요. 확실해요.”
천유화가 양손을 앞으로 펼쳤다.
둥그란 무언가를 움켜쥐는 듯한 손모양이었다.
특기할 만한 부분이라면 오른손과 왼손의 곡선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요.”
“푸하핫!”
진태호는 배를 잡고 굴렀다. 천유화는 만족스럽게 조소를 지었다.
평소 배신자 기질이 다분하던 곡비령마저도 웃음을 참지 못해 푸흡, 하는 소리를 흘렸다.
혁련휘는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으나 입 주위가 씰룩거리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오직 이수민만 이를 뿌드득 갈았다.
‘거짓말하지 마! 나랑 목욕한 적 없잖아!?’
진태호가 일어서서 노래를 불렀다.
“진천군 엉덩이는 짝궁뎅이래요. 푸하하핫!”
이수민은 다짐했다.
‘기다려봐라. 한 명씩, 기회를 봐서 한 명씩 사냥해 주마······!’
그렇게 떠들썩한 분위기가 계속되던 그때.
초인종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왔나 보네.”
진태호가 반색하며 현관을 나섰다.
오늘만 몇 번이고 찾아왔던 불길한 예감이 다시금 경종을 울렸다.
이수민은 초조한 기색으로 진태호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렸다.
삼십 초 정도 후에 진태호가 들어왔다.
곧바로 훅 풍겨오는 냄새.
진태호가 경쾌하게 외쳤다.
“치킨 왔다-!”
“몇 마리 시켰어?”
“1인 1닭. 다섯 마리.”
그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달은 이수민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까지 포함이야!?’
진태호가 싱글벙글 웃으며 치킨 박스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우리보다 훨씬 많이 먹어봤겠지만, 닭 제대로 튀기는 맛집을 한 군데 찾았거든. 먹어보면 깜짝 놀랄걸?”
진태호가 통통한 닭다리 하나를 들고 이수민에게 건넸다.
이수민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닭 별로 안 좋아해요.”
“그래? 그럼 족발 시킬까? 탕수육?”
이수민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저, 저는 치킨 무가 좋아요!”
눈에 보이는 것 중에 고기 안 들어간 게 치킨무밖에 없어서 되는대로 말한 것이다.
한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마군 전원이 입을 꾹 다물고 이수민만 응시했다.
‘들켰나? 목뼈라도 들었어야 하나?’
그러나 착각이었다.
진태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기억을 잃었어도, 환생을 했어도 놔주지 않는 거냐, 진천군?”
진태호가 달려와서 이수민을 끌어안았다.
곡비령도, 천유화도.
혁련휘마저도.
이수민이 낮게 비명을 질렀다.
“숨, 숨 막혀요······.”
“괜찮아. 지금부터 바꿔나가면 돼. 하고 싶었던 거랑 하지 못했던 것들 전부 다 하게 해줄 테니까······.”
‘숨 막힌다는데 무슨 개소리야!’
그래도 당장 급한 위기는 넘겼다.
치킨 무를 오도독 씹으면서 이수민이 말했다.
“저기, 천유화 씨?”
“왜 운혜야?”
금방이라도 녹을 것처럼 상냥한 목소리였다.
음침하기로는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저 계집애가 낸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협회에서 마법이란 걸 가르치신다고 했죠?”
“응. 일주일에 두 번.”
“거기 저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천유화가 손뼉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왜? 마법 배우고 싶니? 배우고 싶으면 여기서 내가 가르쳐주면 되는데.”
“아뇨. 바쁘실 텐데 죄송하니까요.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배우면 좋겠어요.”
저 계집애와 단둘이 붙어서 무언가를 배우는 건 끔찍했다.
게다가 마법이라는 걸로는 사마군 중에서 천유화가 가장 고수인 것 같았다.
일대일로 배우다가 혹시나 정체를 들킬까 염려스러웠다.
‘다른 사람들 옆에 묻어가서 배우고, 파훼법을 발견하는 거야. 그리고 둘만 있을 때 네년 먼저 단죄해 주마······!’
죄목은 물론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유포죄였다.
천유화가 생글생글 웃으며 혁련휘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다음번은 운혜랑 둘이서만 갈게요. 안 오셔도 돼요.”
설운혜와 둘만의 시간을 가져보려는 수작이었다.
혁련휘는 아쉬웠지만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